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하루하루 보내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다. 혹자는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하지 않는가. 2014년 4·16 세월호 사변으로 막연히 ‘잔인하게’만 비쳤던 4월은 적어도 내게는 실제로 잔인한 달로 바뀌었다. 아직도 그 희생자와 유가족의 원과 한이 풀어지지 않아서 더 그렇다. 더불어 1960년 4·19혁명의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천명하였으나 민주 세상으로 가는 길이 아주 더뎌 보이기에 마른 가슴의 응어리가 더 커지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작금의 국내외 상황은 4월이 잔인하다는 트라우마 한(恨)을 더 일깨우는지 모르겠다.

해마다 이맘때쯤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 ‘껍데기는 가라’(신동엽)를 읽는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980년 4월 전남대 대강당 앞 광장에서 열린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 때 연설을 하고 있는 고 박관현 열사. 전남대 제공. 한겨레, 22022-10-12.
1980년 4월 전남대 대강당 앞 광장에서 열린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 때 연설을 하고 있는 고 박관현 열사. 전남대 제공. 한겨레, 22022-10-12.

한편, 5·18민주화운동의 제43주기가 임박하니, 어느 시인의 글이 기억 창고에서 복원되면서 암호가 풀려 나온다. ‘님이시여,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출처: 꽃의 시인 김춘수가 전두환에 바친 헌정시/5.18 40주년 아카이브 프로젝트·KBS광주·www.youtube.com/watch?v=FCiy1Da_S8s)를 보고 듣는다. 1988년 2월 전두환이 퇴임할 때, 송시를 낭송하는 당대의 유명한 성우 고은정의 목소리는 너무나 낭랑해서 자연스럽지 않을 정도다. 전두환이 담배를 태우는 장면은 압권(?) 중의 압권이다.

“님이 태어나신 곳은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내동 마을/ 한반도의 등줄기 소백의 긴 뫼뿌리 뻗어내려 후미지고 아늑한 분지를 이룬 곳/···/1930년대의 어느 날 님의 일가는 일본 제국주의의 그 악마의 등쌀을 견디다 못해 정든 땅 이웃을 버리고 머나먼 남의 땅 만주벌판으로 내쫓기는 사람들처럼 억울하게 억울하게 떠나가야만 했으니/···/님이 헌헌장부로 자라 마침내 군인이 된 것은 그것은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1979년 가을에서 80년 사이 이 땅 이 겨레는 더할 나위 없는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발등에 떨어진 불은 우선 그것부터 끄고 봐야 하듯이 우선 치안을 바로잡고 우선 민심을 안정시키고 우선 경제의 헝클어진 운행을 궤도 위에 올려놓아야만 했습니다/···/이런 일들을 해내기 위하여 1981년 새봄을 맞아 마침내 제5공화국이 탄생하고 님은 그 방향을 트는 가장 핵심의 자리에 앉았습니다/···/그리고 보십시오/···/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특기할 일은 님께서 단임으로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천한 일, 그것입니다/건국 이래 가장 빛나는 기념비적 쾌거라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새로운 전통, 님은 선구자요 개척자가 되었습니다/그 자리 물러남으로 이제 님은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님이시여, 하늘을 우러러 만수무강하소서”

1980년 신군부 세력의 수장 전두환은 계엄을 주도하며 합동수사본부장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이끌었다(오른쪽). 2016~2017년 조현천 전 국군기무사령관은 촛불집회를 보며 계엄령을 검토하고 불법 수사로 간첩 사건을 기획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연합뉴스. 한겨레21, 2019.06.16.
1980년 신군부 세력의 수장 전두환은 계엄을 주도하며 합동수사본부장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이끌었다(오른쪽). 2016~2017년 조현천 전 국군기무사령관은 촛불집회를 보며 계엄령을 검토하고 불법 수사로 간첩 사건을 기획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연합뉴스. 한겨레21, 2019.06.16.

위 시의 작자가 어떤 분인지 잘 모르나, 학창 시절에 ‘꽃’(문예지 <시와 시론>, 1952년)을 배우며 내 가슴이 자극받았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

찾아보니, “···시인 김춘수는 민정당 창당발기인 15명 중 한 명으로 참가해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내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추적] 예술가의 영혼 팔아치운 시인과 소설가들’, 한겨레, 1996.1.18.). 민정당(민주정의당의 약칭)은 대한민국 제5공화국과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 시기의 집권당이다. 나는 청년기에 그 시인이 민정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가한다는 뉴스를 듣고 적잖이 황당했다. 그 뒤로 ‘꽃’을 기억 창고에서 털어냈다.

그 시인이 헌정시로 전두환을 불러주었기에 전두환은 그 시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을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그 시인의 시를 어떻게 읽을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 시인의 행실을 기억하려는 노력은 복 짓는 일이리라. 차제에 ‘님이시여,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에 대한 유튜브 동영상(약 8분)을 보는 일은 장차 수익률이 높은 투자이겠지요.

