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정체성을 찾아서~

‘나는 누구인가‘ 다소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막연한 이런 질문을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에게 한 번 쯤은 해봤을 것이다. 동서고금 수많은 성현들도 이런 질문에 빠져서 많은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작금에 이르도록 아무도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고 앞으로도 시원한 답을 내기란 어려울 것이다.

십여 년 전에 방송에서 본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중학생들이 교육에 들어왔는데 젊은 스님이 학생들에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주제로 ‘나를 알아야 한다.'는 부연설명을 하고 학생들 각자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스님이 한 여중생에게 “너는 누구냐”하고 질문을 하니 여중생이 얼떨결에 “저요? 저는 김미정 인데요.”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스님이 “아니,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말고 네가 누구냔 말이다”하고 되물으니 여학생이 당황하여 머뭇거리다가 “그럼 스님은 누구세요?”하고 대뜸 반문을 하였다. 이번에는 스님이 순간 멈칫하더니 “나? 나는 나지”하고 대답하였다. 여학생은 “예에?”하며 눈을 똥그랗게 뜨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를 가르치는 스님도 사실은 ‘나‘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춘기 학창시절에 세상과 사물에 대한 지각이 왕성히 발달하면서 자기의 정체성 혼란을 표현하는 어귀로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말이 한 때 유행하기도 했다. 지금도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때 농담조로 쓰이곤 한다.

성경의 주요인물 모세가 광야를 헤매다가 어느 날 떨기나무가 불타며 “모세야 모세야, 내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 하거라.” 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주는 누구시오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대답이 하늘에서 들렸다. 즉 ‘야훼‘라는 신의 이름을 처음 얻었는데 역시 신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모호한 답변이었다.

그러므로 하물며 피조물이라는 인간이 자기를 안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 근원을 모르는 채 살다가 죽어야 하는 불완전한 개체일까? 우리 인간이 자기를 안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해도 이런저런 관찰을 통해 어렴풋하게는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의 그림자를 스스로 찍어 보았다 / 필자사진
필자의 그림자를 스스로 찍어 보았다 / 필자사진

사람이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거울을 보면서 자기의 얼굴을 인식하듯이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을 바라보며 그 환경에 투영된 자기의 존재를 발견할 수는 있다. 즉 가족 이웃 사회 국가 세계 우주를 바라보며 각각의 집단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어른들께 처음 인사할 때 “ㅇㅇ김씨 ㅇㅇ공파 15대손 김길동 입니다”로 자기를 소개하였다. 자신이 속해 있는 집안에서의 자기 위치가 자기를 설명하는 기준이었다. 마찬가지로 나를 둘러싼 이웃은 어떤 이웃이며 그 속에서 나는 상대적으로 어떤 존재인가? 젊은이인가, 지식인인가, 지도자인가 등등의 존재 위치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회 국가 세계로 나의 주변을 확장해서 나를 바라보면 각각의 범주에서 나의 존재와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내가 속해 있는 사회 국가 세계를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런 주변 환경을 정확히 인식해야 또한 그 환경 속의 나를 확실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국사와 세계사를 배운다. 역사를 배움으로써 내가 어떤 나라의 국민이며 나는 이 나라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자연스레 나의 역할도 찾게 된다.

여기에서 또한 어떤 역사를 배우느냐에 따라 국가와 세계를 인식하는 방향이 달라지고 사람의 가치관과 지향점이 달라진다. 자본주의적 시각으로 서술된 역사를 접하면 무산자(無産者)라도 자본주의 가치관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편향되지 않은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접해야 실존적인 인간의 흐름을 이해하게 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역사를 잘못 배운다면 인생의 출발선이 비틀어져 시간이 갈수록 현실과 동떨어진 곳으로 멀어져서 나중에는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부류들이 오늘날 극우수구집단, 태극기 부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모른다.

