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외출을 하려 해도 챙길게 많다. 혹시 잊고 가면 큰일이라도 날까봐 점검하고 또 한다. 나이가 들면서 더 그렇다. 하물며 중요사업을 할 경우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래서 나이에 따라 살라하는가 보다.

어느 날 휴대폰을 깜박 잊고 외출했다. 집을 나설 때는 전혀 몰랐으나 돌아가기 어중간한 지점에서 알았다. 어찌하나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한 번 가보지 뭐’ 하고 휴대폰 없이 갔다. 휴대폰 없이 보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다. 처음에는 다소 불안했지만 온 종일도 아니고 겨우 몇 시간일 테니 괜찮을 거라 위로하면서 갔다. 현대생활에서 휴대폰은 필수품이 되었다. 휴대폰은 이미 몸과 일체가 돼버렸기에 잠시라도 몸에서 떨어지면 수족이 없어진 것처럼 허전하다고 할까?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졌다. 애초 쌀 한가마 지고 가는듯한 중압감이었다면 점차 한말 두말 부리고 간 느낌으로 바뀌어 갔다. 한참 후에는 오히려 홀가분하고 몸과 맘이 가벼웠다. 휴대폰 하나 없어지니 이렇게 편할 수가 있을까. 그렇다면 내 주변 그 많은 것들을 잊고 산다면, 아니 아예 없애고 산다면 어떨까? 막상 그렇게 실천은 어렵겠지만 줄여 나갈 수는 있지 않을까? 일단 몸과 가까운 주변에서 하나 둘 줄이고 없애면 좋겠다. 마음과 생각도 줄이고 없애면 삶이 그만큼 가뿐해지지 않겠는가? 사는데 기본의식주를 빼고 또 필수가 있을까? 세상을 무겁게 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 그에게는 해당치 않으리라. 하지만 가볍게 살고 싶다면 고려해볼만 하다.

가볍게 살기 위해선 무엇부터 해야 할까. 내가 귀중히 여기는 것부터 버려야 하지 않을까? 그럼 귀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경험과 소유가 아닐까? 그래서 우선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과거를 기록한 핵심을 없앴다. 소유도 하나씩 정리해야겠다. 하지만 생각대로 될지 의문스럽다. 사실 육십이 되고나서 내 이름 김태평을 버리고 싶었다. 김태평을 떠나 살고 싶었다. 김태평이란 이름에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담겼기 때문이다. 지난 삶을 후회해서가 아니다. 이전의 나를 부정하지 않고는 새날을 열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태평은 내 이름이지만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버리고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틀을 벗어나 살기 위해 노력한다. 지금까지의 김태평이 아닌 김태평으로 말이다. 될까 모르겠다. 톨스토이는 82세인 1810년 10월에 가출했다. 예전부터 생각을 쭉 해왔겠지만 늦은 가출이었다. 가출한지 열흘만인 11월 7일 객사했다. 그분에 비하면 아직 이르지만 내겐 그럴 용기도 없다. 졸장부 좀팽이라서 그런가?

가장 홀가분하고 편할 때가 언제였던가를 생각해 본다. 목욕탕이다. 대중탕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온탕에 들어가 있을 때다. 탕조 가장자리를 베개 삼아 누운 상태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으면 몸과 맘, 정신까지도 없어진다. 이게 해탈인가? 몸이 가벼워지니 자유롭고 해방된 느낌이랄까. 어찌나 평온하고 가뿐한지 이게 천상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입욕 전에 화장실에서 뱃속까지 비웠다면 더욱 그러리라. 따뜻한 탕조에 몸을 누이고 세상만사에 대한 모든 마음과 생각까지 던져 버리면 정말 좋다. 지극선사가 되고 신인이 된듯하다.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비우고

손발을 비우고

주머니를 비우면

욕망이 비워지고

몸속까지 비우면

천상천하를 유영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비로소 나는

나의 주인이 되었다

 

구름이 과거에 연연하던가

바람이 지난날을 후회하던가

강물이 실개천을 그리워하던가

버려라 잊어라 가거라

그래야 참다운 네가 되리라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기에 따라 세상은 다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기에 따라 세상은 다르다. 어떻게 살 것인가?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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