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톤」, 「변명」을 통해서 본 소크라테스의 죽음

소크라테스는 코가 넙죽하고 배가 불룩 나왔으며 용모가 흉했다. 그러나 그는 문답법을 통해 당대 지식인들인 소피스트의 위선을 곧잘 드러냈으며 이는 그들로 하여금 적개심과 미움을 사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했다.(출처 : 구글 무료사진)
소크라테스는 코가 넙죽하고 배가 불룩 나왔으며 용모가 흉했다. 그러나 그는 문답법을 통해 당대 지식인들인 소피스트의 위선을 곧잘 드러냈으며 이는 그들로 하여금 적개심과 미움을 사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했다.(출처 : 구글 무료사진)

소크라테스의 사상이나 삶의 흔적은 그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저서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글쓴이는 플라톤이 쓴 「크리톤」과 「변명」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왜 부당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는지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플라톤의 저작은 모두 대화체 형식의 글들이다. 그 중에 가장 짧은 대화체 형식의 글이 「크리톤」이다. 「변명」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정에서 사형선고가 부당함을 소크라테스가 조목조목 변론한 내용이다.

세계 4대 성인 중 한 명인 소크라테스는 기원 전 5세기 때 아테네에서 활동했던 현자(賢者)다. 그 스스로 자신이 고백했듯이 초기 소피스트(sophist)에 속했던 인물이다. 소피스트는 지혜(sophia)를 추구했던 지식인을 가리킨다. 진리를 갈급해 하고 지혜를 사모했던 일단의 사상가를 지칭한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정치 전성기였던 페리클레스 시대가 끝나고 아테네는 급격히 쇠락했다. 거기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게 패배하면서 형성된 정치사회환경과도 관련이 깊다. 아테네 민주정치의 타락과 30인 폭군 등 과두정치의 등장은 당시 극도로 가치관이 혼란한 정치사회상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소크라테스에게 무거운 벌금형이 떨어질 경우 벌금을 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는 사실이다. 공자나 맹자처럼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격식에 맞는 품위 있는 복장을 한 채, 제후들을 만나기보다 평생 맨발에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낡은 옷을 걸치고 다닐 정도로 가난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후기 소피스트들과 달리 지식을 돈 받고 팔지 않았다. 아테네 저자거리 어디서든 청년들과 대화하기(가르치기)를 좋아했다. 그의 교육방식인 대화법(문답법)은 무지(無知)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을 갖게 했기에 그를 따르는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공동체의식이 매우 투철했다는 점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페리클레스 사후, 타락한 아테네 민주정치에 희생되었음에도 그는 분명히 공화주의자의 면모를 지녔다.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했고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전쟁터에 나가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와 명예에 집착하기보다 ‘정신의 드높임’, 바로 ‘영혼의 아름다움’에 최상의 가치를 두었다. 어린 시절 죽마고우였던 크리톤이 이른 새벽 감옥에 찾아왔을 때 소크라테스는 단호히 탈옥을 거부했다. 아무리 타락한 사회지만 크리톤의 권유대로 간수를 매수하고 탈옥하는 자체가 ‘영혼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저버리는 행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영혼불멸을 믿었고 죽음을 ‘축복’ 내지 ‘가장 큰 선(善)’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기존에 알려진 대로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임을 준수하기 위해 독배를 마시지 않았다.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저서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다. 후대 철학자들이 지어낸 농간이자 독재자들이 즐겨 강조했을 뿐이다.

그는 「변명」에서 밝혔듯이 일흔 살을 살았다. 재판 당시 아들 셋이 있었고 한 명은 청년이 되었지만 둘은 아직 스무 살이 안 된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재판정에서 어린 아이들을 동원해 감성에 호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기소한 자들을 ‘파렴치한’으로, 그리고 후기 소피스트의 행태를 맹비난하면서 그들의 언행은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오늘날 출세를 위한 입시과목으로 영어, 수학을 가장 중요시한다면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당대엔 수사학과 변론술, 웅변술이 출세를 위한 가장 고급스러운 지식이었다. 화려한 말솜씨 기술을 익혀서 대중 앞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뛰어난 변론술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모든 소피스트의 타락한 모습에 경멸스러운 태도를 보냈고 그를 통해선 덕을 간직한 사람으로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물질이 정신을 압도한 타락한 아테네 사회에서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기소한 자들은 민주주의자 아뉘토스와 멜레토스였다. 가치가 전도된 어리석은 대중들로 구성된 사회에선 민주정치는 중우정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아테네 민주정치가 안고 있는 대표성의 위기와 공공성의 위기가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그림 <소크라테스의 죽음>. (출처 : 글쓴이가 사진을 자르고 재편집하였음) 계단 쪽으로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가 면회 후 나가는 모습과 간수가 얼굴을 돌린 채 독배를 건네는 장면, 그리고 독배를 마시지 말라고 안타까움 속에 만류하는 친구들, 그 속에 침대 끝자락 고개를 푹 숙이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앉은 이는 28살 청년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민주정치 아래 아테네 최고의 현자인 스승의 죽음을 목도하고 민주정치를 혐오했다. 오직 가장 지혜로운 자인 철인, 즉 철학자가 통치하는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그림 <소크라테스의 죽음>. (출처 : 글쓴이가 사진을 자르고 재편집하였음) 계단 쪽으로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가 면회 후 나가는 모습과 간수가 얼굴을 돌린 채 독배를 건네는 장면, 그리고 독배를 마시지 말라고 안타까움 속에 만류하는 친구들, 그 속에 침대 끝자락 고개를 푹 숙이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앉은 이는 28살 청년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민주정치 아래 아테네 최고의 현자인 스승의 죽음을 목도하고 민주정치를 혐오했다. 오직 가장 지혜로운 자인 철인, 즉 철학자가 통치하는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대중선동에 능한 자가 정치권력자로 등극하고 공적 가치를 결정하는 투표에 아테네 시민들의 참여도는 매우 낮았다. 오죽했으면 저자거리에서 굴비 엮듯이 시민(자유민)들을 투표장으로 몰아갔을까?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기원전 5세기 후기는 그렇게 가치가 전도된 타락한 사회였다.

