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딸이 이런 말을 물었다.

딸 : 엄마, 우리를 어떻게 키웠어요?

나 : 응, 어려서는 좀 엄격하게... 사춘기부터는 좀 너그럽게 키운 것 같아. 어려서 엄마가 매도 들었잖아? 지금 그렇게 하면 큰일 나겠지만...

딸 : 나... 언제 처음 맞았어요?

나 : 세 살 때

딸 : 엄마, 세 살이 뭐 잘못한 게 있다고 매를 들었어요?

나 : 그니까... 엄마가 잘못했지. 할 수 없이 들었어. 너한텐 정말 미안해 . 

지금 생각해도 정말 가슴 아프다. 사실 세 살짜리는 때릴 곳도 없다. 그래도 매를 들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딸이 그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딸이 세 살 때 3년 전 시집간 시누이가 잠시 우리 집에 살러 들어왔다. 아파트를 분양받아 중도금 등을 내야 하는데, 지금 사는 집 전세금을 빼야 한다고 해서 우리 집으로 들어오라 했다. 시누이 시집가기 전 혼자 쓰던 방에서 시누이 남편과 세 살 조카 희야까지 셋이 살게 되었다. 화장실도 하나고 집도 크지 않아 불편한데 자칫하면 의가 날 수도 있는 생활이라 매사가 조심스러웠다.

나는 직장을 다닐 때라 세 살된 큰아이를 이웃 아주머니에게 맡겼다. 아침이면 아주머니가 데리러 오고 저녁이면 내가 데리러 갔다. 시누이가 이사 오고 석 달쯤 되었는데 큰아이를 봐주겠다고 했다. 그동안 동갑내기 희야와 아주 잘 지냈기에 함께 봐도 된다고 했다. 희야는 눈물이 많고 마음씨가 아주 고운 아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에 아주머니가 딸을 데리러 오시면 희야는 엄마랑 있는데 자신은 아주머니네 가야 하는 것에 심술을 내고 버틸 때라 고맙게 생각하고 딸을 시누이에게 맡겼다.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아이는 잘 지냈다. 늘 하하 호호 웃으며 놀았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했는데 시누이가 너무 속상하다면서 희야의 어깨를 보여주었다. 깨문 자국이 있었다. 딸이 문 것이다. 딸을 방으로 데리고 가서 물었다. 딸은 세 살임에도 자기주장이 강한 형이라서 윽박지르면 더 말을 안 듣기에 살살 달래가며 물었다. 뭔가 자기 맘대로 안 되니 확~~ 문 것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꾸중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약속하고 넘어갔다. 딸은 샘이 많고 지기 싫어하는 아이다. 낮에 엄마 없는 결핍과 불만이 그렇게 나오지 않았나 싶어 마음이 쓰렸다.

그다음에 또 희야 팔을 물었다. 그때도 호되게 야단만 치고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희야 코를 물었다. 시누이가 시누이 남편에게 숨겨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누이가 화가 나서 희야 아빠가 한 번만 더 깨물면 이사를 하자고 했다고 했다. 더 이상 야단만 쳐서는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방으로 들어가서 세게 매를 들었다. 매란 것이 무엇인지 처음 겪었으니...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딸은 충격을 받아 밥도 못 먹고 울다가 잠이 들었다. 기가 많이 죽은 듯했다.

이후로 딸은 희야를 물지 않았다. 시누이 남편도 그냥 넘어가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빠 집에 얹혀 사는데....자칫하면 아이들 때문에 가족 간 서로 안 보고 살 뻔했기에 할 수 없이 딸을 호되게 잡은 것이다. 

다행히 시누이네는 무사히 10개월을 채우고 이사갔고, 우리 가족과 지금까지 아주 잘 지낸다. 시누이는 딸이 초등학교 1.2학년 방학 때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돌봐주었다. 지금도 아주 예뻐한다. 딸이 그때 이야기를 듣더니 “엄마가 그럴 수 밖에 없었네” 하고 이해해주었다. 

그다음 다섯 살 때 또 매를 들었다. 딸이 달랑거리며 마루를 뛰어다녔는데 반바지 주머니에서 동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처음엔 무심히 지나쳤는데 생전 딸에게 용돈을 주지 않던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물어보았다.

나 : 주머니에 있는 게 뭐니?

