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새벽에 문득] 억지와 무능에 빠진 군을 바로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나침반도 브레이크도 없는 나라'다. 안팎으로 쉴새 없이 밀려드는 폭풍우 속에서 국정은 정확한 방향타도 없이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다. 검찰과 경찰 등 각종 권력기관을 앞세운 무한폭주가 계속돼도 이를 제어할 장치마저 없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오만함 앞에 많은 국민이 한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다. '해병대 채아무개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전 해병대 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에 대한 구속영장을 군사법원이 기각한 것은 요즘의 '공포 정치' 분위기를 고려하면 높이 평가할 대목이다. 그런데 "언론 인터뷰를 막기 위해 구속이 필요하다"는 따위의 황당한 사유까지 포함된 구속영장이 기각된 것은 너무 당연한 귀결 아닌가. 법원의 상식적인 결정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가 지금 얼마나 비상식적인 나라가 돼버렸는지를 웅변한다.

▲군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뒤 소감을 밝히는 전 해병대 수사단장 박정훈 대령. 법원의 상식적인 결정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가 지금 얼마나 비상식적인 나라가 돼버렸는지를 웅변한다.ⓒMBC 화면 갈무리

 

"이런 일로 사단장까지 처벌하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느냐." 윤 대통령이 했다는 말이다. 물론 대통령실은 한사코 부인한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그동안 보인 행보를 보면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철없는 젊은이들이 놀러갔다가 죽은 사건으로 경찰청장까지 처벌하면 누가 경찰청장을 할 수 있겠느냐", "외국 아이들 데려다 치른 행사 하나 실패했다고 여성가족부 장관까지 책임을 물으면 누가 장관을 할 수 있겠느냐." 이태원 참사나 세계 잼버리 대회 실패 등에 대해 명시적으로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윤 대통령이 보인 태도는 늘 그런 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는 아무리 큰 사고가 터져도 고위직들은 멀쩡하게 살아남고 애꿎은 중·하급 관계자들만 감옥 가고 형사처벌 받는 나라가 됐다. 이번 사건에서도 애초 혐의 대상자에 포함됐던 임성근 해병 제1사단장은 국방부 조사본부 발표에서는 결국 빠지고 대대장 2명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가 적용됐다. 이태원 참사에서 총경급 이하만 구속된 것과 판박이로 흘러가고 있다.

"귀신 잡는 해병"이 아니라 "부하 잡는 해병"

윤석열 정부 고위 공직자들의 한결같이 비겁하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윤 대통령은 어떻게 이런 사람들만 골라서 높은 자리에 앉혔을까, 이들은 애초에는 비겁하지 않았는데 대통령의 비호 아래 바뀐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그렇게 비겁하게 살아와서 지금의 영달을 누리게 됐는가. 어쨌든 이번 사건에서 국방부와 해병대 수뇌부가 보인 모습도 비겁함과 무책임 그 자체다.

해병대의 오랜 자부심의 표현인 '귀신 잡는 해병'은 이제 '부하 잡는 해병'으로 바뀌어야 할 듯하다. '부하 잡는'이란 말은 단순한 은유적 표현이 아니다. 수색 작전에 나선 장병들의 안전을 소홀히 해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해병대 지휘관들의 안일함과 부주의가 말 그대로 부하를 잡은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 사건을 수사한 전 해병대 수사단장을 '잡아들이는' 데 눈이 벌겋다.

▲해군사관학교의 교훈은 ‘진리를 구하자, 허위를 버리자, 희생하자’다. 해사 출신인 김계관 해병대사령관과 임성근 제1사단장의 모토는 이제 ‘진리에 눈감자, 허위로 살아남자, 부하를 희생시키자’로 바뀐 것 같다.
▲해군사관학교의 교훈은 ‘진리를 구하자, 허위를 버리자, 희생하자’다. 해사 출신인 김계관 해병대사령관과 임성근 제1사단장의 모토는 이제 ‘진리에 눈감자, 허위로 살아남자, 부하를 희생시키자’로 바뀐 것 같다.

 

임성근 제1사단장은 폭우 실종자 수색 작전 당시 현장 지휘관들에게 "포병부대원들이 일렬로 서서 작업하지 말고 4인1조로 찔러가며 바둑판식 수색정찰을 하라"고 질책했다. 현장 지휘관들은 사고 발생 가능성을 우려하면서도 안전조처 강구 등을 건의할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한다. 임 사단장은 사고 뒤 해병대 수사단의 초동조사 과정에서 "사고 부대가 물에 들어간 게 이번 사고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발뺌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계환 해병대사령관은 '임 사단장을 혐의에서 빼라'는 상부의 압박을 받고 노심초사한 흔적이 역력하다. 해병대를 책임지는 총사령탑이라면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외풍을 막는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해야 옳다. 그런데 반대로 그는 박 대령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 안간힘을 쓴다.

김계환 사령관과 임성근 사단장은 모두 해군사관학교 출신들이다. 김 사령관은 해사 44기, 임 사단장은 한 해 후배인 해사 45기다. 해군사관학교의 교훈은 '진리를 구하자, 허위를 버리자, 희생하자'다. 김 사령관과 임 사단장도 생도 시절에는 이런 교훈을 새기며 참된 군인의 길을 다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들의 구호는 바뀐 것 같다. '진리에 눈감자, 허위로 살아남자, 부하를 희생시키자.'

