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한겨레>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다.  

“한국 최초의 영화관 ‘애관극장’ 사라지면 안되잖아요”

내 생애 처음 갔던 극장이 인천 애관극장이다. 애관극장에서 <쿼바디스>를 상영했다. 이상하게 엄마는 어린 나만 데리고 <쿼바디스>를 보러갔다.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는 것을 그 영화를 보고 알았다. 인천 숭의동에 살아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장안극장'이 있었지만... 장안극장은 재개봉 극장이고 애관극장은 개봉극장이라서 애관극장에 가는 것은 늘 나의 로망이었다. 

그런데 애관극장이 한국 최초의 극장인 건 몰랐다. 아무 생각없이 영화만 보러 가지 않았나 싶다. '애관극장' 하면 가장 생각나는 것은 '금지'란 단어를 깨고 혼난 일이다.  

우리 시대는 '금지’가 참 많았다.  ‘금지곡’에서 시작해서  ‘외출금지’, ‘통행금지’, ‘이성교제 금지’, ‘롤라장 출입금지’, ‘빵집 출입금지’, ‘고고장 출입금지’, ‘서클활동 금지’, ‘영화관람 금지’까지.... 영화관람 금지라면 성인영화를 말하겠지...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나는 인천 선인학원에 속하는 인화여자중학교를 다녔다. 선인학원은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백선엽과 육사 출신 백인엽 두 전직 장군이 설립했다. 선인학원은 1994년 사학비리로 모두 인천 시에 몰수되었지만 그 당시는 사립중고교 10개 이상을 가진 큰 사학재단이었다. 백선엽의 ‘선’자와 백인엽의 ‘인’자를 따서 선인학원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선화여중은 백선엽 관리, 인화여중은 백인엽이 관리 하에 있었을까? 두 전직 장군이 만든 학교답게 모든 규율은 강압식 통제였고 ‘안 돼!!'와 ‘해!!’ 두 명령어로 움직이는 학교였다.

두 사람 가운데 백인엽이 더 악랄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는 학교를 군대로 알았다. 선생들에게 예비군 군복을 입혀 순찰을 돌게 했다. 학생들이 보고 있는데도 선생님 정강이를 군화발로 까는 분으로 삭막한 공포 분위기를 거침없이 몸소 보여주셨다. 방학이면 선생님들이 똥지게를 지고 화장실 대변을 푸셨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선생님들이 그렇게 깨지는데 그 하위계급인 학생들도 쩍하면 벌서고 매 맞는 일이 다반사였다.

인화여중은 뺑뺑이 배정 이전에는 인천에서 제일 수준이 낮은 소위 '똥통학교'였다. 백인엽 이사장은 학생들 학력을 높히는것만이 똥통학교의 굴레를 벗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한 학년에 한 반씩 전교 60등 안에 드는 학생들을 뽑아 특수반을 만들었다(특수반은 중3 때 폐지). 매일 아침마다 한 과목씩 시험을 보게 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계속 이어지는 시험의 홍수에 빠져 하루도 긴장을 풀 수 없는 학교생활이계속되었다. 

중 3-1학기 기말고사 끝난 어느 토요일...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매일 아침 시험도 없다. 당분간 시험이 없다는 홀가분함에 친한 친구들과 교실에 모여 이런 저런 수다를 떨다 영화 한편 보러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애관극장에 그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란 영화가 들어왔는데 명화 중의 명화 아니겠냐~~ 중학생 관람가다~~ 하면서 서로 바람을 넣었다.

진짜 소설은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동을 잊지 못해 여름방학 동안 2권으로 된 쑥색 양장본을 구해서 보았지만, 영화를 보기 전 내용을 짧게 봐둔 터라 '레트 버틀러'와 '스카렛 오하라'를 만나고 싶었다. 레트 버틀러를 많이 좋아했다. 나는 사춘기 시절 현실과 허구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실제 가수나 배우 등을 좋아하질 못하고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에 빠지지 않았나 싶다.

그런 좋은 영화도 단체관람이 아닌 친구들과 가는 개별 관람은 금지사항인지라 좀 께름했지만 과감히 가기로 결정했다. 토요일인데 선생님들도 그동안 우릴 감독 하시느라 고생하셨으니 퇴근해서 쉬실 거야. 설마 토요일 단속을 하실까 이런 이야길 주고받으며 결행했다.