딸 : 응, 엄마 이거 돈이다?

나 : 무슨 돈?

딸 : 응. 삼촌 방에 가면 동전이 많아. 그래서 내가 가졌어.

나 : 삼촌 허락은 받았니? 허락을 안 받았으면 네 돈이 아닌데..

딸 : 내 돈은 아니지만... 삼촌 돈이잖아 

딸아이는 유아원에 다녔는데 저녁이 되면 1층 아주머니께서 데리고 와 내가 퇴근할 때까지 봐주셨다. 우리는 3층에 살았는데 그 집 초등학교 2학년 언니와 둘이 삼촌 방에 들어가 허락 없이 돈을 솔솔 가져다 과자를 여러 번 사 먹었다.

그 당시 나는 도벽 아동을 상담하고 있었다. 유아기에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사소하게 생각하고 넘어간 작은 행위들이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는 회복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는 것을 보아온 터라 딸이 그런 행동을 했을 때 굉장히 민감해졌다.

손바닥을 때리는 것은 물론이고 삼촌 앞에서 무릎 꿇고 잘못을 빌라고 했다. 삼촌은 웃으면서 ‘괜찮아. 다음엔 그러지 마라’고 했지만 나는 눈을 찡끗거리면서 호되게 꾸중해달라고 부탁했다. 딸은 꺽꺽 울면서 그 꾸중을 다 받았다. 남의 돈뿐만이 아니라 식구들 돈도 허락 없이 가지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아주 따끔하게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날도 딸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먹은 저녁을 다 토했다. 자면서 계속 놀라 몇 번을 깨서 흐느끼며 울었다. 그 후 그때 일을 잊은 듯했지만 친척 어른께서 돈이라도 주시면 질색하고 안 받으려 손을 뒤로 뺐다. 그래도 계속 주시면 나를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내가 “‘고맙습니다’하고 받아야지”라고 허락하면 그때 마지못해 받아 바로 나에게 쓱 건네주었다. 세뱃돈을 받으면 챙기지도 않고 여기저기 봉투째 두기도 했다.

돈이 가진 달콤한 속성을 알 나이가 되면서 그런 행동은 점점 사라졌지만 지금도 어디서 용돈이 생기면 자기 방 책상 위나 화장대 위에 그냥 둔다. 누가 집어 간 줄도 모른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딸이 그때 얻은 공포심으로 돈에 지나치게 무관심한 것은 아닌가, 나의 경험을 절대적이라고 확신하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를 몰아쳤구나 하는 생각에 늘 미안했다.

고등학교 때 딸. 그때도 겁이 없었다. 지금처럼... 
고등학교 때 딸. 그때도 겁이 없었다. 지금처럼... 

지금도 어떤 교육이 제대로 된 교육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첫째를 너무 엄격하게 키운 게 미안해서 둘째는 좀 너그럽게 대했다. 어른 눈높이의 지나친 꾸중, 단지 아이일 뿐인데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따른 엄격함 등 젊어서 나는 냉정하고 확고한 나만의 원칙에 집착했다. 그것이 강퍅함을 불렀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나의 원칙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강퍅함이 지속되었다면 아이들은 엄마를 멀리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았기에 나를 죽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친구 같은 부모가 되기 위한 전략으로...

육십이 넘은 지금, 나는 아이들 말을 대부분 믿고 잘 따른다. 여행 가서도 내 의견보다는 아이들 의견을 우선한다. 가끔 ‘어... 이건 아닌데...’ 생각이 들어도 겉으로 티 내지 않는다. 그로 인한 실수나 불편도 그냥 군말 없이 감수한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지적하지 않는다. 다 좋다고... 다 잘했다고 격려한다. 오히려 가끔 아이들이 엄마를 위한답시고 지적도 하고 구박도 한다. 속이 쓰릴 때도 있지만, 그 구박도 되도록 웃으며 받으려 노력한다. 이 또한 부모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게 하려는 전략으로... 

그런데 얼마 전 딸이 이런 말로 나를 위로해주었다.

“엄마 어려서는 엄격히 교육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주위에서 보면요, 예의 없고 자기 위주인 아이들보다 남을 배려하는 아이들이 더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아이들이더라고요. 나도 아이 낳으면 그렇게 키울 거여요”

 

편집 : 김미경 편집장 

김미경 편집장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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