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영 탄생 100주년을 기리며

올해는 김수영 탄생 100주년 되는 기념해이다. 올 한 해 동안 학술대회, 연극, 전시회, 기념관 건립, 시낭송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렸다. 『한겨레』에선 100주년을 기념해 『거대한 100년, 김수영』을 기획 연재하기도 했다.

시인 김수영(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시인 김수영(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김수영은 20년이 넘는 작품 생활 동안 170편이 넘는 시와 평론을 합치면 2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푸른 하늘은」(1960) 「사랑의 변주곡」(1967), 「거대한 뿌리」(1964), 「어느 날 고궁을 나서면서」(1965), 「풀」(1968), 「시여 침을 뱉어라」(1968)도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 많다. 처녀작인 「공자의 생활난」(1946)이나 「달나라의 장난」(1953)처럼 읽기가 난해한 작품도 많다.

「공자의 생활난」의 경우, 김상환 교수(서울대 철학)처럼 김수영을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기호철학의 관점으로 공자를 해석하기도 한다. 문예비평가 늘샘은 해방 직후 도덕규범이 해체돼 가던 혼란한 시기에 ‘공자’를 거론한 것은 당대 불우한 지식인의 상징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높은 이상을 펼쳐보지 못한 채, 식민지시기를 살아 낸 ‘불우한 지식인’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역사적 실체로서 <공자>를 불러들인 게 아니라 그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라는 도덕규범이 해체돼 가던 당대 현실과 해방 직후 혼란기 ‘불우한 지식인’으로서 자신을 빗대어 ‘공자’라는 시어를 썼다는 해석이다. 다시 말해 언어가 곧 ‘실체’라는 전통적인 관점으로 보지 않고 ‘공자’라는 시어는 가치가 실종된 해방 직후 혼란기 지식인의 삶의 ‘형태’를 기호화한 것일 뿐이라는 해석이다. 매우 의미 있는 관점이라 생각한다. 김수영의 시 정신이 유교의 선비정신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해석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문예비평가 늘샘의 해석은 현대 기호학의 선구자인 소쉬르의 언어 기호는 형태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학설에 근거한다. 언어가 곧 실재하는 실체로 인식돼 온 실재론과 달리 언어는 곧 기호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명론에 근거한 때문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근대 과학의 출현을 가져온 경험론은 유명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처음 김수영을 만난 것은 대학 2학년이던 1980년 늦가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1980년 3-4월 서울의 봄과 5월 광주민중항쟁이 무참히 짓밟히고 억지로 맞은 2학기 캠퍼스 풍경은 스산하다 못해 황량했다. 아니, 서 있는 나무들이 절망감으로 빼곡히 다가와 내 가슴에 박혔다. 뻥 뚫린 가슴엔 스산한 바람만 스며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허한 마음을 나누고 위로 받을 겸 야학운동을 같이 하던 친구의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잤다. 새벽녘 그 친구가 틀어놓은 라디오 시낭송에 눈을 살며시 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D단조 음악을 배경으로 김수영의 시, 「거미」(1954)가 흘러나왔다.

잠결에 듣는 시낭송이었지만 김수영의 「거미」는 1980년의 절망을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김수영 스스로 한국전쟁 기간 의용군으로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풀려난 지 2년이 돼가던 시절에 발표한 작품이라 시인의 내면을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 「거미」(1954) 전문

가난 속에서 영미문학을 번역하고 살아가던 김수영에게 시는 탈출구이자 해방구였다. 일제강점기 말기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떠났을 때 장남인 시인에게 부친이 거는 기대는 무척 컸던 것 같다. 가족의 대들보였던 아버지는 병환이 깊었고 1948년 부고를 접했을 때 장남으로서 기대와 어긋난 길을 걸었던 시인은 차마 아버지의 사진을 마주하질 못했다. 1949년 작 「아버지의 사진」은 바로 그 시인의 졸인 가슴을 느끼게 해 주는 시다. 8남매 장남으로서 시인이 느꼈던 삶의 무게와 죄의식 아닌 죄의식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비참은 일찍이 있었던 것/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에는/안경이 걸려 있고/내가 떳떳이 내다 볼 수 없는 현실처럼/그의 눈은 깊이 파지어서/(...중략...)/나의 飢餓처럼 그는 서서 나를 보고/나는 모오든 사람을 또한/나의 妻를 피하여/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것이요/(...중략...)/오오 나는 그의 얼굴을 따라/왜 이리 조바심하는 것이오/조바심도 습관이 되고/그의 얼굴도 습관이 되며/(중략)/나는 모든 사람을 피하여/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버릇이 있소.” - 「아버지의 사진」(1949) 중에서

실제로 시인은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일본 유학 시절 연극에 심취했고 1944년 해방 직전 만주 길림성에서 연극무대에 오르거나 영미문학에 심취했다. 귀국 후 1946년 연세대 전신인 연희대학 영문과 4학년으로 편입했다. 그 때 나이가 25살이었다. 따라서 27살에 가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아버지의 뜻과 달리 1949년 박인환 등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시집을 냈다. 그리고 1년 뒤 1950년 29살, 우리나라 나이로 서른 살에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 한 달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는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다. 1950년 8월 김수영은 인민군 의용군으로 징집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혼란기를 보냈다.

