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내가 여기서 계속 농사짓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난 다른 학교에 다녀보고 싶어.”

8년 전, 변산공동체학교에 다니던 열여섯 살 다향이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네가 싫다는 걸 왜 내가 강요해.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말해줄 수 있니?”

여기 고등부는 중등부랑 별 차이가 없어. 계속 이 학교에 남아있으면 똥 멍청이가 될 것 같아. 난 멍청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공부해보고 싶어.”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재촉하지 않고 15년을 기다렸더니 제 스스로 공부를 하겠다고 했으니까요. 농사는 싫으니까 공동체를 벗어나서 제 스스로 먹고 살 일이 걱정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물었지요. “그럼 검정고시를 준비해서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할래? 아니면 다른 대안학교에 다녀볼래?” 다른 대안학교에 다녀보고 싶다고 해서 대부분의 대안학교가 가입된 사이트를 알려주고 선택하게 했습니다.

몇날며칠동안 사이트를 살피던 다향이가 길 위의 인문학을 지향한다는 로드스꼴라를 선택했고,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변산공동체에서 차와 커피수업을 하면서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던 문제들을 많이 접했기 때문입니다. 성장기아이들에게 과도한 노동과 균형 잡히지 않은 식사가 제공되었습니다. 사람 사는 곳이면 문제가 있기 마련인데 그럴 때마다 일반학교처럼 쉬쉬하고 숨기기에 바빴지요.

로드스꼴라에 다니는 아이들을 지켜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시간에 소화할 수 없는 양의 책을 주고, 에세이를 요구해서 늘 수면부족에 시달렸습니다. 학생들이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고, 각성제를 복용하는가 하면 디스크가 생겨서 고생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몇몇 학부모들과 항의를 했습니다.

애들이 케이지 안의 닭들도 아닌데 어떻게 하루의 대부분을 책상에 앉혀놓을 수가 있어요? 최소한의 운동은 해야 되잖아요?” 대표교사가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대충 해도 되는데 이번 기수 애들이 욕심이 많고, 저희들끼리 경쟁이 붙어서 열심히 하는 걸 어떻게 해요?”

그런 측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사들의 조율 없이 과목별로 에세이를 요구하고(마치 한 과목밖에 없는 것처럼), 교사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끊임없이 피드백을 하면서 대충이라니. 이게 무슨 대안학교냐고, 최소한의 체육활동을 보장하라고 해서 만들어진 게 겨우 일주일에 한 시간의 요가시간이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아이의 행복을 바랐습니다. 분당에서 제주로 이사 간 다향이는 제주에서 홈스쿨링을 했습니다. 말이 홈스쿨링이지 하루에 동시 한 편 외우기, 그림 한 장 그리기,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 찍기, 피아노수업, 일주일에 한번 영화관 가기, 바다에서 놀기가 전부였습니다.

대안학교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몸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대안학교라고 해서 아이들의 행복을 우선시하고, 존중하며 배려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사회에서는 무()학력자 취급을 받아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해도 고등학교졸업장을 요구하는 게 현실이니까요.

스무 살을 전후로 다향이의 고민이 많아 보였습니다. 친구들은 검정고시를 거쳐서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진, 연극, 영화, 디자인 등 저마다의 꿈을 찾아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거나 아빠, 대안학교를 다닌 건 잘한 일이지만 그래도 초등학교까지는 일반학교에 다니는 게 나은 것 같아.”하는 말을 들을 때면 공연히 대안학교에 보냈나?’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너도 친구들처럼 공부를 더 해보는 게 어때?”하고 물어도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재작년에 다향이 친구 둘이 6개월 동안 배낭여행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물었습니다.

넌 왜 안가? 로드스꼴라 마치면 친구들이랑 두루두루 여행을 다니라고 제일 먼저 권한 게 아빤데.”해도 셋이 붙어 다니기엔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서합니다. 하지만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우리가 경제적여유가 없어서 그런가?’싶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원주에 머무는 2년 동안 우쿨렐레와 탁구·목공을 배웠고, 플리마켓에서 직접 구운 핀란드파이를 판매했습니다. 국수나무에서 반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원주에서 손꼽히는 파티셰로부터 혹독하게 일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다시 고양시로 돌아왔습니다. 하루의 대부분을 다향이가 방 안에서 지냈습니다. 무얼 하는지 궁금하기는 한데 선뜻 묻기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방문이 열리면서 아빠, 카페에 갔다 올게.”했지요. 처음엔 이 말이 궁금했습니다. “친구 만나러?”하면 아니, OO카페에 OO가 맛있대. 가서 먹어보려고.” 그런 날이면 꼭 한두 개 사와서 먹어보게 하고, 제 친구들은 물론 나와 주위사람들에게 맛 평가를 부탁하곤 했습니다.

이튿날엔 전날 먹은 걸 다향이가 그대로 만들어보았습니다. 물론 실패해서 다시 여러 번 만든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카페투어를 다니기 시작한 게 원주에서부터였으니까 꽤 오래된 일입니다. 그 일을 몇 년 하더니 자신은 베이커리로 승부를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큰맘을 먹고 작년에 스메그오븐을 장만해주었지요. 심심치 않게 맛있는 걸 얻어먹었지만 한편으로는 부담도 되었습니다.

이거랑, 이거랑 향은 어때? 맛이랑 식감은?”하고 물을 때 속 시원히 대답하면 좋을 텐데 어릴 때부터 훈련된 게 아니니까 곤혹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오래전부터 다향이랑 카페를 열기로 했습니다. 1회 제주커피축제위원장로서 로스팅과 핸드드립을 전문으로 하는 나의 커피와 다향이의 과자가 맛있고, 잘 어우러지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년 봄에는 시작하려고 하는데 다향이가 먼저 시험 삼아서 주문판매를 시작했습니다. 다향이가 두 달에 걸쳐서 쿠키랑 케이크를 만들고, 사진을 찍어서 디자인을 했습니다. 그걸 SNS에 올렸더니 반응이 좋습니다.

환갑을 맞아서 각기 다른 케이크를 세 개나 주문한 분도 있고, 결혼기념일을 맞아서 주문한 분도 있습니다. 일을 시작한지 두 달 밖에 안 됐는데 맛있다고 재주문하는 분들도 생겼습니다. 처음엔 도움을 주려고 주문한 분도 있겠지만 재주문은 맛있다는 것일 테니 고마운 일입니다. 이제 스스로 베이커리를 선택했으니 잘되기를 응원할 뿐입니다.

편집 : 오성근 객원편집위원

오성근 객원편집위원  babsangman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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