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형씨족보>의 1706년 이전 간행 개연성

1706년(숙종 임금 32년) 병술년 <진주형씨족보>(이하 병술보)는 2023년 기준 간행된 지 317년이 됐다. 2019년 가을, 전남 구례군 구례읍에 거주하는 형철우 종친을 찾아뵈었을 때, 그분이 대대로 소중하게 간직하여 온 병술보의 실물을 나는 처음 봤다. 형철우 종친과 그 조상님께 깊이깊이 감사드린다.

우선, 병술보 서문 1의 원문과 번역문을 제시한다.

1706년 병술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철우(전남 구례군 구례읍)
1706년 병술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철우(전남 구례군 구례읍)

 

1706년 병술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철우(전남 구례군 구례읍)
1706년 병술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철우(전남 구례군 구례읍)

<번역문>

형씨 족보 수정 서문

족보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계통, 즉 세계(世系)를 명확히 하고 종친 간에 관계를 돈독히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세계가 명확하면 효도하고 우애하는 바람이 구름이 피어나듯 일어나리라. 종친이 서로 정이 두텁고 화목한 기운이 흥하면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가 말끔해진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종친 간에 화목하게 함은 오로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계통을 책으로 만든 족보일 뿐이다. 사람에게 근본이 있는 것은 나무에 뿌리가 있는 것과 같고 물에 원천이 있는 것과 같다. 천백 세대가 넘어도 근본을 궁구하면 뿌리는 하나요 원천도 하나다. 나뭇가지가 천 개이고 물갈래가 만 개에 이르러서는 멀면 멀수록 서로 서먹서먹해짐으로써 중국 진나라의 메마른 땅을 보듯이, 즉 남의 어려운 일이나 근심 따위는 돌보지 않게 된다. 결국 ‘길거리의 남’이 되기에 정이 두텁고 화목한 정의(情誼)를 어찌 생각하겠는가. 온 세상이 큰물이 출렁이듯 함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인 족보를 빠뜨린 폐단이다.

우리 형씨는 진양(晉陽)에서 비롯되어 벼슬이 끊이지 않고 충효가 계속 나왔다. 씨족을 빛나게 하고 가문에는 좋은 일이니. 이는 한 가문의 표준을 이뤘도다. 운은 쇠하고 복은 박하고, 소수의 남은 자손이 흩어져 시골에 살았다. 대대로 전하여 온 영예를 보전하지 못하고 글자로 새겨 남긴 가풍을 추락시켰으니 선조의 영달을 이어서 회복할 가망이 커 보이지 않도다. 가르침을 받들고 효도하고 우애함은 만에 하나로써 오직 꾀할 일이다. 여러 자손이 어리석고 둔하여 내외의 무리가 상세하지 않고 원근의 각파가 서로 어울리지 못하면, 정다운 정의(情誼)가 무엇에서 생기겠는가? 친절하고 두터운 정은 무엇에서 연유하여 긴밀해지겠는가?

옛일을 생각하니, 지금 마음이 아프도다. 개탄스럽고 애석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아! 세상(世上)을 떠난 우리의 부형(父兄)들은 왕성하였도다. 이제 족보를 만든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온 종친을 아우르는 족보를 간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자손의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워서 지금까지도 나아감이 순조롭지 못했다.

세상살이는 번잡하고, 인심은 해마다 다르고 매월 변하고, 오륜을 지키는 분위기는 사라져가니, 구족(九族)은 화합하기가 어렵도다. 이것으로 미루어 거슬러 본다면 세대가 더욱 멀어지고 대수가 더욱 멀어진 후에는 세상에 끼친 교훈은 그 형세가 장차 보전하기 어려워지니, 전래한 가풍은 정말로 반드시 무너지리라.

훌륭하도다! 나의 사촌 큰형 형우용(邢尤庸)은 크게 개탄하고 마음 아파했다. 여러 종친과 더불어 앞장서서 부르짖고 족보로 만들어진 책을 수정·보완하자는 뜻을 논하여 통보하였다. 정성을 다해 꼼꼼하게 열심히 찾았다. 오직 족보의 방주에 의지하고 널리 물어 찾을 수밖에 없었다. 조상(祖上)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를 매기고 적자와 서자를 드러내어 족보를 편찬하였다. 각 지역의 여러 종친이 족보로 만든 책을 미처 받을 겨를도 없어 한다. 이는 아쉬움일 뿐이다. 안타깝도다.

