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미술 화가 이명복, 제주 <갤러리 노리>

《내 마음에 걸려있는 호수》

어느 날 초저녁 퇴계로 극동빌딩 앞에서 40대 초반의 남자가 타고 목동 현대백화점 근처 아파트까지 가자고 했다. 보통은 택시 안에서 손님과 잠깐 나누는 대화라는 것이 날씨로 시작해서 푸념과 때로는 신세타령, 정부를 비판 혹은 옹호하는 이야기까지 동네 사랑방에 가깝다. 선거철이 되면 자연스레 정치 얘기로 옮아간다.

그 당시도 대선 때였다. "저도 386세대 지인들이 국회의원도 있고 해서 금품으로 후원을 헀죠"

"네~ 금품이라~ 보통은 돈으로 후원을 하지 '금품'이면 그림? 그렇다고 꽃그림을 후원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요, 그렇다면 민중미술화가 이명복씨?"

"헉~ 예!~ 이명복입니다.."

택시에 탄 손님의 직업과 이름까지 단박에 맞추었으니 이게 귀신도 아니고 요로케 용한 족집게 점쟁이가 또 있을까마는, 그때는 민주화가 덜되었던 시절이고 민중미술화가이다 보니, 혹시 택시기사가 프락치가 아닌가 하여 놀랍고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평소 5년째 차에 가지고 다니던 이명복 화가의 작은 그림엽서《호수》를 보여주었다. 손님은 무척 놀라워하며 영문을 물었다.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가 내가 이명복이란 이름 석 자를 알게 된 계기는 '97년, 한겨레신문에 소개된, 민중미술 이명복 화가의 원서갤러리 초대전이었다. 아내와 함께 창덕궁 옆 원서갤러리를 찾았다. 멋진 그림을 한 점 구입할 요량으로 큰맘 먹고 현금 20만원을 들고 갔다. 전시장에 걸려있는 힘찬 근육질노동자의 모습, 사회성, 정치성 짙은 그림들을 통해 화가 이명복의 작가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한편 벽에 걸려있는 여러 작품들 중에 한눈에 확 들어오는 한 폭의 풍경화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치명적 아름다움의 감흥이 높은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호수》 lake 이명복 (1996년) 93×55cm

작은 풍경화 중에서도 사실(寫實)화다. 잔설(殘雪)이 있는 봄날에 시냇물이 호수로 흘러드는 호수 어귀를 그린 작품으로 햇볕이 많이 든 쪽부터 눈이 조금씩 녹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풀 한 포기, 나뭇가지 하나하나는 물론 돌무더기, 얼어붙은 얼음장 위에 고인 물에 비친 풀포기까지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표현했다.

대기 원근감과 화가의 예리한 관찰력에 말문이 막힌다. 우와~ 그야말로 사진 같다. 문제는 가격표, 2,000,000원, 어! 동그라미가 하나 더 붙어있네. 낮은 목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만약에 '로또복권'으로 치면, 일반 숫자는 다 맞추고 동그라미 하나 때문에 '꽝'인 것과 같은 상황, 여기는 '아차상'도 없으니 아쉬움은 커져만 갔다. 그림은 정말 좋은데, 허벌나게 좋은데..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렸다. 아쉬운 마음에 전시장을 나오면서 '호수' 그림엽서를 하나 품고 왔다. 

《호수》1996년 작
《호수》1996년 작

이윽고 목동 현대백화점 앞에 도착했다. MBC 부장 이명복이라고 되어있는 명함을 내밀었다. 어! 이제 그림 안 그리세요? 그래도 예술 활동은 계속한다고 귀띔, 조금은 생경했지만 차라리 능력있고 멋있게도 보였다.

그때 띠(따)르릉~ 아내한테서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어~ 택시야! 금방 내려.."

