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유(善寬柔)

떠오른 생각들로 순서도 정오(正誤)도 없다. 오호(惡好)와 시비(是非)를 논할 수는 있지만 대상은 아니다. 중복도 있으므로 감안하시면 좋겠다. 수차에 걸쳐 싣는다.

수변임에도 불구하고 고목도 아닌 나무가 왜 고심부러졌을까?   고사된 이유가 무엇일까? 물과 공기와 햇빛이 충분한대도 말이다. 인간도 그렇지 않을까? 외부 환경이 좋다고 잘 살거나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 나무와 같지 않을까? 
수변임에도 불구하고 고목도 아닌 나무가 왜 고심부러졌을까?   고사된 이유가 무엇일까? 물과 공기와 햇빛이 충분한대도 말이다. 인간도 그렇지 않을까? 외부 환경이 좋다고 잘 살거나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 나무와 같지 않을까? 

 

<선관유(善寬柔)>

어떻게 살아야 바른 삶일까? 그래도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답게 살다 가야하지 않을까? 이 나이되도록 이런 의문 속에서 산다고 생각하니 답답하고 착잡하다. 사람답게 사는 게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게 답이 있을까? 지금까지 살아온 내 나름의 결론은 善한 삶이다. 善한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善은 착함이고 바름이다. 정직이고 정의이며, 공정이고 공평이다. 또한 진리이고 진실이며 아름다움이다. 善은 강하면서도 약하고 순하다. 善은 우리가 추구하고 실천해야할 최고최상의 가치가 아닐까? 善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의 바탕이리라. 이성과 진리, 종교와 신앙, 神까지도 善앞에서는 머리를 숙이고 무릎 꿇지 않을까? 善은 만인만물에게 태양과 같으니, 善 앞에서는 자신의 빛을 잃고, 善이 없으면 자기존재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리라. 자기의 안과 밖으로 나타나는 善이 자신임을 알기 때문이다. 善은 생명체의 가장 아래서 그들의 근본을 받혀주는 한편, 가장 상층부에서 그들의 안전을 지켜 준다. 善은 처음부터 끝까지, 최저에서 최고까지, 종횡을 아우르는 항구여일(恒久如一)의 가치이리라. 善에는 배반이 없고, 和同하고 상생하며 끝까지 善하다. 善은 그만큼 위대하다.

 

영혼의 선(善)은 육체의 건강과 같다. 선(善)을 행하지 않는 자는 육신부터 병든다. 선(善)한 자는 자기의 선함을 내세우지 않고, 남에게 선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 사랑을 요구하듯이, 선하지 않은 자들이 선을 요구한다. 사랑과 선은 깊은 심중(心中)에서 발현되므로 자연스럽고 억지하지 않는다. 선과 사랑은 자기희생과 봉사가 기반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겸손하고 겸허하다. 빛이 없으면 식물이 성장할 수 없듯이, 인간에게 선은 식물들에게 빛과 같다. 선은 선택하고 구분하여 차별하지 않는다. 선(善)은 누구에게나 선하므로 공정하고 공평하다. 사랑과 선도 습관이다. 사랑과 선은 때에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늘~ 일상의 일처럼 선하고 사랑한다.

 

善을 바르게 실행하기 위해서는 관유(寬柔)가 필요하다. 관유는 선을 더욱 선하게 한다. 관유가 필요함은 사람과 대상에 따른 차이 때문이다. 善은 절대가치이지만 상대적으로 작용한다. 만사는 모든 것에 동일하게 동시에 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은 일시(日時)와 처지에 따라 적절한 유용이 필요하다. 그 용례가 바로 寬과 柔를 활용한 善에 이름이다. 善은 삶의 최고최상의 자산이요 가치이지만, 말글로는 극히 초보단계이다. 그러므로 맘의 내실과 몸의 외양을 갖추고, 행동으로 실천함이 좋다. 마음 없는 외양은 일순간이요, 외양 없는 마음은 실효가 없다.

