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인간 사냥꾼에게 사냥감이 되어 고통을 맛본 사람들은 다시는 그 놈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사실 자체를 잊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본래 자기 삶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느닷없이 다시 놈의 먹잇감으로 포획된다. 사람들은 그러한 순환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놈에 대해 연구하고 그 놈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소수이긴 하지만 있기는 있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 대한 보고서를 남겨 후세에 누군가 걸출한 인물이 나와 그 놈을 퇴출할 비법을 발견해내기를 원한다.

<인간 사냥꾼에 대한 마지막 보고서>

1. 포획의 주기

놈이 특정 인간을 포획하는 일정한 주기나 사이클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어떤 사람은 평생에 걸쳐 몇 번만 먹잇감이 되지만 어떤 사람들은 수시로 놈의 먹잇감으로 시달리기도 하는 것이다. 놈은 인간들을 자기 기준으로 분별해 놓고 그 기준에 의해 수시로 포획하기도 하고 포획하지 않기도 한다. 따라서 놈이 설정한 그 기준을 알아내어 놈의 먹잇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이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고대 철학자와 종교가들의 연구물들을 살핀 결과 나는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2. 포획의 두 가지 기준

놈이 설정한 기준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고 있었다. 하나는 이웃과 사회를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탐욕과 욕심만 부리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수시로 놈의 먹잇감으로 포획되어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탐욕과 욕심을 앞세우기보다는 이웃과 사회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 또한 놈에게 먹잇감이 되고 있었지만 전자의 경우보다는 포획되는 경우가 비교적 적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서서히 그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확률이 높아진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놈은 신의 대리자인가? 아니면 소위 말하는 악마인가?

3. 이타적인 성향의 정도

인간 마루타를 자처한 실험과 연구를 통해 나는 놈에게 포획되지 않고 먹잇감이 되지 않을 결정적인 비법을 발견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놈이 인간에게서 갈취하는 골수에 대한 약간의 연구 성과는 있었다. 놈은 인간의 골수를 즐겨 탐닉한다. 놈이 좋아하는 골수는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혼의 필수적 질료이다. 놈은 사람들을 분류해놓고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질 낮은 골수로 배를 채우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이타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질 좋은 골수로 마치 특식을 즐기듯 미각의 쾌감을 맛보고 있는 듯 했다.

▲ 남의 위기에 자기 몸 던진 4인. 이타적 인간은 어떻게 탄생했나.

(사진 출처 : 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19462.html)

인간은 아무리 타락해도 일정한 량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다. 놈은 그 순수성을 이미 훼손한 사람들로부터는 그나마 얼마 남아있지 않은 순수 질료마저 갉아먹어 그 순수성을 더욱 혼탁하고 질 낮은 질료로 전락시키고, 그 순수성을 키워가고 증대시키는 이타적인 사람들로부터는 그 이타적인 성향으로 인해 그만큼 양이 많아지고 질적으로 더욱 순수해진 골수의 순수 질료를 먹어치워 이타적인 사람이 지닌 영혼의 순수성을 반감시킨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이타적인 성향이 자신을 결정짓는 중요한 특성으로 정착해있는 사람들에게 놈은 접근조차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니 놈은 그런 사람들을 몹시 싫어하고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말하자면 이타적인 성향이 어느 정도 있기는 하지만 그 성향이 그리 강하지는 않아 자신 안에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사람에게는 골수를 빼먹는 대상으로 여기지만, 이타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여 자신의 타고난 이기적인 성향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먹잇감의 대상에서 아예 제외된다는 사실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어쩌면 놈은 신이 설정한 일정 범위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허락받으며 신의 대리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 시련 혹은 고(苦)와 유전악으로 기우는 경향성

이 인간 사냥꾼의 정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추상 명사로 부른다. 즉 그들은 인간 사냥꾼을 '시련' 또는 '곤경'이나 '고난'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사람들은 시련이나 곤경에 처했을 때 자신의 영혼이 강탈당하는 느낌에 사로잡히고 심신이 박약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사냥꾼의 농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 사냥꾼은 자신이 분류한 기준에 의해 인간을 시련이나 고난으로 몰아세워 인간의 골수와 영혼의 질료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영적인 시험'이라고 부르고, 불교에서는 '고 苦' 라고 부르기도 하고 '갈애 渴愛'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름이 인간 사냥꾼의 정체를 명확히 밝힌 이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이름들은 인간 사냥꾼의 결과적인 모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기실 인간 사냥꾼은 인간의 유전인자 안에 기생하고 있다. 인간의 유전인자인 게놈 속에 있는 인간의 '유전악'이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유전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유전악으로 기우는 경향성'이라는 표현하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 불교에서 '업業'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것에 다름 아니다. 사람이 전생의 업으로 인해 고생을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타고난 유전적인 경향성이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이렇게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이 '유전악으로 기우는 경향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고苦를 자초하기도 하고 시련의 굴레 속에서 평생 영혼의 평화와 자유를 얻지 못한 채 죽어가는 것이다.

5. 거듭남과 해탈

나와 인간 사냥꾼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이 인간사냥꾼을 지구상에서 축출할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아마도 순수한 영혼을 지닌 적지 않은 소수의 무리들이 나의 투쟁 대열에 동참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 소수의 무리들을 기독교에서는 '거듭난 사람'이라고 부르고, 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 용어조차 인간 사냥꾼을 사로잡으려는 소수의 무리들을 정확히 표현했다고 볼 수 없다. 인간 사냥꾼에게 먹잇감이 되지 않는 비법은 그런 종교적인 방법도 좋지만 자신에게 잠재해있는 이타적인 성향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 최고이다. 다시 말해 이타적인 성향을 실천하며 살다가 시련이나 곤경에 처했을 경우에도 자신의 이타적인 성향을 포기하지 않고 더욱 이타적으로 기울며 자신의 욕망이나 이기심을 더욱 확실히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타적인 사람이 때로 시련을 당하는 것은 그 이타적인 성향 안에 이기심이 잠재해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주변 상황을 면밀하게 전체적으로 살피는 지혜로움과 악을 제압할 수 있는 진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6. 선과 진리의 결합

선한 사람들이 시련에 처하는 것은 왜일까? 올바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또 왜일까? 이것에 대한 원인을 인간 사냥꾼에서 찾는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쩔 것인가? 기실 세상을 선한 마음만으로 살기 어렵다. 또한 진리와 정의만으로 살기도 어렵다. 둘 다 인간 사냥꾼의 포획대상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선한 마음과 진리, 지혜를 모두 지니고 있어야 비로소 인간 사냥꾼의 포획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자녀가 온전히 성장하려면 엄마의 사랑도 있어야 하지만 외부로부터 가정을 지키는 아빠의 힘과 지혜가 함께 필요한 것이나 같은 이치이다. 우리의 영혼이 온전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타적인 성향의 선한 마음도 필요하지만 악에 대적할 수 있는 확고한 진리와 지혜로 무장되어있어야 하며, 그 때에야 비로소 인간 사냥꾼의 포획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 인간 사냥꾼에 대한 연구는 여기까지의 보고서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아쉬움을 남기는 것은 인생의 또 다른 묘미이기도 하기에 나는 이 묘미 또한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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