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무원종공신록권
선무원종공신록권

우리나라 옛 국호인 조선시대에 가장 치욕적이요 굴욕적이며 분통한 전쟁이 임진왜란이다. 국민의 주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찰나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쳐 나라를 구해낸 분들의 희생 정신은 억겁이 지난들 잊을 수 있으리오.

그분들이 이름하여 「임란공신」들이다. 선조 조정에서는 지휘관급 이순신을 비롯한 18명을 「선무공신」으로, 다음의 장수와 병사 9,060명을 「선무원종공신」으로 구분하여 책록하고 녹권을 하사했다.

이들의 선정 과정이 행여 사사로움이나 세도가의 억압으로 공적의 진실이 조작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발동하여 참고 자료를 살펴보았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편을 보면 공신 선정 과정에서 당파적인 알력이나 자신의 공적이 으뜸이라고 억지를 쓰는 행위에 「선무공신도감」이 골머리를 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선무 원종공신으로 선정되었는데도 자신은 내세울 만한 공적이 부족하니 이름을 빼달라는 분도 계셨다. 그분들의 희생 정신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진정한 구국의 정신임이 드 높이 우러러 보인다.

다른 예를 들어본다.

전적은 있으나 군무 규율을 어김이 심한 자를 벌하여 주라고 이순신이 장계를 올린 자의 경우이다.

그 내용을 선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조 31년 1598년 4월 20일 첫 번째 기사

원문

○甲戌/司憲府啓曰: "臣等取考統制使軍官玄應臣、尹思忠、陳夢日、吳大器、崔大晟等逃避公事, 則兵曹於上年十月, 因統制使李舜臣狀啓, 移文各道, (根)〔跟〕 尋捕捉, 押送于李舜臣處, 一依軍律處斷事, 啓下行移, 旣經四朔之久, 不爲捉送, 則爲本兵者, 所當請推監司催督, 械送軍門, 梟示警衆, 而乃於今年正月, 托以各人之罪, 今不敢必以爲的然, 拿來鞫問, 情犯參酌定罪事, 又爲入啓, 使臨戰逃走之人, 不卽梟示, 極爲痛憤。 請兵曹堂上、色郞廳, 竝命推考, 依前公事, 械送于統制使李舜臣處, 取其中情犯尤甚者, 依律處斷。 且陳夢日以出身軍官, 敢爲逃避, 不可不痛懲。 其贖米公文, 勿令擧行, 其餘逃躱者, 亦令窮尋捕捉定罪。" 答曰: "依啓, 旣納米受公文勿施, 則失信非細。“

【태백산사고본】 63책 99권 21장 【국편영인본】 23책 418면【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군사-군정(軍政) / 재정(財政)

번역

사헌부가 아뢰기를,"신들이 통제사(統制使)의 군관(軍官) 현응신(玄應臣)·윤사충(尹思忠)·진몽일(陳夢日)·오대기(吳大器)·최대성(崔大晟) 등의 도피 공사(公事)를 취고(取考)하였더니, 병조(兵曹)가 지난해 10월에 통제사 이순신의 장계에 의하여 각도에다 공문을 발송하여 그들을 철저히 찾아내어 체포한 다음 이순신에게로 압송(押送)하여 모두를 군율에 의해 처단하도록 계하받아 행이(行移)하였는데, 4개월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잡아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본병(本兵)061) 으로서는 마땅히 감사를 추고하도록 청하고 독촉해서 잡아내어 그들을 군문으로 계송(械送)하여 대중 앞에 효시(梟示)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금년 1월에 와서는 그들의 죄가 지금으로서는 꼭 분명하다고 할 수 없으니 그들을 잡아들여 국문한 후 정상을 참작하여 죄를 정해야겠다는 것으로 다시 아뢰어 전쟁에 임해 도주했던 자들을 즉시 효시를 못하게 만들었으니, 극히 통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병조의 당상과 색낭청을 모두 추고하소서.

그리고 종전 공사(公事)대로 그들을 통제사 이순신에게로 계송하여 그 중 정범(情犯)이 더욱 심한 자를 골라내어 법대로 처단하게 하소서. 또 진몽일은 출신(出身) 군관으로서 감히 도피하였으니 통렬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는 바, 그의 속미(贖米)에 관한 공문(公文)은 거행치 말도록 하실 것이며, 그 나머지 도피한 자들도 모두 철저히 찾아내어 체포한 후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진몽일은 이미 쌀을 바치고 공문을 받았으니 시행하지 않는다면 신의를 잃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3책 99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418면【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군사-군정(軍政) / 재정(財政)

위 내용을 요약하면 통제사 이순신이 올린 장계 내용은 찾아볼 수 없으나 임금님께 장계를 올린 위법 정도를 짐작건대 중대한 군법 위반 사례로 보인다.

위의 5명 중 현응신, 윤사충, 진몽일, 최대성은 선무원종공신 선정에서 탈락하였다. 그러나 오대기는 선무원종공신 2등으로 선정되었다. 이에 따른 이유는 알 수 없다. 선조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몽일은 쌀을 바치고 공문을 받았으니 고려를 당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탈락하였다. 당시의 명령 체계로 보아 상상 밖의 불복이다. 그렇다면 임금의 권유를 받아들이기에는 한계를 넘은 범법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목되는 바는 당시 신분 제도가 엄격하여 양반과 노비의 예우가 구분되어 노비의 천대와 하시가 만연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노비의 천한 신분이지만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던 그들의 공적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465명을 공신으로 선정했다. 이로 보아 당시 공신도감은 지위고하나 계급의 차별을 불식한 정정당당한 공신 선정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선무원종공신 선정은 철두철미하고 공정한 공적 심사였다고 본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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