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으로 계곡을 끼고 절을 향해 올라갔다. 金井洞天! 오랜만에 찾은 범어사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이 절을 처음 찾은 것이 올해로 꼭 71년 전이다.

한국전쟁(6.25) 때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중학생 때 이곳으로 소풍을 왔다.

당시에는 서면에서 전동차를 타고 동래 온천장역에서 내려 걸어왔다.

그땐 이곳이 허허벌판이었는데, 지금 와보니 절 바로 밑까지 아파트가 꽉 들어섰고, 차가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다.

범어사(梵魚寺)는 금정산(金井山) 자락에 있는 대찰로 신라 문무왕 18년(678)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사찰(華嚴寺刹) 중의 하나다.

신라 흥덕왕 때 중건, 의상대사와 그밖에 원효. 표운. 낙안. 영원. 매화. 묘전 스님 등 수많은 고승이 배출된 명찰이다.

일본 강점기 때는 오성월 스님이 경허. 용성 스님을 모시고 수행 정진하면서 금강암. 내원암. 안양암. 원효암 등 암자를 세우시고, 금강선원. 청풍당선원을 개설하시어 선찰(禪刹) 대본산(大本山)으로서의 위상을 세워 호국 사찰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수행도량으로서 수많은 도인들을 배출하였다.

특히 1950년대 때 동산(河東山, 1890-1965) 스님은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하였고, 한국 근대불교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선불교의 사상적 맥락을 뚜렷이 하였다.

올해 2022년엔 범어사가 금정총림(金井總林)으로 지정, 지유(知有) 스님을 초대 방장으로 추대하였다.

조계문
조계문
천왕문
천왕문

일주문 격인 조계문(曹溪門)을 들어서 천왕문을 지나 불이문(不二門)에 들어서니 "神光不昧萬古輝猷,入此門內莫存知解"(신광불매만고휘유, 입차문내막존지해)라고 쓴 주련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불이문 주련
불이문 주련

신령스러운 빛은 어둡지 않아 오랫동안 빛나니, 이 문에 들어올 때는 안다는 생각을 가지지 말라는 뜻이다. 속세의 '알음알이'를 버리라는 말이다. 이 주련은 하동산 스님의 친필이라고 한다.

불이문을 지나 보제루(普濟樓)로 들어서니 세 줄 석축 계단 위로 대웅전(大雄殿)이 보인다.

대웅전
대웅전

잠시 숨을 돌려 고개를 뒤로하니 보제루 뒷면에 '金剛戒壇'이란 현판이 보인다. 금강과 같이 보배로운 계, 즉 '金剛寶戒'(금강보계)란 뜻으로 이곳에서 수계(受戒) 행사나 법회를 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조심스럽게 우측 계단으로 오르니 부처님께서 "어서 오너라!" 하시면서 빙그레 웃으신다.

얼마 전에 주지 취임식이 있었는지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진산식'이라 쓴 플래카드가 그대로 걸려 있다.

대웅전
대웅전

법당은 전면 3칸, 옆면 3칸인데, 앞면 네 기둥에 다음과 같은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摩诃大法王
無短亦無長
本來非皂白
隨處現靑黃

크고 크신 법왕이시여!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음이로다.
본래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지만,
곳에 따라 푸르게 누르게 나타나도다!

중국 남송 때 스님이신 야보선사(冶父道川,1127-1180)의 게송(偈頌)이다. 선사의 속성은 적(狄)이며, 이름은 삼(三)이다. 이 게송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나온다. 또한 선사는 이 책에서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다. 땅을 떠나서 일어나는 법은 없다"(因地而倒者, 因地而起, 離地求起, 無有是處也)라고 하셨다.

그 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1158-1210) 스님이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첫머리에 선포하듯이 이 글귀를 적어 당시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의 키워드로 삼으셨다.

여기 '정혜결사'(定慧結社)란 수행에 있어서 '禪定'과 '知慧'를 서로 다른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본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선불교 부흥을 위한 결사운동을 말한다.

이러한 운동이 일어난 동기는 첫째, 당시에 극히 세속화되고 미신화된 '기복불교', '우상불교'에서 현실적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하고 구세제중(救世濟衆)하는 '정법불교'(正法佛敎)의 복귀운동에 있었으며, 둘째, 명리(名利)로 도구화된 '형식불교', '가면불교'에서 진실한 출세간의 길을 밟아 성불도생(成佛道生)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수행불교'의 재건 운동, 그리고 퇴폐하여 변질 되어버린 '궁중불교' '관권불교'에서 참신하고 생명력 있는 '민간불교', '대중불교'로서의 부흥에 있었다.