1972년 탁경란 대표 부친 탁상덕 사장이 애관극장 인수 당시의 모습.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사진 출처 / [ESC] 인천엔 125년 된 ‘시네마 천국’과 토토가 있었네 https://www.hani.co.kr/arti/PRINT/969620.html)
1972년 탁경란 대표 부친 탁상덕 사장이 애관극장 인수 당시의 모습.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사진 출처 / [ESC] 인천엔 125년 된 ‘시네마 천국’과 토토가 있었네 https://www.hani.co.kr/arti/PRINT/969620.html)

영화는 말 할 것도 없이 좋았다. 영화를 보고 친구들과 즐겁게 웃으면서 극장 문을 걸어 나오는데... 아~~~~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학생부 선생님이 극장 층계 아래 딱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우리가 나오길 기다린 듯 말이다. 눈이 딱 마추쳤기에 뭐 도망치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너희들 4명 월요일에 교무실로 와!!!!”

심장이 철렁했다. 그 학생부 선생님은 수학선생님이었는데 한번 걸리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가늘고 휘어지는 버드나무가지 같은 매로 찰싹찰싹 매질을 하는 선생님이었다. 청보랏빛 얇은 입술을 거의 벌리지 않고 말씀하셔서 선생님 말씀을 들으려면 바짝 벌을 서고 있듯이 긴장해야 했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학생부 선생님인데... 아이고.. 이를 어쩐단 말이냐.

2차로 가자했던 신포동 튀김집이 다 무어냐. 모두 걱정을 한 가득 안고 헤어졌다. 기가 팍 죽어 집에 갔더니 엄마는 연락도 없이 집에 늦게 왔다고 몹시 꾸중을 하셨다. 알고 보니 늘 집과 학교밖에 모르는 범생이가 토요일 늦게까지 집에 안 오니 너무 걱정이 되어 학교에 전화를 하셨단다. 이에 탁~ 낌새를 친 선생님께서 귀신같이 감을 잡고는 극장 정문 앞에서 우릴 기다리신 것이다. 안하던 짓을 하니 탈이 나지. 그런데 선생님들은 토요일 오후인데 왜 퇴근도 안하고 늦게까지 학교에 계셨을까?

월요일 우리 4명은 겁을 잔뜩 먹고 교무실에 갔다. 우선 30분 동안 무릎 꿇고 손 들고 벌 서는 것은 기본, 무릎 꿇고 고개를 푹 숙인 상태에서 그 야들야들한 매로 등짝을 수차례 후려 맞고, 지나다니시는 선생님들께 머리 몇 번 콩 쥐어 박히고, 일주일 동안 교무실 바닥 청소하라는 생각보다 무척 가벼운 벌을 받고 풀려났다. 다행히 뺨은 한 대도 맞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엄마의 전화로 발각되었음은 친구들에게 고백했다. 친구들에게 “너 때문이구나“하는 구박을 수차례 받기도 했지만. 나중에 두고두고 웃고 떠들 이야기 거리가 하나 생긴 셈이다.

범생이들이 사고를 쳐서 그랬는지 학교에서는 며칠 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단체관람을 허용했다. 명화라도 개인적으로 보는 학생에게는 벌을 주고, 학교에서 관람 허락이 떨어져야 볼 수 있는 자율부재의 시절, 금지문화의 생활화였다. 그 때 단체에 하도 질려서일까? 그런지 지금도 여럿이 어디 우~~ 몰려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나홀로형이다. 금지의 부작용이라고나 할까?

왜 그렇게 금지란 단어는 온 학창시절를 도배했을까?

선생님들은 그런 금지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했다. “니들이 나쁜 데로 빠질까봐 금지한다” 좋게 해석하자면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나쁘게 보면 우리를 믿지 못해서 그러셨겠지. 즉 불신은 금지란 단어 뒤에 숨어있는 개념이니까.

요새 학생들에게 우리 시대 그런 ‘금지’를 남발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기에... 시대를 거꾸로 살 수는 없는 것이기에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겠지만...

지난 설에 20대 조카를 만났는데 문정부가 금지하는 것이 많다고 했다. 외국에서는 허용하는 사이트도 이 정부는 금지했다고 했다. 어떤 사이트를 금지했냐고 물었더니 딱히 답하지 못했다. 혹시 ‘야한 사이트’냐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금지를 무기로 휘두르지 않는다는 걸 믿기에 뭐라고 이야기를 이어갈지 난감했다. 뭘 그런 걸 갖고 그러냐고... 우리 시대는 이런 것도 금지했다고.. '라때는 말이야' 라고 하면 꼰대라고 여긴다던데... 그럴 수도 없고... 

편집 : 김미경 편집장 

김미경 편집장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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