박정훈 대령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내용 중에는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도 포함돼 있다. 그런데 과연 이번 사건에서 이 장관은 명예로운 모습을 보였는가. "변명 같이 들리시겠지만…"이라는 말을 국회에서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며 '명예'란 단어를 떠올리기는 어렵다. 자신이 했던 결재를 번복한 이유를 명쾌히 설명하지 못하며 더듬거리는 모습도 명예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실패한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작전'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을 관통하는 단어가 '비겁'이라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을 관통하는 것은 '억지와 무능'이다. 연일 이어진 언론 브리핑에서 기자들의 집중포화를 받으며 쩔쩔매는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의 모습은 '국방부의 수준'을 정확히 '대변'한다. 논리 부재, 사실관계 오류, 천박한 역사 인식 등…. 어떤 면에서 전 대변인은 국방부의 억지와 비상식을 온몸으로 증명하며 총알받이 노릇을 했을 뿐이다.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와 관련한 언론 브리핑에서 기자들의 집중포화를 받으며 쩔쩔매는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의 모습은 ‘국방부의 수준’을 정확히 ‘대변’한다. ⓒKBS, MBC, SBS, JTBC 화면 갈무리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와 관련한 언론 브리핑에서 기자들의 집중포화를 받으며 쩔쩔매는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의 모습은 ‘국방부의 수준’을 정확히 ‘대변’한다. ⓒKBS, MBC, SBS, JTBC 화면 갈무리

 

홍범도 장군 흉상이 육사 교정에서 결국 철거된 것을 두고 "군사작전하듯이 해치웠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사실 군사작전이야말로 치밀하고 정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면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작전'은 완전히 실패했다. 군사 공격작전을 세우려면 고지까지의 공격로는 몇 개가 있는지,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은 충분한지, 목표에 이르는 데 예상되는 저항과 장애물은 무엇인지 등을 입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번 작전의 최대 장애물은 여론이었다. 예상 밖의 거센 비판 여론 속에서 작전은 비틀거렸고, 공격의 선봉에 섰던 국방부 대변인은 여론의 포화를 맞고 사실상 전사했다.

그것은 애초부터 전략 목표가 부적절했기 때문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무를 완수하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는 따위의 작전 지시는 영화와 드라마라면 몰라도 현실에서는 결코 제대로 된 작전 명령이 아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싸우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다", "사방에서 공격을 많이 하는데 그런 공격에 대해 움츠러들지 말고 당당하게 대응하라"고 다그쳤다. 여론의 저항이 거세 정상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무리하게 밀어붙인 것이다. 결국 흉상을 막무가내로 철거했지만 군은 전략 목표 확보에 실패하고 가장 소중한 자산인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북한과 공산주의 위협에 맞서 싸워온 육사의 전통과 정체성"을 거론했다. 그런데 군이 이번에 육사 생도들에게 보인 모습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군이 '국민과 맞서 싸우는' 모습, '상식과 이성에 맞서 싸우는' 모습이었다. 이런 게 과연 '미래 국가의 간성'을 키우는 올바른 교육인가.

용감함과 당당함, 탁월한 작전 수립·실행 능력…. 너무나 평범한 말이지만 군이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군 수뇌부가 보이는 모습은 용감함 대신에 움츠러듦, 당당함 대신에 비겁함, 치밀한 작전 능력 대신 억지와 무리수의 연속이다. 부하를 희생양 삼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지휘관을 지켜본 병사들이 전장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무모하고 부적절한 작전 계획으로 전략 목표 달성에 실패한 군이 실제 국가안보에서 훌륭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까. 문제는 군의 이런 비겁함과 무능을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앞장서 조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절체절명의 과제 '수사 외압 진상 규명'

하지만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억지와 무능의 늪에 빠져 비틀거리는 군을 바로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첫 출발은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이다. 정당한 수사 과정에 개입해 진실을 왜곡·축소·은폐하려는 행위는 국기문란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다. 그것은 한 젊은 병사의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자를 엄히 문책해 다시는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항명 행위'다.

수사 외압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공수처 정도로 진상을 밝히길 기대할 수는 없다. 국회 국정조사도 한 방법이겠으나 결국은 특검밖에는 현실적 대안이 없는 듯하다. 특검도 그냥 특검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에 불타고 뛰어난 수사 실무 능력을 갖춘 특검이라야 한다. 대통령실을 비롯해 국방부, 해병대사령부 등은 총력을 펼쳐 진실 규명을 저지하고 훼방할 것이다. 대통령의 위법 행위 의혹이 걸린 사안인 만큼 진상을 은폐하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이미 관련 증거가 많이 인멸됐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모든 난관을 뛰어넘어 진상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 어렵지만 미룰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것은 이 정권의 무한폭주에 제동을 걸고 우리나라의 앞길을 인도할 나침반을 새롭게 손질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편집자 주> 김종구 언론인은 1988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서 한겨레21 편집장, 한겨레신문 편집국장, 편집인,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남서울대 객원교수, 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로 매스컴과 글쓰기 등의 강의를 하고 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종구 언론인  kjg21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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