유채와 벚꽃이 흐드러지면 봄이고, 한라산 꼭대기에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겨울입니다. 까만 흙에서 감귤이 불란지(반딧불의 제주어)처럼 빛나면 가을이지만, 그것의 정취를 즐기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하늘과 바다, 산과 들이 온통 푸르러서 단조롭기 때문입니다.

북적대고 소란스러운 도시를 떠나서 제주로 이사했을 땐 모든 게 좋았습니다. 푸른 산과 평야, 새파란 하늘과 바다를 보면 눈이 시원해지고,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지요. 볼일이 있어서 김포공항에 내리면 도시의 악취가 끔찍했고, ‘얼른 돌아가야지’ 생각했습니다.

바닷가에서 놀고, 말을 타면서도 가을이면 단풍이 그리웠습니다. 알록달록 물든 단풍이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설악산 계곡으로 달려가고 싶었지요. “그럼 단풍 구경을 가면 되지."하는 동무들도 있었지만, 아이는 홈스쿨링 중이었고, 아내는 직장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아내가 쉬는 날에 느지막이 밥을 먹고 물었습니다.

“다향이랑 소풍 갈까요?”

“소풍? 어디로요?”

“겨울이 오기 전에 단풍을 보고 싶어서요.”

“(제주)어디에서 단풍을 봐요?”

“영실(靈室)이 예쁘다고 해서 다향이랑 갔는데 단풍이 덜 들었더라고요. 오늘 가면 절정일 것 같아서.”

“그래요, 그럼.”

두툼한 외투랑 모자, 그리고 보온병에 따뜻한 유자차를 챙겨서 집을 나섰습니다. 제주의 11월은 춥지 않지만 고지대의 영실 계곡은 계절을 앞서가기 때문입니다. 1100도로에서 영실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의 단풍이 찬란하게 빛났고, 아이는 “엄마 저거 봐.”를 연신 외쳤지요. 영실에 가까이 갈수록 단풍은 짙어졌고, 낙엽도 점점 소복이 쌓였습니다.

자동차에서 내리자마자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백나한’이나 ‘오백장군’으로 불리는 영실 기암을 보면서 입이 딱 벌어졌지요. 수많은 바위와 어우러져서 빛나는 단풍이 ‘와! 정말 절경이구나. 설악산이 부럽지 않은 걸’이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영실 코스의 ‘오백장군’ 전설이 깃든 영실 기암 일대는 단풍 사이로 우뚝 솟은 기암이 마치 오백 장군이 서 있는 것처럼 도드라져 가을의 절경을 볼 수 있다.(사진 출처 : 한겨레신문, 2017.10.29.)
영실 코스의 ‘오백장군’ 전설이 깃든 영실 기암 일대는 단풍 사이로 우뚝 솟은 기암이 마치 오백 장군이 서 있는 것처럼 도드라져 가을의 절경을 볼 수 있다.(사진 출처 : 한겨레신문, 2017.10.29.)

 

두두두… 두두두…

가을 정취에 젖어서 따뜻한 차를 마실 때 요란한 굉음이 들려왔습니다. 저만치서 할리데이비슨 두 대가 올라옵니다. 두두두… 두두두… ‘이렇게 예쁘고 고즈넉한 곳에 오토바이라니……’하는데 가죽 재킷과 바지를 입은 탄탄한 몸매의 남녀가 오토바이에서 내렸습니다. 남자가 가죽 재킷을 벗는데 군살 하나 없는 근육질의 몸을 민소매가 겨우 가리고 있습니다. 속으로 ‘와!’하는데 헬멧을 벗고, 두건을 푸니 백발이 드러납니다.

아가씨로 짐작했던 분도 두건을 벗고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데 백발입니다. 두 쌍의 어르신 부부가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영실에 단풍 구경을 온 것입니다. 번호판을 보니 오토바이를 배에 싣고, 인천에서 온 것 같습니다.

네 명의 백발 청춘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커피를 마시는데 '참 멋있다. 나도 저 나이에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아니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두두… 두두두… 시끄럽다고 여겼던 할리데이비슨의 엔진 소리가 근사한 연주로 뒤바뀌었습니다.

 

편집 : 박춘근 편집위원

오성근 주주통신원  babsangman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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