나의 고향 친구가 바로 옆 건물(행복한세상 백화점) 전략기획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더니 그럼 셋이서 꼭 술 한 잔 하자고 덧붙인다. 우리 이바구는 끝날 줄을 몰랐다. 아직도 서로 할 말이 많이 남아있어 10여분이 더 지나자 전화가 또 왔다. 택시 내리는데 20분이 걸렸으니, 아무래도 영국 기네스북 본부에 전화를 걸어 택시 하차에 20분, 기네스 기록 등재신청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이명복 화가를 '97년 원서갤러리에서 만난 이후 5년 만에 택시 안에서 다시 만났으니,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인가. 이쯤 되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 게 맞다. 귀하신 분과의 소중한 만남과 추억, 이 인연을 잘 가꾸고 간직해야겠다.

아티스트artist 이명복, 그 이름의 기억이 희미해져가는 듯하던 2015년 7월, 한겨레신문에 [짬] 제주저지문화예술인마을 '갤러리 노리' 이명복 "민중미술은 쇠퇴한 게 아니라 생활미술로 스며들어 있다"는 기사를 만나 무척 반가웠다.

바다 저편의 섬이라는 폐쇄감,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광과 민중들의 애환, 그리고 4.3의 질곡 등, 근현대사의 비극이 병존하는 제주,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1979년),《바람 타는 섬》(1989년)등으로 대변되는 역사의 무대에 화가로서 닻을 내렸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고 하면 너무 속된 비유가 될까?

"대학생 때, 전두환 등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 등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82년 대학 졸업 후부터 미술을 통해서 역사문제 발언을 하고자 했다.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도려내야 한다. 미술이 이웃과 같이 가야 한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정치, 주변 이야기, 어려움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담아낼 수 있고, 기층 민중의 삶과 이를 억압하는 권력, 물질에 저항도 할 수 있는 것이 미술이다. 현실에 나타나는 모순 등 현상을 그림을 통해서 세상에 알리고 사회에 고발해야 한다. 그것이 현실주의 미술이라고 생각한다." /이명복 화가

《그날 이후》1983년 작
《그날 이후》1983년 작

"화인(畵人) 이명복의 리얼리즘은 외세에 시달리는 민족에 대한 염려로 시작된 듯하다. 역사의 사실들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는 상황을 목격하는 것은 하나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래서 안다는 것에는 늘 고뇌가 따르고, 급기야 역사의 모순을 바로잡으려고 실천행동을 하는 것이다. 예술로 역사의 모순에 다가서려고 할 때 바로 리얼리즘 정신과 연결된다.

이명복의 리얼리즘은 그의 예술이념으로 취한 사실정신(寫實精神)과 상통한다. 그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땅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 땅이야말로 바로 역사의 현장이었고, 결국 땅의 주인은 그곳의 민중이라는 사실을 그는 산하 기행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명복의 '사실정신'은 땅과 사람, 그리고 그것의 매듭인 역사라는 틀에서 이루어졌으며, 그것은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명복의 미학으로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김유정/미술평론가

나는 문예사조(ism), 예술운동의 낭만주의나 인상파, 순수예술, 유미(탐미)주의, 아방가르드, 다다이즘, 모더니즘을 잘은 모르지만, 나에게 '민중'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민중미술 판화가 이철수, 청계천 버들다리 위의 전태일 동상 제작자 임옥상 작가,《아! 대한민국》,《'92 장마 종로에서》 민중가요를 발표한 가수 정태춘 •박은옥이 오버랩 된다.

민중미술, 전위 예술가 이명복 화가는 미술을 통해서 사회참여와 역사문제의 발언을 하고자 했다. '80년 초, 주둔군이 때로는 점령군으로 비쳐지는 주한미군 '주둔군 지위 협정(SOFA)'의 비대칭, 그들의 기지촌, 이태원, 평택, 동두천 등의 한국 여자, 미군들의 이야기, '슬픔의 땅' 연작 3~40점, 대작 '백산', '회상'과 '96년 동학농민전쟁 시리즈, 민중미술 15년 전, 5.18 광주민중항쟁 20주년 기념전 등에 발표하고 참여했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절에도 정치적 현실에 안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역사를 정면으로 관통했다. '80년대 미술 평론가들에 의해 생겨났다는 '민중미술'이라는 개념도 '70년대 실천신학으로 생겨난 민중신학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운동도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이명복 화가에게서 '민중'을 빼고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유미주의의 이명복 화가였다면 아마도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을 운명이지 싶다.

