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어는 입이 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머리가 커서 대두어(大頭魚)라고 적은 기록들도 있다. 한자어로는 대구어(大口魚), 구어(夻魚), 화어(㕦魚)라고도 한다. 몸길이는 75∼100㎝이며 옆으로 편편하고 몸의 앞부분은 둥글다. 대구는 생김새가 명태와 비슷하지만 덩치가 크고 주둥이 아래에 수염이 한 개 나 있는 것이 특이하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남해의 가덕만과 진해만 일대가 대구의 본고장이고 가덕도 일대 속칭 깽이 바다라고 하는 어장에서 잡히는 대구를 최고로 여겼다고 한다. 이곳에서 잡히는 대구가 임금님 수라상에 올라갔던 명품으로 여겼다고 한다.

가덕도 연안에서 태어난 새끼대구들은 북태평양으로 가서 자란 후 산란기인 겨울철이면 알을 낳기 위해 한류를 타고 고향으로 되돌아온다고 한다.

회유성 어종인 대구가 모두 다 회유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서해에서 잡히는 대구는 냉수대에 갇혀 토종화 되어 크기가 가덕대구에 비해 절반 정도에 불과해 왜대구라고 부른다고 한다. 왜대구는 가덕대구에 비해 육질이 떨어져 대접받지 못한다고 한다.

대구 출처 : 우리바다 어류도감
대구 출처 : 우리바다 어류도감

대구는 횟감으로도 좋지만, 아가미에 붙은 볼때기 살로 만든 대구 뽈찜은 별미로 식도락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대구의 맛을 두고 전하는 일화가 있다.
한 생선 집에서 혼례를 행하려고 여러 고을의 일가들을 초청하였다. 해가 저물어도 시작되지 않아 한 나이 많은 어른이 주인을 불러, 우리 일가들이 아직 다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주인이 즉시 대답하기를, 일가는 거의 다 왔습니다만, “아직 대구(大口) 아저씨가 안 보이는군요.”라고 대답하였다는 재미나는 말도 있다.

조선 정조 때 간행된 ‘공선정례’는 각종 공선(貢膳) 진상품의 물목을 적은 책인데, 건대구, 대구어란해(알젓), 대구고지해(이리젓) 등이 포함돼 있다.

실록에 보면 매년 10월 천신 품목으로 “웅천의 대구어를 진상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대구어의 맛을 못 잊어 진해를 떠날 수가 없다는 말도 전한다.

정조 16년 3월 17일 전라감사 정민시(鄭民始)의 장계 기록을 보면 진도에 사는 신귀득(申貴得)이란 사람이 지난해 10월에 대구를 사려고 배를 타고 가덕도로 갔는데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대마도 추포촌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산림경제 제3권 구급 편에는 약재로 쓴다는 기록도 있다.

대구어(大口魚) 가죽을 물에 적셔 콧구멍을 막아 주면 코피가 그친다고 했으며, 젖이 부족한 산모에게 대구탕을 끓여 먹이면 젖이 많게 된다고 했으며, 회충(蛔蟲)이 많은 사람에게 대구어를 씻지 않고 달여 구충제로 먹이는 등 민간요법이나 음식으로 즐겨  먹었다고 한다.

아랫글은 고전번역서인 동강유집 제9권에 실려 있는 시다.

생창역(生昌驛)

★생창에 들어왔으나 해는 뜨지 않았고 / 路入生昌日未舒
십 리 길을 걸어 와도 인가가 적구나 / 行行十里少人居
그 중에 만난 사람들 상인이 많았는데 / 箇中逢着多商旅
짐바리 대부분이 관동의 대구어였다네 / 盡馱關東大口魚

당시에는 대구를 판매하는 상인들이 많았던 것 같다.

★, 생창역(生昌驛)은 강원도 김화현(金化縣) 남쪽 4리에 있는 역이다.

마광남 주주통신원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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