敦睦之情(돈목지정·두텁고 화목한 정)

1808년 순조 임금 순조 8년(즉위년 1800년은 포함하지 아니함)의 경제상황을 알아보려고 <조선왕조실록>(sillok.history.go.kr)을 찾아봤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윤5월 25일: 비가 3촌(寸) 2분(分) 내렸으므로 기우제를 정지하고, 제관(祭官)에게 시상(施賞)하였다. / 음10월 29일: 수원부(水原府)와 영남(嶺南)·호남(湖南)에서 가장 기근이 심한 고을에 새 환미(還米)를 면(面)·리(里)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정퇴(停退)하게 하고, 호서(湖西)의 아산(牙山) 등 열 고을에는 새 환미 및 신역(身役)에 따른 미(米)·포(布)·전(錢)을 아울러 전부 정퇴하게 하였다. / 음10월 30일: 여러 도(道)와 여러 도(都)에 당년(當年)의 재결(災結) 2만 3천 3백 51결(結)을 지급했다

.환미는 환곡(還穀)의 쌀이다. 정퇴(停退)는 기한(期限)을 뒤로 물린다는 뜻이다. 재결(災結)은 가뭄, 홍수, 태풍 따위의 자연재해를 입은 논밭이다. 결(結)은 논밭 넓이의 단위다.

당시 임금은 1808년에 기근이 심한 고을이 많고, 자연재해를 입은 논밭이 상당히 많아서 조세 납부기한을 연기해야 했다. 이로 미뤄보건대, 1808년 <진주형씨족보>(이하, 무진보)의 간행 작업도 1763년 계미보의 간행처럼 힘든 경제상황인데도 이뤄졌다.

우선, 무진보 서문의 원문과 번역문을 제시한다.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번역문>

서문

족보에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세대의 계통을 기재하고 파(派)의 나뉨을 기록한다. 비록 백대까지 멀어져도 세대 계통과 파의 나뉨이 가히 상세하다면, 이번 족보의 간행이 어찌 훌륭한 사업이 아니겠는가. 슬프도다. 우리 형씨가 고려시대에는 잠영관면((簪纓冠冕), 즉 벼슬이 높아서 명성이 세상에 드러난 씨족이라 할 만하였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도 이름난 벼슬이 대를 이어 내려오고 연달아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이 연이었다. 이 시대의 말엽에 권세가 줄어들어 변변치 못한 형편을 바꾸지 못하니, 매우 한탄스럽도다.

우상공(右相公) 형방(邢昉)으로부터 3세 형공미(邢公美)에 이르러 비로소 진양군(晉陽君)으로 봉해졌다. 진양군은 참의공(參議公) 형문궤(邢文軌)를 두었고, 참의공은 예판공(禮判公) 형찬(邢贊)만을 두었다. 예판공은 비로소 남원 주포(현 전북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에 거주하였다.

예판공은 아들 네 명을 두었다. 첫째 형군자(邢君子)와 둘째 형군정(邢君正)은 자손이 자세하지 않다. 셋째 형군소(邢君紹)와 넷째 형군철(邢君哲)은 각각 서윤공(庶尹公)과 병사공(兵使公)이다.

서윤공부터 판서공 형규(邢珪; 조선 태종 때 호조판서)에 이르기까지 정랑공 형인기(邢仁奇; 조선 세종 때 좌찬성, 정랑공)만을 두었다. 즉, 형규와 형인기는 각각 외아들이었다. 정랑공은 아들 다섯을 두었다. 맏이는 사간공 형수(邢琇)이고 그 자손은 수원에 산다. 둘째는 현감공 형근(邢瑾)이고 그 자손은 남원 혹은 운봉에 산다. 셋째는 생원공 형박(邢玉尃)이고 그 자손은 거창 혹은 밀양에 산다. 넷째는 진사공 형균(邢玉勻)이고 그 자손은 전주에 산다. 다섯째는 생원공 형강(邢玉岡)이고, 그 자손은 역시 남원에 산다. 병사공은 아들 둘을 두었다. 맏이는 참판공 형경(邢慶; 호조참판)이고 그 자손은 능주에 산다. 둘째는 주부공(主簿公) 형희(邢希)이고 그 자손은 남평에 산다.

위와 같이 자손이 각 처로 흩어져 살아 그 수가 백배에 이르지는 않았을지라도 많아서 세대와 파의 나뉨을 구별하기가 가히 어렵도다. 이것은 선현이 말한 바인 ‘길거리의 남’이라는 탄식이다. 나의 선친 형종하(邢宗夏)께서 비로소 족보를 만든 손길이 지금도 새로운데 종이는 이미 닳아서 떨어졌도다.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족보를 고쳐서 간행하자는 의논을 제창하였다. 집안의 아우인 형유동(邢有東)에게 그 계획안을 주고 시작하는 임무를 맡기고, 종친인 형지달(邢之達)과 집안의 조카인 형국윤(邢國胤)에게 잘못을 바로잡아 고치도록 하였다. 멀고 가깝고, 친하고 덜 친한 관계가 선명하게 기재되었도다. (종친 간에) 두텁고 화목한 정이 널리 구름이 피어나듯 생겨나리라. 이는 어찌 한 문중의 행운이 아니리오.

나는 불초하기에 우둔함도 잊은 채, 돌아가신 아버지(형종하)께서 남긴 발자취를 추모하면서 족보를 만든 성대한 뜻을 대략 밝히노라.

숭정(명나라 임금, 재위 : 1628 – 1644) 기원후 세 번째

순조(재위 : 1800 –1834) 9년(즉위년 포함) 무진(1808년) 겨울에 후손 효동(孝東)은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

주: <진주형씨대동보>, 권지수(卷之首), 2003, 189-190쪽에 기록된 번역을 다듬고 편집함

 

서문을 지은 형효동(邢孝東·1742.06.09.~??.01.20.) 선생은 1763년 계미보 서문의 필자 형종하(邢宗夏) 선생의 아들이다.

원문 제15열(번역문, 다섯 번째 문단)에 “선현이 말한 바인 ‘길거리의 남’(路人)”이라고 나온다. 선현(先賢)은 중국 송나라 소순(蘇洵·1009~1066)을 말한다. 소순은 그의 두 아들 소식(蘇軾·소동파로 더 잘 불림), 소철(蘇轍)과 함께 삼소(三蘇))로 불린다. 삼소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해당한다. 소순은 소씨(蘇氏)의 “족보서”(族譜序·고문진보후집)에서 ‘길거리의 남’(塗人)을 5번이나 언급한다. 로인(路人)이나 도인(塗人)은 길거리의 남을 뜻한다.

원문 제18열과 제19열(번역문, 다섯 번째 문단)에 ‘敦睦之情 庶可油然而生矣(돈목지정 서가유연이생의·두텁고 화목한 정이 널리 구름이 피어나듯 생겨나리라.’라는 표현은 소씨(蘇氏)의 “족보서”에 나온 내용을 원용한 바로 보인다. 그 원문은 ‘孝悌之心 可以油然而生矣(효제지심 가이유연이생의·효도하고 우애하려는 마음이 구름이 피어나듯 생겨나리라)이다. 효제와 돈목은 종친 간에, 더 나아가서 인간관계에 중요한 덕목이리라.

대한민국 105년 1월 26일

편집 :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f61255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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