구한말 혼란한 정세 속에서 대부분의 민중은 오로지 생존에 몰입해 있었으나 소수의 선각자들은 분화 되었다.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이주하여 험난한 독립운동의 대열을 이룬 우국지사들, 약삭빠르게 국제정세를 간파하고 강자 일본제국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꾀한 매국노들로 분열되어 지금까지 백년전쟁을 치르고 있다.

구한말 이완용은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주미대리대사를 3년간 하는 등 대한제국의 엘리트였다. 그는 미국 물을 먹은 친미파로서 일본을 미워하며 을미사변 후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시키는(아관파천) 등 충성을 다 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국제정세가 일본으로 기우는 것은 간파하고 조선을 팔아 일신의 부귀영달을 누리는 쪽으로 돌변하여 흑심을 품었다. 을사조약 오적 중의 수괴로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조선을 일본제국에게 바치겠다고 충성맹약을 하였다. 그 대가로 총리대신까지 오른 이완용은 1910년에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에게 헌상하였다. 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피살되었고, 1909년 12월22일 이완용은 청년 이재명(李在明)에게 피습 당했으나 가까스로 살아났다.

요즘 정진석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이 “조선은 안에서 썩어서 망했다.”며 국민들의 가슴에 염장 지르는 말을 당당히 내뱉더니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공부를 하라”고 오히려 국민들을 가르치듯 큰소리치고 있다. 조상을 저리도 당차게 나무라는 정진석은 대체 어느 나라 국민인가? 일본은 제국주의 조상들의 만행과 죄상을 덮으며 사죄도 하지 않는데 왜 정진석은 스스로 조상을 모욕하면서 자해하는가? 

무궁화나무에 벚꽃이 피는 형국이라고 할까? 36년간의 일제 치하에 접목된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백년간 기득권이 되어 여당의 대표로서 큰소리치며 역사를 들먹이는 사태는 참으로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동대문 쪽 서울성곽길. 고향의 길처럼 포근한 조상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 필자사진
동대문 쪽 서울성곽길. 고향의 길처럼 포근한 조상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 필자사진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1919년 4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백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대한민국 백년의 역사를 자세히 배울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래야 대한민국 국민의 올바른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가에 바르게 헌신하게 될 것이다. 지난 독재정권들은 자기들의 치부를 감추려고 애써 근현대사 교육을 등한시 했다. 이런 누적된 결과가 근본 없이 정체성 혼란을 야기하고 국민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역사의 이면에는 또 다른 진실이 숨어있다. 세계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제국(로마, 몽고, 미국 등)의 역사는 승리와 영광의 찬사로 그려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끝없는 약소국 침략의 살육과 횡포가 숨어있는 것이다. 20세기 미국이 남미와 동남아(베트남)에서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구실로 약소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쿠데타를 획책하고 직접 전쟁을 일으켰던 흑역사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니, 남의 나라가 공산주의를 하든지 자본주의를 하든지 미국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공연한 구실로 약소국을 미국의 위성국가로 주렁주렁 매달고 싶은 흑심이었으리라. 그래서 21세기 초입에 강대국의 논리가 배제된 역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발가벗은 세계사’ 등등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관점이 대중들의 호응을 얻고 있기도 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신채호 선열의 일갈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자기 나라의 역사도 알지 못하면서 어찌 그 나라의 국민이라고 할 것인가. 그것은 미래 없는 나라의 암흑 속에 눈을 감고 날아다니는 부나비와 같은 존재들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나는 어떤 국민인가. 지금 바로 ‘한국 근현대사‘를 펼쳐 읽어보자.

동대문 쪽 서울성곽에서 바라본 북한산 전경. 늠름하게 서울을 감싸고 있다 / 필자사진
동대문 쪽 서울성곽에서 바라본 북한산 전경. 늠름하게 서울을 감싸고 있다 / 필자사진

 

편집 : 조형식 객원편집위원 , 김미경 편집장 

조형식 객원편집위원  july2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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