김수영은 영어를 뛰어나게 잘했다. 식민지 언어인 일본어와 영어에 능숙했고 우리말이 오히려 어색하게 여겨졌다. 글을 쓸 때는 우리말 사전을 여러 번 뒤적거릴 정도였다고 한다. 미8군 통역관 경험과 영어잡지를 낡은 코트에 지니고 다닐 정도로 영어에 능숙했던 시인은 가난 속에서도 영미문학 잡지를 탐독했고 니체나 하이데거 철학에 심취했다. 하이데거 전집을 통해 하이데거의 생각에 공감하며 낡은 책장이 닳을 정도로 애독했다고 한다. 시인의 작품 가운데 난해한 시어들 가운데엔 실존주의 철학에 심취했던 시인의 면모를 충분히 가늠하게 한다.

시인은 1955년 가족과 함께 성북동에 거주할 땐 평화신문사에 6개월 간 다닌 것 이외엔 주로 번역 일에 몰두했다. 라디오 소음에 시달리던 예민한 성격의 시인은 마지막 거주지였던 마포구 구수동으로 이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육체노동을 시작했다. 시장에서 사온 병아리 11마리가 750마리로 늘어나 닭을 기르는 양계업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꼼꼼한 성격에 양계관련 서적을 탐독하면서 손수 양계장을 짓고 닭을 길렀다.

시인으로서 김수영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 극적인 장면은 시인에게 불행이 닥친 날 일화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사고 당일 시인 김수영은 번역한 원고를 들고 신구문화사를 찾았던 날이다. 그날 밤 소설가 이병주를 만났고 이병주와 대화를 나누던 중 이병주의 뺨을 후려 갈겼다. 당대 문인들의 비도덕적인 삶에 구토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병주는 이태의 『남부군』을 표절한 인물이자 5공 당시 전두환 전기를 썼던 인물이다. 이병주의 제안을 거부하고 귀가하던 시인은 집 근처 인도로 뛰어든 버스에 치어 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이튿날 47세로 운명했다.

60년대 김수영과 함께 윤동주의 성찰적인 시 세계와 저항정신을 계승했던 신동엽은 김수영의 부고 소식에 이렇게 탄식했다.

“어두운 시대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 서양의 일개 대통령의 죽음보다 5천만 배나 더 가슴 아픈 민족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2020년 12월에 출간된 문예비평가 늘샘 김상천의 <네거리의 예술가들> 책 표지 (출처 : 사실과 가치) 한국문학사 서술의 문제점을 인물 중심으로 새롭게 비평한 책으로 이 책에서 글쓴이 늘샘은 기존 <한국문학사>가 반공주의 시각에 갇혀 ‘국뽕’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음을 준열히 비판했다. 시인 김수영의 경우도 <모더니스트>를 넘어서서 <모럴리스트>로 규정하고 있다.
2020년 12월에 출간된 문예비평가 늘샘 김상천의 <네거리의 예술가들> 책 표지 (출처 : 사실과 가치) 한국문학사 서술의 문제점을 인물 중심으로 새롭게 비평한 책으로 이 책에서 글쓴이 늘샘은 기존 <한국문학사>가 반공주의 시각에 갇혀 ‘국뽕’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음을 준열히 비판했다. 시인 김수영의 경우도 <모더니스트>를 넘어서서 <모럴리스트>로 규정하고 있다.

김수영!

그는 냉전이라는 외적 변인과 분단이라는 내적 모순 속에서 극우파시즘으로 치닫던 시절, 시대의 본질과 변화를 꿰뚫었던 당대 선각적 지식인이었다. 나아가 이승만-박정희 반공독재로 민족정기가 뒤틀리고 불의가 횡행했던 시절, 타락한 사회에 타협하지 않고 고절할 정도로 가난을 천형으로 받아들였던 ‘모럴리스트’였다. 그런 점에서 자유를 노래한 모더니즘 혁명시인으로 시인 김수영을 좁게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1956년 작 「구름의 파수병」에 그런 대목이 나온다.

“詩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자기의 裸體를 더듬어 보고/살펴 볼 수 없는 詩人처럼/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중략)/나는 지금 山頂에 있다/시를 반역한 죄로/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 「구름의 파수병」(1956) 중에서

오히려 해방 후 반민특위가 좌절되고 가치가 극도로 혼란한 시기! 김수영은 여느 문인들처럼 권력의 주변에서, 또는 문단권력의 중심에서 위선을 떨진 않았다. 그는 불의한 시대, 불우한 문인으로서 양심을 팔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시인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지를 시작(詩作)활동을 통해 끝없이 고뇌하고 자신을 성찰하며 삶과 문학을 일치시켰던 문인이었다. 그의 60년대 작품이 1970년대와 80년대 참여문학, 민중시의 서막을 열어젖힌 것이나 70년대 민음사에서 「오늘의 시인총서」 첫 번째로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1974)를 출간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1981년 「김수영 문학상」이 제정되었고 2013년 「김수영 문학관」을 개관하였다. 올해엔 모교 연세대에 「김수영 기념관」이 들어선다고 한다. 2021년 타계한 지 53년이 지난 오늘날, 김수영은 여전히 더욱 돋보이고 빛난다. 김수영 탄생 100주년, 우리가 시인을 한국문학사의 자랑스러운 보물로 생각하는 이유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