《백산》1993년 작
《백산》1993년 작

'언뜻 지나쳤던 풍경 이명복 '갈림길-대산리'

"대개의 풍경화가 대상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사상을 통해 대상을 파악하고 있어도 현실로부터 만나게 되는 주위의 풍광을 왜곡시키는데 비해 이명복의 풍광은 그곳의 정확한 실사를 드러낸다. 이 실사의 강조는 이 작가의 장점으로 그림 속에 숨을 불어넣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언뜻 지나쳤던, 그러나 기억의 한쪽구석에 확실히 남아 있는 그 편린을 끄집어내게 하고 그로부터 가물거리는 감상을 불러오게 한다. 풍경화라는 고전적인 형식의 장르를 사용하면서 이토록 새롭게 해석해 낼 수 있는 작가의 관찰력과 대상을 해석하는 힘은 그가 사실주의 회화에 대한 강한 집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리라.

풍경화가 그 진부한 형식이 이명복에게 오면서 이렇게 다른 모양을 갖추고 내용의 진지함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은 그림쟁이가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새로운 해석력이야말로 예술가의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갈림길에 서서 화가의 마음을 읽는다. 이섭/미술평론가

《긴 겨울》2018년 작
《긴 겨울》2018년 작

'93년《금강》 신동엽 시인의 고향 부여 곰나루 터를 다녀와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의 땅' 이야기를 그렸다고 하는 이명복 화가에게 앞으로 계획을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날 이후》1983년 227×182cm 작품이 이명복 이름을 알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2010년 제주에 정착했다. 제주에 사는 동안 슬픔의 땅 제주의 4.3 관련 인물 또는 사람들을 그릴 생각이다."

이명복 화가는 거세당한 제주의 역사, 이에 대한 깊은 성찰과 진지한 애정을 바탕으로 미술을 통해 역사를 재조명함으로써 우리의 굴절된 역사를 사회에 알리고 있다. 이것이 미술의 역할이고 예술의 힘이기도 하다고 믿고 있고 그렇게 엄중한 시대의 요청에 호응했다.

나는 예술가들의 창작(크리에이티브)의 고통을 잘 알 수는 없지만 일종의 프로파간다 이명복 화가의 어깨가 늘 무겁겠다는 걸 알 것만 같다.

예술이 이웃과 함께하고자 때로는 생활미술로 수렴되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영역을 넓혀온 아티스트 이명복 화가, 그의 작업실(아틀리에) 제주 <갤러리 노리> (대표 김은중 • 아내), 마당쇠 이명복, 오픈을 뒤늦게 축하드리며 응원한다. 얼마 전에 이명복 화가님이 도록(圖錄)을 3권씩이나 택배로 보내주셨다. 크리스마스에 큰 선물을 받았다. (나는 산타클로스가 제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ㅎ) 고맙습니다!

《긴 겨울》2020년 작
《긴 겨울》2020년 작

요즘 체인점, 가맹점이 유행이던데,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주 '갤러리 노리' 서울 분점 '움직이는 택시 갤러리 노리' 어떨까?

미술을 사랑하시는 독자, 시민 여러분! 아니, 깨어있는 민주시민, 해외동포 여러분! 갤러리 방문도 마이(많이) 해주시고 싸(사)랑해 주십시오. 아~ 참, 그《호수》그림은 개인 소장으로 알고 있는데 나의 우편엽서 《호수》그림은 소형 액자에 넣어서 내 책상위에 소장(세워 놓고)하고 있답니다. ㅎㅎ

《해녀삼촌》1 2021년 작
《해녀삼촌》1 2021년 작

혹시 제주도 여행가시는 길에 갤러리 한 번 들르시고요, 이명복 화가님한테 소개받고 왔다고 저의 이름 대시면 아메리카노 커피는 덤.. ㅎ

《광란의 기억》2018년 작
《광란의 기억》2018년 작

이명복 화가를 만난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이강윤 주주통신원  kangyun858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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