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 집안 중에 ‘수재 집안’이 있다. 시댁 쪽 친척분들이 만나면 그 집안을 그렇게 부르곤 한다. 남편의 친할머니 여동생(이모할머니) 집안이다. 이모할머니는 평양 시내로 시집을 갔다. 일곱 자녀를 두었다. 아들 다섯, 딸 둘이다. 아들 중 위로 넷은 서울대를 나왔다. 맨 위 두 아들은 서울대 의대, 아래 두 아들은 서울대 공대. 그리고 막내(이하 아저씨)는 김일성 정권에서 체코 프라하 공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시 체코인들을 물리치고 수석 졸업했다니 정말 수재 집안에서도 특출한 수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와는 5촌 관계인 아저씨는 프라하 공대 출신인 것에 자부심이 컸다. 아저씨 말씀에 따르면 한국 전쟁 후 동유럽 국가들은 북한의 재건과 인재 양성에 도움을 주기 위해 북한 유학생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약 1000명가량의 북한 젊은이들이 유학하러 갔다. 그 당시 체코는 동유럽 가운데서 가장 잘 사는 나라였다. 프라하 공대는 1806년에 세워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실력에서도 명성이 자자했기에 많은 북한 유학생이 프라하 공대에서 공부했다. 1988~1992년 정무원 총리를 역임했고, 2005년도 사망할 당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연형묵도 프라하 공대 출신이다. 1984~86년, 1992~98년 정무원 총리직을 두 번이나 했던 강성산도 프라하 공대 출신이다.

아저씨 말씀으로는 큰형님과 작은형님은 ‘순수 뻘갱이’였다. 그 당시 서울대에 다닌 많은 학생이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다, 두 분 모두 서울대 의대를 졸업 후 자진하여 북을 택하셨다. 셋째, 넷째 형님은 당시 서울대 재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남쪽을 택하셨다. 막내 아저씨는 6.25 전쟁 당시 10대 후반이었다. 이념이 성립되지 않을 때라 북에 머물기로 했던 부모님과 우상이었던 두 형님과 함께 평양에서 계속 살았다.

큰형님과 작은형님은 어떻게 사셨을까? 두 분 다 북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큰형님은 모스크바 의과대학 연구생으로 발탁됐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김일성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김일성 정책을 비판한 말 한마디를 조교가 고발하여 종파분자로 몰려 옥사했다. 작은형님도 큰형님 사건과 셋째, 넷째 형님의 남한을 택한 문제, 지주계급 등까지 합쳐져서 성분불량자로 몰려 광산에서 강제노동하다가 행방불명되었다.

아저씨는 프라하 공대 유학을 마치고 10년가량은 폐허가 된 북한의 재건을 위해 일했다. 하지만 40세가 되던 해 역시 작은 형님처럼 성분불량자로 몰려 함북 무산에서 광산노동자로 약 10년가량 일했다. 광산노동자로 일하던 중 프라하 공대 출신 중 간부급에 올라가 있던 동창이 광산 시찰 차 나왔다가 아저씨를 보고 광산에서 빼주었다.

청진의 한직으로 전전하다가 동독에 취업 목적으로 나가게 되었다. 북한 당국에서는 아저씨의 뛰어난 독어 구사력과 전공 능력이 아깝다고 생각했던지 독일(구동독) 건설회사에 건축사로 보냈다. 아저씨를 위해서가 아니라 북한의 외화 부족으로 인한 외화벌이 차원에서 보낸 것이다. 이곳에서 약 5년간 근무하다가 독일인 직장동료가 남한을 택했던 두 형님 소식을 전해주어 영사관을 통해 귀순했다. 그때가 아저씨 60세 되던 1992년이다. 벌써 30년 전이다.

가운데 분이 아저씨다. (사진 출처 :https://www.ehistory.go.kr/page/view/photo.jsp?photo_PhotoID=16665&photo_PhotoSrcGBN=PT)
가운데 분이 아저씨다. (사진 출처 :https://www.ehistory.go.kr/page/view/photo.jsp?photo_PhotoID=16665&photo_PhotoSrcGBN=PT)

남쪽을 택하셨던 두 분은 어떻게 되었을까? 셋째 형님은 미국으로 이민 하였다. 넷째 형님은 서울에서 살았다. 현재는 두 분 다 돌아가셨다. 두 분 모두 전공 분야의 전문직 직업을 가졌기에 중산층 이상 생활을 하면서 비교적 편안하게 살았다. 아저씨가 웃으면서 하셨던 말씀이 있다. "야~~야~~ 내가 우리 형이 궁전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궁전에서 사는 줄 알고 왔지 뭐냐? 근데 형이 그만 바로 돌아가셨을 줄은 몰랐지... " 

아저씨 두 누님도 돌아가셔서 이제 ‘수재 집안’ 1세대에서 남은 분은 아저씨 한 분이다. 소중하고 아껴드려야 할 분임에도 우리는 아저씨를 자주 뵙지 않았다. 자신과 다른 생각에는 거침없는 비난을 퍼부으셨기에 만나기만 하면 거리감이 느껴졌고 피곤했다. 우리와 다른 직선적이고 거친 말투는 좀 무섭기까지 했다. 예전에 '제16대 대통령으로 누가 되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으셨다. 내가 ‘노무현 후보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너도 뻘건 물이 쭉쭉 들었구나.’ 하셔서 몹시 당황한 적도 있다. 북한과 전쟁 반대를 지지하는 우리가 못마땅하셔서 늘 혼내듯 말씀하셨기에 만나는 자리를 애써 피하고 싶어 했다.

