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공 후손, 나주 남평과 화순 능주에 살다

2023년 현재 진주형씨의 양대산맥은 판서공파와 병사공파다. 1706년 병술보와 1763년 계미보는 판서공파 중심으로 구성됐다. 병술보의 서문을 지은 형사범 선생은 글을 마무리하면서 전남 화순 능주와 경남 밀양에 사는 종친을 족보에 싣지 못한 점을 매우 아쉬워하고 모든 종친을 아우른 족보가 간행되기를 염원했다. 그 염원은 드디어 1808년 <진주형씨족보>(이하, 무진보)의 간행으로 이뤄졌다. 이는 판서공파 형효동 선생과 병사공파 형택규 선생이 무진보 서문을 각각 지은 사실에서 간단히 확인된다.

나의 7대조 형택윤(邢宅閏) 선생의 6촌인 형택규 선생이 무진보의 두 번째 서문에서 병사공파의 내력에 대해서 상당히 상세하게 밝혔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무진보 서문의 원문과 번역문을 제시한다.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번역문>

서문

무릇 족보를 통해 그 크나큰 원천의 파(派)가 나뉨을 상세히 알고, 또한 백대에 걸친 매우 친밀한 정을 더 돈독히 할 수 있다. 내가 일찍이 중국 송나라 소순(蘇洵·자는 명윤(明允)·호는 노천(老泉)·1009-1066)의 글을 살펴보건대, 족보를 보면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이 구름이 피어나듯 생겨나리라. 족보가 소중한 까닭은 이러한 마음이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리라. 만약 그렇다면, 그런 까닭에 이 족보를 창성(創成), 즉 새롭게 만듦이 어찌 경사스럽지 않겠는가?

대체로 보아 우상공(右相公·형방(邢昉)·숭록대부문하시중평장사·서윤공 형군소와 병사공 형군철의 5대조부) 이후 진양(晉陽, 현 진주)을 본관으로 삼은 까닭은 선조(형공미(邢公美)·서윤공과 병사공의 증조부)가 진양군(晉陽君)으로 봉해졌음을 믿어서이다. 아! 우상공 이후 2대(형승서, 형공미)에 걸쳐 계통을 명확히 하여 우리 가문은 이어져 왔다. 그러나 오래되어서 세대가 헝클어지고 멀어지고, 글자 획은 이미 희미하도다. 연호와 직명을 상세히 알아보기 어렵다.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아아! 우리 선조는 대대로 진양에 살았으나, 그 터와 묘소를 전쟁 통에 모두 잃었다.

예판공(형찬·서윤공과 병사공의 부·부인은 남평 문씨)에 이르러 공이 대방군 양천룡(梁天龍·고려 공양왕 때 문하시중)의 사위인 판서 문간(文侃)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하여 남원 주포(현 전북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에서 비로소 살기 시작했다.

양반이고 세상에 이름이 난 대단한 문벌이라서 가히 당대의 현족(顯族)이라 할 만하다. 서윤공(형군소·평양 서윤)과 병사공(형군철·충청 병사)에 이르러 비로소 두 파로 나뉜 이후 당시에 문물이 눈부실 만큼 빛났다고 글을 지어도 좋겠다. 아! 기쁘도다. 우리의 병사공은 이미 문무가 뛰어나서 이름난 관리였고 참판공(형경·호조참판· 병사공의 아들) 형제(형경, 형희)는 남평에서 대대로 살았다. 관직과 작위가 이처럼 잇닿아 이어지니, 어찌 조상님이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보고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우리의 7대조 참봉공(도곡공 형세영·경릉참봉·증호조참판)이 능주(현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아내미길 37번지 종갓집)에서 비로소 살기 시작했다. 자손이 장차 천만년까지 쭉쭉 이어지리라.

대체로 우리는 모두 같은 조상에게서 태어나서 비록 각 파로 나뉘어왔더라도 아직 합하여 족보를 만들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도다. 지금 잔꾀를 부리지 않고 여러 종친이 조상이 생전에 지어 놓은 글을 모아서 비로소 족보 발간의 계획을 수립하고 세대와 분파를 명확하게 수록하니, 비록 세월이 흘러 백대가 멀어져도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이 널리 일어나리라. 이 족보의 발간이 어찌 장하게 여겨지지 않겠는가?

나는 문장이 서툴러서 감히 선조가 남긴 업적을 삼가 지을 수 없기에, 족보를 다듬어 만드는 그 성대한 뜻을 간략하게 펼쳐 보였을 뿐이다.

숭정(명나라 임금, 재위 : 1628 - 1644)후 세 번째

순조(재위 : 1800 -1834) 즉위 9년 무진년(1808년) 겨울 후손 형택규 삼가 서문을 쓰다

도재  형택규 선생의 유택(2021.4. 촬영)
도재 형택규 선생의 유택(2021.4. 촬영)

 

건립; 2019.6
건립; 2019.6

1808년 무진보의 서문 필자인 도재(道齋) 형택규(邢宅奎·음1747.4.25.~1821.1.14.) 선생은 병사공파조(兵使公派祖)이자 충청 병사를 지낸 병사공 형군철의 11대손이다. 제19대 진주형씨대종회장(2018~2020) 형창섭의 5대조부다.

1706년 병술보의 서문에서 형사범 선생은 ‘능주의 한림파(翰林派)와 밀양의 여러 종친이 나란히 족보에 들어오지 못했다.’라고 했다. 즉, 병술보 간행작업에 병사공 후손은 결합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약 100년이 떠나간 어느 시절부터 서로 교류가 활발해졌는지 알기 어려우나, 병사공 후손인 형택규 선생이 1808년 무진보의 두 번째 서문을 지었다. 이로 미뤄보건대, 무진보는 진주형씨의 양대산맥인 판서공파와 병사공파가 비로소 결합하여 합동으로 만든 족보다. 이른바, 대동보(大同譜)다. 판서공파조(判書公派祖)는 평양 서윤을 역임한 서윤공 형군소의 아들 형규(邢珪·조선 태종 때 호조판서)다(1959년 기해년 <진주형씨족보>(일명 판서공파보)).

대한민국 105년 1월 27일

편집 :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f61255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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