 

선은 관심(寬心)으로 행해야 한다. 관(寬)은 너그러움이요 포용이다. 여유로움이요 느긋함이며, 수긍이요 수용이다. 관(寬)은 상대를 좋아하고 착하게 본다. 자신 안에 비치는 그를 어여삐 본다. 그를 양해하면서도 어찌하지 못한 안타까움은 있지만 미움이 없다. 더구나 배척배반을 아니한다. 상대의 흠과 잘못을 찾아 지적하거나 질책도 않는다. 흠과 잘못이 어찌 없겠는가만 혹 있다하더라도 내색하지 않고 기회를 기다린다. 때가 되면 조용하고 부드럽게 말한다. 조언과 충고임이 나타나지 않게 진심어린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한다. 자신의 태도와 어투에 따라 오히려 반감을 사고 역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다가 상대의 표정이 수긍하는 모습이면 계속하지만 반대일 경우에는 즉시 그만 둔다. 특히 상대의 흠과 잘못을 다중 앞과 본인이 없을 경우에는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차라지 그냥 두는 게 낫다. 침묵은 백 마디 말보다 낫다고 하지 않는가. 칭찬도 신중해야한다. 확실하지 않는 내용으로 어설프게 칭찬하면 오히려 조롱이라 생각하고 반감을 산다. 칭찬할 것을 칭찬하라. 그렇지 않으면 놀림과 비양이 된다. 상대를 관용으로 대하면 상응하는 반응이 오기 마련이다. 그게 바로 善이다.

 

선(善)은 유심(柔心)으로 해야 한다. 유(柔)는 부드러운 순함이요 여린 약함이다. 모성으로 감싸는 포근함이다.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항상 곁에 있으며 함께 한다. 소리 없이 흐르는 물과 같고 따뜻한 봄바람 같다. 유(柔)는 엄마 품과 손이다. 솜털과 깃털처럼 아늑하고 따뜻하다. 흔히 물이 약하다고 하지만 강하기도 하듯이, 여리고 약하면서 부지불식간에 도움을 주고, 때에 따라서는 세고 강하게 도와준다. 하지만 유(柔)는 그런 것만은 아니다. 유(柔) 속에는 뼈와 가시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드러움 속에 있는 유(柔)의 묘약을 깨우치지 못하면, 유(柔)는 단순 부드러움에 그치고 본질가치를 잃는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는 욕망의 산물이다. 욕망의 파생물들이 비난과 비판이다. 비판과 비난은 자신의 잘못과 흠을 가리기 위한 술책이다. 남의 잘못과 흠을 잡아 그를 가르치거나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훈계와 조언은 더욱 삼가 해야 한다. 만사의 귀책은 자신에게 있으므로 자신에게 함이 마땅하다. 욕망은 주로 육욕(식욕과 성욕), 물욕, 권력욕, 명예욕 등이다. 인간은 알고 보면 욕망덩어리다. 욕망이 삶의 끈이 되기도 하지만, 인생을 망치는 독약이 될 확률이 높다. 욕망은 줄이고 또 줄여서 끝내는 없애야 한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이를 더욱 키우고 증폭시킨다. 이들을 키워 성취하고 달성하는 것을 성공이라 치부하면서 말이다. 그로 인해 세상은 더 어지럽고 혼탁해지지 않을까? 이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도구가 교육과 종교인데 오히려 반대로 가고 있다. 이들은 외부의 것이기에 한계이리라. 그보다는 근본이고 본질인 자기내성을 길러 이행하는 것이 바로 선(善)한 삶이다.

 

선(善)을 이행하고 베푸는 데는 관유(寬柔)가 묘약이다. 이 또한 완전치는 않다. 인간사회에서 어찌 완벽이 있겠는가? 각자의 성향과 상황에 따라 관유(寬柔)의 작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본인 의식과 수용이 중요하다. 우리는 벤치마킹이라 하면서 주저 없이 남을 따라 한다. 쉽고 위험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허나 바람직하지 않다. 남이 사는 방식대로 따라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게 자기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다소 부족하고 위험해도 자신의 길을 가는 게 옳지 않을까? 거기에 생생한 자신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천하명약도 자신이 먹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선관유(善寬柔)도 그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善)하게 삽시다. 선인(善人)이 됩시다.

잎과 열매로 풍성한 나무도 있지만 헐벗고 매마른 나무도 있다. 무엇 때문인가? 그들 각자 몫인가?
잎과 열매로 풍성한 나무도 있지만 헐벗고 매마른 나무도 있다. 무엇 때문인가? 그들 각자 몫인가?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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