10여년 전, 미국에서 친척 어른이 오셨다. 아저씨를 한번 뵙고 싶다 하셔서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아저씨가 많이 변했다. 주장에 힘 있고, 총기가 넘치고, 강철같이 단단하시던 아저씨였는데 마음에 구멍이 숭숭 뚫렸구나~~ 할 정도로 헛헛해 보였다. 금방 물어본 질문을 똑같이 하고 또 하셨다. 똑같은 대답을 두어 번 반복하셨다. 한 편으론 70대 중반이 넘으셨으니 그러실 때도 되었지 생각하면서도... 그리 똑똑하고 창창했던 분이 저렇게 저물어가는구나 생각하니 너무도 안타깝고 허무했다. 어찌 그 아저씨만 허무하랴? 비참하게 돌아가신 큰형님과 작은형님은 허무란 단어 백 마디로도 말하기 어렵겠지.

아저씨를 만나면 우리는 애써 북한 가족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가족을 두고 홀로 오셨으니 가족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송곳 같은 바늘이 심장을 푹푹 찔러댈 텐데...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해서다. 아저씨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10년 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큰형님과 작은형님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셨다. 돌아가신 두 형님... 이북에 있을 조카... 자식들 생각이 24시간 아저씨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그립고 마음이 아파 그만 다 잊어버리려 헛헛해지심을 택하신 것 같았다. 두 형님의 후손들은 어찌 살고 있을까? 북에 온 아저씨 가족들은 어찌 살고 있을까? 그 아픔을 그 한 맺힘을 어찌 누가 감히 이해할 수조차 있으랴?

북한에 남았던 ‘수재 집안’의 비극은 아마도 그 집안만이 겪었던 일은 아닐 것이다. 북한을 택한 많은 지식인이 그렇게 어이없이 숙청당했고 가족과 후손들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과연 그들의 처참한 삶이 개인 탓일까? 북한을 택한 개인 잘못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한민족으로 태어난 것이 죄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이 죄다.

'識字憂患’

성분조사를 받을 때 당 간부가 아저씨께 한 말이다. 똑똑하면서 바른말 하는 사람들은 성분조사를 통하여 감옥으로 광산으로 내몰렸다. 지주계급이었다면 그 굴레를 씌워 숙청하기 더 쉬웠을 거다. 지주계급이 북한 사회를 택한 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부정한 것이다.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사람까지도 무조건 충성을 보이지 않으면 죽음으로 내몰았다. 어찌 보면 시시비비를 따지는 인재란 인재는 씨도 없이 말라버렸을 거라고 본다. 비판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았던 일인독재정권. 수많은 인재를 죽이고도 어떻게 사라지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을까... 신기하다 못해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사돈 남 말 할 때가 아니다. 우리 사회도 비판을 온전히 수용하는 사회인가? MBC 사건을 보면 답이 나온다. 김종대 사건을 보면 답이 나온다. 김어준을 못 봐주어 쫓아낸 서울시를 보면 답이 나온다. 이런 정부를 보면서 비판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는 북한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솔직히 북한과 비교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비교할 정도는 아니라고 보지만 일정 부분 굥정부는 북한을 닮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북한은 비판적 인재들을 어떻게 했나? 성분불량자로 몰아 죽였다. 그동안 남한은 어떻게 했나? 간첩으로 몰아 죽이거나 감옥에 가뒀다. 지금 굥정권은? 고소·고발을 일삼아 입을 틀어막거나 밥줄을 끊어버린다. 육사전성시대에서 검사전성시대가 된 것이다. 이것이 지속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을 틀어막고 억지 주장을 하니 답답해서 살 수가 있나? 아마도 스스로 국가를 버리는 길을 택할 것이다. 내 세대에 이루지 못하면 내 자식 세대만이라도 더욱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는 나라를 택해 살라고 할 것이다.

나만의 생각이라고? 아니다. '5천만 명 붕괴' 기사 댓글을 보면 더 참담하다. '빨리 대한민국 뜨는 것이 답이다. 오로지 기득권, 부자, 기업들이 대 해먹고, 우대하는 나라다. 힘없고, 돈없는 사람들은 살기 힘든 나라~ 민주주의는 사라진 나라~' 라고 쓴 댓글도 있다. 정순신 아들 학폭 사건에서도 기득권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을 보며 국민들은 진저리를 치고 있다.

이런 기사도 있다. "교육정책 규탄 촛불집회'를 연 중고교학생들은 천문학적 액수의 과태료·환수조치, 가짜 뉴스를 통한 마녀사냥과 인신공격, 교육 당국이 학교 내에서 학생들에게 가한 심각한 인권유린과 표적탄압,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수사에 한국에서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 망명을 결정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한국어가 모국인 두 나라. 닮은점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닮은 두 나라. 왜 우리 민족은 비정상과 몰상식을 자꾸 선택하는 걸까? 이렇게 사는 것이 좋나? 민족성이 그런가? 

약 8년전쯤 아저씨가 요양원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 이후 모든 친척들과 연결이 끊어졌다. 지금까지 친척들 누구도... 심지어 3촌 사이인 조카들도 아저씨가 살아계신지 돌아가셨는지 모른다. 자신의 상태를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러셨을까? 지금 살아계신다면 90세가 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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