사월도 오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대한민국 105년 4월 17일

*이 글은 <남도일보>(2023.04.17.)에 실린 칼럼입니다.

원문 보기: [남도일보 화요세평] 시 ‘꽃’과 5월 광주

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21371

 

* 5.18 40주년 아카이브 프로젝트·KBS광주의 동영상을 녹취하여 정리

https://www.youtube.com/watch?v=FCiy1Da_S8s

송시(頌詩),  ‘님이시여,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

      작시 김춘수,  낭송 고은정      1988년 2월

님이 태어나신 곳은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내동 마을

한반도의 등줄기 소백의 긴 뫼뿌리 뻗어내려

후미지고 아늑한 분지를 이룬 곳

뒤에는 용두산, 앞에는 황강(黃江),

산천은 이 땅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어질고 수수한 그 모양 그대로

겨우 50호 남짓한 집들을

마치 암탉이 어린 제 새끼들을 품에 안은 듯한 오붓한 산골 마을

 

그렇습니다

님이 태어나신 곳은 햇살 따스하고

계절에 계절마다의 꽃이 피는

순박한 사람들이 가난하나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정답게 사는 곳

 

그런데 1930년대의 어느 날

님의 일가는 일본 제국주의의 그 악마의 등쌀을 견디다 못해

정든 땅 이웃을 버리고

머나먼 남의 땅 만주벌판으로 내쫓기는 사람들처럼

억울하게 억울하게 떠나가야만 했으니

 

그때 가족들의 간장에 맺힌 한과 분은

아직도 여리고 어린 님의 두 눈과 폐부에

너무도 생생하게 너무도 깊이깊이 박혔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로 이 땅 이 겨레가 겪은 수난의 한 상징이라

님의 여리고 어린 눈에도 그렇게 비쳤을 것입니다

 

님이 헌헌장부(軒軒丈夫)로 자라 마침내 군인이 된 것은

그것은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군인이란 힘을 겨뤄 나라를 보전하고 겨레를 보호하는 사람이라면

님이 군인이 된 것은

1930년대의 어느 날 보고 겪은 그 처절했던 기억과의 새로운 만남이요

아프고 아픈 그 기억을 이 땅 이 겨레로부터 말끔히 씻어내려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다져지고 다져진

굳은 의지와의 새삼스러운 만남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현대의 묵시록이라고 일컬어지는 소설 <25시>를 쓴

벼르질 게오르규(Virgil Gheorghiu) 신부는

최근에 쓴 그의 책에서 님을 두고

덕과 용기와 능력을 지닌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1979년 가을에서 80년 사이

이 땅 이 겨레는 더할 나위 없는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국가원수가 시살(弑殺)되고 치안은 마비되고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급강하하고

민심은 흉흉하여 앞이 잘 내다뵈지 않았습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은 우선 그것부터 끄고 봐야 하듯이

우선 치안을 바로잡고 우선 민심을 안정시키고

우선 경제의 헝클어진 운행을 궤도 위에 올려놓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나라와 겨레의 생존에 연결되는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을 해내기 위하여

1981년 새봄을 맞아 마침내 제5공화국이 탄생하고

님은 그 방향을 트는 가장 핵심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동안 7년, 국정을 위하여는

촌각을 쉬지 않는 님의 그 정력과 열과 성과 그리고 그 용단으로 하여

국운은 날로 선진을 바라고 도약해 갔습니다

물가는 안정되고

마침내 100억 불의 무역흑자를 내게 되고

국민소득은 3,000불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제적 지위는 날로 향상되고

우리의 국방은 자주와 내실을 다져가고 있습니다

예술은 창달되고

문화 공간과 시설은 의료 혜택과 함께 무한히 넓어지고

우리는 이제 그렇게도 갈망하던

복지사회로 한걸음한걸음 다가가고 있습니다.

교육과 언론은 자율화와 자유화의 길을 터 가고 있습니다

88올림픽을 치른 뒤는

우리 사회 전반의 활기가 더한층 차고 넘칠 것입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죽어가던 한강이 다시 또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특기할 일은

님께서 단임으로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천한 일, 그것입니다

건국 이래 가장 빛나는 기념비적 쾌거라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 이 말이 나왔을 때 세상은 아무도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일을 이전에 일찍 누구도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단임으로 물러난다

이 말의 실천으로 이제 정치는 신뢰를 회복해 갈 것입니다

아니, 이미 회복했습니다

 

새로운 전통, 님은 선구자요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그 자리 물러남으로 이제 님은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

 

님이시여, 하늘을 우러러 만수무강하소서

 

편집 :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f61255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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