이번에 편찬한 족보에서 파 나뉨을 자세히 살펴보면, 8촌 이내 친척은 정이 더욱 친밀해지고 8촌을 넘는 종친 사이에도 정의(情誼)가 더욱 도타워지리라. 어찌 한 문중의 큰 행운이 아니겠는가. 각자가 마땅히 가깝게 지내야 할 사람을 친히 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종친 간에 도탑게 하고, 친족끼리 화목하기를 한 집안에서 실천함이 우리나라에 퍼진다면, 자손을 위하여 분발할 도리는 참으로 바로 여기에 있으리라. 이와 같으니, 이 족보의 제작이 인간의 도리를 깨우치는 일에 어찌 보탬이 적다고 하겠는가. 오직 원하건대, 모든 종친은 각자 힘써야 하리.

숭정 기원후 두 번째 병술년(1706년) 여름 5월 을유일

후손 형언규(邢彦奎)는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

주: <진주형씨대동보>, 권지수(卷之首), 2003, 198-201쪽에 기록된 번역을 다듬고 편집함

병술보 서문의 필자는 두 분이다. 지은이는 형언규 선생과 형사범 선생이다. 족보상, 두 분은 팔촌이다. 오늘 살펴볼 서문의 지은이 형언규(1674.01.09.- ??.12.13.) 선생은 족보상 돌아가신 연도가 미상이나 조선조 19대 임금 현종(재위: 1659.6.28.(음5.9.)~1674.9.17.(음8.18.)) 말년에 태어나 숙종(재위: 1674. 9.22.(음8.23.) ~ 1720.7.12.(음6.8.)) 임금 연간을 사신 인물로 보인다.

서문의 원문 제14열(번역문, 다섯 번째 문단)에 1706년 족보 간행을 독려한 인물은 형우용 선생으로 나온다. 형우용은 형언규의 4촌 큰형이다.

원문 제6열(번역문, 두 번째 문단)에 ‘우리 형씨는 진양(晉陽)에서 비롯되어’라고 나온다. 진양은 진주의 옛 지명이다.

원문 제20열(번역문, 마지막 문단)은 서문을 쓴 연월일을 보여준다. 특기할 바는 우선 하오월(夏五月·여름철 5월)이다. 음력으로 4, 5, 6월은 여름이기에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 이 서문은 한여름에 지은 글이리라.

궁금증이 발동한다. ‘하오월’ 다음에 오는 두 글자는 ‘기유’인가 ‘을유’인가? 일단 ‘기유’로 보인다. 己와 乙을 흘려 쓰면 서로 비슷하게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서 1706년 5월을 찾아보니, 그 시기는 ‘숙종 32년 5월’이다. 5월 1일은 무오(戊午)일이다. 그 5월에 기유(己酉)일은 보이지 않으나 을유(乙酉)일은 보인다. 숙종 32년 5월 28일이 바로 을유일이다. 기유일은 5월이 아닌 6월 23일이다. 따라서 이 서문을 지은 날은 1706년 병술년 한여름 5월 28일 을유일이다. 그날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은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이방언(李邦彦)을 정언(正言)으로, 한배하(韓配夏)를 필선(弼善)으로, 권이진(權以鎭)을 정언으로, 이해조(李海朝)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이다.

형언규 선생의 병술보 서문을 번역하면서 내게 문제의식이 하나 생겼다. 1706년 이전에도 <진주형씨 족보>는 존재했을까? 그 존재의 개연성을 시사하는 대목은 서문에서 세 곳이다. 첫째, 서문을 지은 형언규 선생은 족보 서문의 제목을 ‘형씨 족보수정서’라 했다. ‘족보수정’은 그 이전에 나온 족보를 수정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둘째, 원문 제11열(번역문, 세 번째 문단)에 ‘이제 족보를 만든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라는 내용이 나온다. 셋째, 원문 제15열(번역문, 다섯 번째 문단)에 ‘오직 옛 족보의 방주에 의지하고 널리 물어 찾을 수밖에 없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대단히 아쉽게도 2023년 1월 현재, 1706년 이전에 간행됐을지도 모를 <진주형씨족보>의 실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105년 1월 10일

편집 :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f61255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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