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忠義)의 사실과 효열(孝烈)의 행적을 다듬다

우선, 무진보 발문의 원문과 번역문을 제시한다.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번역문>

발문

대체로 주역에 따르면, 뿌리에서 줄기가 나오고, 줄기에서 가지가 나와서 천백만에 이르기까지 무궁하면, 여러 종친의 집안은 그 처음은 하나의 크나큰 뿌리이다. 자자손손이 번성하여 뻗어 나아감에 이르니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으나 그 이치는 아닌 게 아니라 큰 하나이다. 대저 우상공[右相公·邢昉·형방·숭록대부문하시중평장사·서윤공 형군소와 병사공 형군철의 5대조부]부터 이후 뿌리가 깊고 줄기가 커서 진양군(형공미·서윤공과 병사공의 증조부)에 이르러 문벌을 열게 되었고, 서윤공(형군소·판서공파조 형규의 부)과 병사공(병사공파조 형군철)은 나란히 학문과 무예가 뛰어났다. 판서공(邢珪·형규)이후 자손은 계속 이어져서 장차 천만년에 이르리라.

조상의 지극한 덕은 하늘에서 내린 복으로 기려지고 후대까지 베풀어져 자손에 영향을 미치리라. 그뿐만 아니라 관직과 작위가 대대로 이어지면서 과거에 연달아 합격하고 이름난 관리를 배출하였도다. 또한 대저 절개가 곧고 충성스러움이 똑바로 전해지니 절개와 효는 계속 이어져 왔고, 또한 포상받은 지 팔 구대에 이르렀도다. 이에 대대로 이어오는 충효가 넓고 크게 보이디 감탄할 만하도다. 조상 대대로 비록 족보의 흔적이 있으나 족보 간행을 서두르지 않은 지 여러 해(1763년 계미보 간행 이후 45년이 지난 1808년 무진보 간행)가 쌓였도다. 지금 오늘에 이르러 미혹하지 않은 상태에서 문중의 일로 벌인 연회에서 나온 여러 말씀이 이번 일에 미치니, 원근의 여러 종친은 또한 그 뜻에 수긍하였도다.

마침내 서로 의논하고 글을 쓰고 이어져 온 임명장을 모아서 여러 번 바로잡고 편찬하니, 우상공을 시조로 삼고 두 권(무진보 1권·무진보 2권)의 족보를 만드니 무릇 세대는 22세이고 족보 편찬에 참여한 사람은 네 명(족보 서문의 필자인 형효동, 형택규, 형사인과 이 발문의 필자인 형국필)이다. 족보의 범례는 여러 가문의 족보 틀을 절충하였고, 충의의 사실과 효행(孝行)·열행(烈行)의 행적은 또한 모아 다듬으니 완성되었도다. 이는 수백 년 동안 이뤄내지 못한 일이었노라.

나는 할아버지가 같은 출생자를 그림으로 나타내고 손가락으로 짚어보니, 예전엔 길 가는 사람이 서로 편안히 여겨 한 가문을 이루었도다. 옛날 송나라의 소명윤은 그 족보 서문에서 말했다. “우리의 족보를 보는 사람들은 효도하고 우애하려는 마음이 구름이 피어나듯 일어나리라.” 족보를 소중하게 여기는 까닭은 이러한 마음이 근본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족보 역시 헛된 물건에 불과하리라.

나는 어리석고 글재주가 없으나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 경위와 전말(顚末)을 간략히 펼쳐 보였을 뿐이다. 또한 무릇 여러 종친은 힘써서 정을 두텁게 하고 화목하게 하자는 옛 뜻을 널리 드러내고 족보를 다듬어 만드는 근본 뜻을 놓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순조(재위: 1800 -1834) 9년 무진년(1808년) 11월 하순 후손 교정책임 형국필 삼가 기록하다

에필로그(epilogue)의 유사한 개념인 발문은 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大綱)이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이다. 발문의 취지대로, 형국필(邢國弼·1760.09.22.-1815.01.19.·향년 56세) 선생은 1808년 무진보의 간행 경위와 의의, 족보의 틀, 주요 편찬자 등에 대하여 설명했다. 특히, 원문 제13열(번역문, 세 번째 문단)에서 보듯이, 진주형씨 문중에서 이어져 오는 충의의 사실과 효부(孝婦)·열부(烈婦)의 행적을 수백 년이 지나서야 정리했음을 밝혔다.

발문의 지은이 형국필 선생은 1763년 계미보 서문의 필자인 극재공 형종하(邢宗夏) 선생의 4촌인 형종백(邢宗伯) 선생의 손자다. 1808년 무진보 서문의 첫 번째 필자인 형효동 선생의 7촌 조카다.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f61255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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