야보선사의 주련 글씨를 통해 지눌 보조국사의 '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을 떠올리며 옆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넓적하고 묵직한 바위가 누워 있는데, 그 위에 '朴乃貞 以萊伯來 崇禎再壬寅'라고 쓴 글씨가 뚜렷하게 보였다.

바위 위에 쓴 글씨 : 朴乃貞 以萊伯來 崇禎再壬寅
바위 위에 쓴 글씨 : 朴乃貞 以萊伯來 崇禎再壬寅

여기 '朴乃貞'은 현종5년(1664)에서 영조11년(1735)에 살았던 사람이며, '萊伯'은 우두머리란 뜻으로 동래부사를 말한다. 그 다음 '崇禎再壬寅'이란 '숭정 기원 뒤 두 번째 되는 임인년'이란 뜻이다.

여기 '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즉위년인 1628년에서부터 멸망한 1644년 연간의 연호이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후금(後金) 즉 후일의 청(淸)이 명(明)나라를 물리치고 중국의 주인이 된 뒤에도 '오랑캐의 나라'라 하며 청나라를 부정하고 여전히 한족의 명나라를 정통 중화왕조로 인식하였다.

명나라의 정통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청나라 황제들의 연호를 기록하는 대신에 명나라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崇禎再壬寅'은 1722년으로서 조선 경종 2년(景宗 二年)이며, 청나라 황제 성조 61년(聖祖 六十一年)이 되는 해이다.

이 석각(石刻) 글씨를 통해 "1722년에 동래 부사 박내정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발걸음을 祖師殿(조사전)으로 옮겼다. 조사전이란 선종사찰에서 그 종파를 연 조사(祖師)를 봉안한 일종의 사당으로 일명 '祖師堂'(조사당)이라고도한다.

역시 전면 3칸으로 네 개의 기둥에 다음과 같은 주련이 걸려 있었다.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窮坐實際中道牀
舊來不動名爲佛

법의 성품(法性)은 원만하고 융통성(圓絨)이 있어서 두 모양(無二相)이 없으니,
모든 법(諸法)은 움직임 없이(不動) 본래부터 고요한 것이다(本來寂).
마침내(窮) 진제(眞際; 깨달음의 경지, 참모습)와 속제(俗際; 미혹의 현실, 헛된 모습)의 두 극단을 여읜 중도(中道), 곧 바른 진리(正道)의 자리(牀)에 앉게 된다.
이로써 예부터 변함없이(不動) 일컬어 '부처'(佛; 깨달음, 또는 깨달은 사람)라 하였다.

이 주련 내용은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法性偈>(법성게)에 나오는 것으로서 앞의 두 연은 앞부분, 뒤의 두 연은 뒷부분에 나온다.

이는 생멸천류(生滅遷流)의 망상(妄想)을 끊고 진성(眞性)으로 들어가 마침내 궁달한 '진리의 고향', 즉 별다른 세계가 아닌 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오늘 나는 범어사에 와서 야보, 의상 두 분 선사를 알현했고, 또 야보선사를 통해 지눌 보조국사를 뵈었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에 찾아와 옛 어른들을 만나 뵌 그런 기분이었다.

차를 서둘러 부산역으로 몰았다. 오후 7시 40분, KTX에 몸을 실었다.

깜박 잠이 들었다. 꿈에 야보선사가 나타나시어 다음의 게송을 읊어 주셨다.

山堂靜夜坐無言
寂寂寥寥本自然
何事西風東林野
一聲寒雁淚長天

조용한 밤 산당에 말없이 앉고 보니,
고요하고 쓸쓸함이 본래 자연이었네.
무슨 일로 서녘 바람 잠든 숲을 깨우고,
기러기 하늘에서 끼룩~ 끼룩~ 우는고!

기러기 소리에 잠이 깨었다. 한데, 야보선사는 어디로 가시고 여객(旅客; 곧 중생)들만 웅성댄다. 서둘러 총총히 출구를 향해 나왔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선다."

집에 오는 동안 야보선사의 이 게송이 자꾸만 맴돌았다.

2022. 9. 2. 새벽

김포 여안당에서 취석 한송이 부산 제자 모임(27~28) '맥회'(脈會)에 참석하고, 그 이튿날 금정산 범어사를 찾아 야보, 의상 두 선사를 뵙고 이 글을 쓰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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