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 , 러시아 원동 연해주

지난 5월 34년간 몸담았던 첫 직장을 졸업하고 이번 9월에 방송대 학생으로 복학하였습니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라는 과목을 공부하고 있는데 느낀 점이 많아 내용을 복기하고 잠시 같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해외 항일운동의 중심지 : 러시아 원동 연해주>

​​- 중국 간도와 함께 해외 항일운동의 중심지

 

1.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

- 러시아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우리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된 계기는 1860년 제정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베이징조약

- 1863년 한인 열 세 가구가 연해주 남부 연안의 포시예트 지역에 정착한 것이 첫 이주

- 주로 산악지대였던 함경도의 농민들은 부족한 토지 때문에 언제나 가난에 시달려 왔으며 조선 정부의 전통적인 서북지방 차별도 한 요인

- 1869년의 대흉년과 그로 인한 대이주

- 곳곳에 한인마을 형성. ‘고려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선조.

- 한인 사이에도 이주한 시기와 입적 여부에 따라 계층이 분화됨. 원호와 여호.

 

2. 국내 진공작전을 펼친 연해주의병

- 1904~1905년 러일전쟁. 정치 망명자의 증가.

- 1907년 국내 의병전쟁

- 1908년 5월 동의회 결성. 최재형 총장, 이범윤 부총장, 이위종 회장, 안중근 평의원

- 1908년 연해주의병 조직. 전재익 도영장, 안중근 우영장

- 1908년 7월 홍의동전투와 신아산전투에서 승리. 영산에서 패배

-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안중근 : 의병이 수행한 독립전쟁의 한 과정 혹은 결과 천명

- 1910년 6월 13도의군 편성. 유인석 도총재, 이범윤 창의군과 이남기 장의군으로 편제. 이상설, 홍범도, 이진룡, 이갑 참여

 

3.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

-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 창립. 최재형 회장, 홍범도 부회장

- 한인사회를 위한 경제주의 단체를 표방

- 각자 일하여 재력을 만들고 상당한 준비를 하여 일조 기회가 도래하면 일거에 한국의 독립을 회복할 것

- 1912년 4월 22일 권업신문 창간

- 신한촌에 있던 한인학교인 계동학교를 한민학교로 확대 개편

- 1914년 독립군을 주축으로 대한광복군정부. 이상설 정통령.

- 1914년 9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러시아는 일본과 동맹국이 되어 한인의 정치 사회활동 탄압. 권업회 해체.

 

4. 10월 혁명과 원동 연해주의 한인들

- 1917년 2월혁명시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대회.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 문창범 의장. 김철훈 부의장. 오창환 서기. 이동휘 선전부장. 김립 참모.

- 1918년 5월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창립. 이동휘 위원장. 오바실리 부위원장. 유동열 군사부장. 김립 선전부장. 당 기관지 <자유종>. 문덕중학교 설립.

- 한인사회당 적위군. 제국주의 간섭군에 맞서 싸운 최초의 조직적 투쟁.

- 국내 3.1운동 후 독립선언서 발표와 대규모 시위운동

- 1919년 4월에 성립된 상하이 임시정부와의 통합 협의. 통합 임시정부. 이동휘 국무총리. 문창범 교통총장에 선임.

- 1919년 11월 이동휘 국무총리 취임. 문창범 거부하고 1920년 2월 대한국민의회 복설.

러시아 한인사회는 임정 참여 문제로 양분.

- 1920년 4월 4일 일본군의 급습. 연해주 ‘4월 참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54명 체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한인 76명 체포.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 처형.

- 대한국민의회 아무르주로 이동. 각지로 흩어져서 빨치산 부대, 적군과 연계하여 무장투쟁 준비.

- 1922년 10월 25일 적군은 블라디보스토크 점령으로 5년간에 걸친 내전에 종지부.

 

5. 1920~1930년대 연해주 한인사회와 1937년 강제이주

- 콜호즈 조직. 한인 지도자들은 당과 소비에트의 주요 직위에서 사회주의 사회 건설 지도.

- 1923년 3월 1일 한글 신문 <선봉> 발행. 이후 카자흐스탄에서 <레닌기치>. 소련 해체 이후 <고려일보>

- 1923년 조선 사회주의운동 전체 관장 최고 기관 ‘코민테른 고려총국(코르뷰로)’ 이후 ‘고려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오르그뷰로)는 조선 내지에 공산당을 조직하는 임무.

- 1927년 국제혁명자후원회(모플)

- 1931년 원동고려사범대학. 한인이 세운 최초의 대학.

- 1937년 후반기부터 모든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라는 모스크바 명령.

- 1937년 9월 초순부터 약 두 달 사이에 약 17만 2,000명의 한인들이 수천 km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수송 도중 많은 수의 사람이 병으로, 사고로 사망.

 

6. 선조의 흔적을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를 걷다

* 개척리

- 1874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 군항 건설과 함께 한인들이 정착하여 개척한 마을

- 자치기구<한민회> 운영하면서 공동체 생활 영위

- 민족학교인 계동학교, 항일 언론기관인 해조신문사, 대동공보사

- 1911년 봄 러시아 당국이 한인들을 블라디보스토크시 외곽으로 이주시킴

* 신한촌

- 1911년 봄 새로운 집단 거주지역

- 1937년 강제이주 이전까지 연해주 한인의 사회,문화적 중심지

- 1999년 3.1운동 80주년 신한촌 기념비 세워짐

* 원동고려사범대학

- 1931년 블라디보스토크 오케얀스키 대로 18번지에 설립

- 1937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전. 현재는 시비르 은행이 영업 중.

- 1938년 폐교 후 크즐오르다국립사범대학으로 변경

* 구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

- 1916년 블라디보스토크 오케얀스키 대로 7번지에 세워진 2층 석조 건물

현재는 연해주 지방법원으로 사용

 

 돌이켜보면 1904년 러일전쟁으로 대한제국내 일본군 주둔에서부터 1905년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 1907년 고종 강제 퇴위 및 대한제국군 해산, 1909년 사법권, 교도행정권에 이어 1910년 경찰권 위탁 이후 한일병합조약으로 일제 강점기 이후 1945년 국권을 회복하기까지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던 연해주에서 있었던 우리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만감이 교차합니다.

 현대는 민족보다 국가가 우선임을 1985년 군(KATUSA)시절 절감하였고, 1927년생 선친께서는 일제 강제동원으로 수풍발전소 노역의 고초를 겪은 바 있습니다. 현대에도 나라 없는(잃은) 민족 쿠르드족, 집시, 티베트족, 몽족, 묘족, 아메리카 원주민 등을 생각하면서 2022년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을 돌아봅니다.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미군기지. 남과 북으로 분단된 민족, 동서로 갈린 지역주의. 갈수록 더해가는 빈부격차,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다방면에서 교육이 감당해야 할 몫을 역사적 교훈으로 되새겨봅니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박종운 주주  tsm1234@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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