프로타고라스, 히피아스, 트라시마코스, 고르기아스, 프로디코스로 대표되는 소피스트들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나 ‘정신의 탁월함’을 믿지 않았다. 입신출세를 위한 지식을 돈 받고 팔았고 그것을 당연시했다. 부유한 청년에겐 높은 수업료를 받았고 가난한 청년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부유하거나 가난한 청년을 가리지 않았고 소피스트의 지적 타락을 비웃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오만한 자들이라고 규정했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그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거기에서 찾았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렇질 못했다.

오늘날 ‘입시교육=교육’인양 지식을 돈 받고 파는 현대판 소피스트들을 우리는 적잖이 목격한다. 그런 지식장사꾼을 소크라테스는 경멸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을 비난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실제로 소크라테스와 동시대 인물이자 프로타고라스와 함께 1세대 소피스트인 고르기아스는 탁월한 변론술로 어마무시한 부를 축적했다. 황금으로 자기 동상을 세울 정도로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와의 논쟁을 통해서 그의 지적 부박함을 통렬히 비판한다.

유료 인강을 통해서, 또는 1타 강사가 되어 수십 억, 수백 억대의 소득을 벌어들이는 그들을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회는 이미 아테네 사회처럼 타락한 사회이다. 당대 타락한 여론에 포획된 지배 권력은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신을 믿지 않는다고 모함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당한 것은 타락한 사회에서 청년들에게 출세를 위한 지식을 강조하기보다 성찰이 없는 그러한 삶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스란히 당대 주류인 소피스트들에게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위협’으로 다가갔다.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전교조가 내세운  <참교육>은 학생들의 건강한 성장과 맑고 밝은 <영혼의 성숙>을 위한 교육이념이다. 89년 교육운동, 교육민주화운동 당시 전교조는  군부독재권력-안기부-검찰-교육부-학교당국의 극심한 탄압과 조중동 수구언론들의 색깔론과 이념 공세에도 불구하고 한국교육의 미래를 위한 아이들의 희망으로서 양식 있는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1,500명이 넘는 교사들이 단지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되고 파면, 해임당했다. <참교육>은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교육운동이자 80년대 군부독재에 저항한 교육민주화운동이었다.(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전교조가 내세운 <참교육>은 학생들의 건강한 성장과 맑고 밝은 <영혼의 성숙>을 위한 교육이념이다. 89년 교육운동, 교육민주화운동 당시 전교조는 군부독재권력-안기부-검찰-교육부-학교당국의 극심한 탄압과 조중동 수구언론들의 색깔론과 이념 공세에도 불구하고 한국교육의 미래를 위한 아이들의 희망으로서 양식 있는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1,500명이 넘는 교사들이 단지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되고 파면, 해임당했다. <참교육>은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교육운동이자 80년대 군부독재에 저항한 교육민주화운동이었다.(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입신출세교육=반(反)교육’임을 분명히 하고 성찰을 통해 <참교육>을 지향한 소크라테스의 존재 자체가 눈엣가시였기에 다수결로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에 대한 찬성과 반대표는 표 차이가 크게 나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35표만 반대표가 나왔다면 소크라테스는 무죄를 선고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부당한 죽음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진리를 좇고 있으며 옳다는 것을 확신에 찬 모습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변명」에서 밝혔듯이 성찰이 없는 그들의 삶이 오히려 죽은 삶이며 자신은 죽음 이후 다시 아름다운 영혼으로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 확신했다.

한국 사회는 십 수 년 간 OECD 국가 가운데 청소년 행복지수 꼴찌인 사회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8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9세 ~ 24세 청소년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다. 인구 10만 명당 7명~8명에 달했다.

『연합뉴스』 2018년 4월 26일자 보도에 따르면 청소년 4명 중 1명은 일상생활을 그만둘 정도로 슬픔과 절망감으로 우울증 고통을 겪는다.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오늘 행복하지 못한 청소년이 미래에 행복한 어른으로 살아갈 리 만무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초등학교 어린아이들 우울증 지수 또한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게 우리 어른들이 만든 세상이다. ‘경쟁’의 원리가 교육의 원리가 아님에도 경쟁을 극한으로 치닫게 했고 그것에 ‘공정’이란 프레임을 덧씌우는 행위를 매년 반복하며 당연시 해왔다. 그런 야만적인 문화 속에서 성장한 20~30대 청년들 중엔 수시전형으로 입학한 동료 학생들을 ‘수시충’으로 부르며 모멸감을 주는 언어를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매우 비틀린 엘리트의식이 아닐 수 없다. 수능 몇 개 더 잘 찍은 점수를 받았다고 그들이 내건 ‘공정’의 잣대가 과연 정의로우며 아름다운가?

본질을 회복하는 ‘참교육’만이 비틀린 엘리트의식과 왜곡된 ‘공정’의 잣대를 바로 잡을 수 있다. 가치가 전도된 고대 아테네 사회, 오늘날 우리 교사들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되새기는 이유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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