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춘성 시인과의 인연

지난 4월에 있었던 ‘지리산 10·19 생명평화 기행’에서 만난 인연을 소개하고 싶다. 서춘성이라는 시인으로 필자보다 10년 정도 연상이신데 역사의식이 뛰어난 분 같다. 올해 75주년을 맞이하는 여순 10·19날에 한겨레 [왜냐면]에 다음과 같은 시를 투고했던 분이다.

 

지리산에 봄이 오면 곳곳은

꽃피는 소리에 요란스럽고

지리산을 감아 흐르는 섬진강에는

바다로 나갔던 황어가 매화꽃 따라

새로운 생명을 산란하기 위해

섬진강을 힘차게 거슬러 오르는데

그해 시월

평화롭고 고요했던 지리산 골짜기마다

이념의 늪에 빠져 피의 능선을 넘지 못한

쫓는 자와 쫓기는 자는

사람의 문턱을 넘어 사람 밖으로 사라졌다

사계절은 모두 비명에 잘려나가고

진달래 피는 봄 사월 문수골 깊은 골에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얼굴이 붉어지도록 진달래의 붉은 꽃잎 따먹고

죽은 자의 입술에 묻은 밥알까지 거둬 먹다가

뼛골까지 시린 문수골 찬바람과 안개 속에

상고대 핀 진달래꽃은 차마 따먹지 못하고

소복 입은 진달래 앞에

울고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산짐승 되어 목숨까지 버리고

이념이란 돌덩이를 품고 부화를 기다렸던

다시 못 온 당신은 누구입니까

죽은 그들의

무덤 위에 내린 눈은 모두 백설이기에

두 눈을 감아 버린 산,

뜨거운 함성을 태워 침묵하는

지리산에

새로운 생명을 품은 황어의 회귀를 따라

또 하나의 계절,

사랑과 평화의 계절이 흐르고 있다

(10·19 여순사건에 희생된 영혼들께 이 시를 바칩니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 10·19 생명평화기행 참가자라고 밝히며 이런 시를 올리시기도 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주민이 주저앉아 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1948년 10월 여순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주민이 주저앉아 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요모조모로 바빠서 자주 뵙지 못하다가 일주일 전에 뵈면서 내가 최근에 읽었던 『비밀과 역설』 에 나오는 사연과 함께 시 한편을 답례로 알려드렸다.

그 책에 나온 사연은 이랬다.

동독의 청춘 남녀인 클라우스와 잉그리트는 1970년 소련 수학여행길에 눈이 맞아서 결혼했다. 24세 남편 클라우스는 17세 때 동독 탈출을 시도한 전력 때문에 낙인이 찍혀 제대로 된 직장을 갖기 어려웠다. 21세 아내 잉크리트는 교사였지만 공산주의 정치교육에 신물이 났다. 1973년 1월 이제 갓 15개월을 넘긴 아들 홀거에게도 더 많은 자유의 공기와 삶의 기회를 안겨주고 싶었다. 둘의 탈출의사를 확인한 서베를린의 지인들은 1월 22일 밤 동독 도시 포츠담에서 서베를린 사이의 통과 경유지 주차장에 화물차를 대기시켰다. 부부는 화물차 짐칸에서 두 개의 상자 속에 숨어들었다. 엄마 잉그리트가 아기 홀거를 품었고, 아빠 클라우스는 옆 상자에서 따로 숨을 죽였다. 동독 국경경비대의 검문이 길었다. 갑자기 홀거가 울기 시작했다. 잉그리트는 급히 아이의 입을 막아 소리를 죽였고, 탈출은 성공했다. 검문소를 벗어나 서베를린 방향으로 300미터쯤 왔을 때 부부는 화물상자를 치우고 나왔다. 기쁨을 만끽하려던 순간 잉그리트가 “우리 아기, 우리 아기!”를 소리치며 발을 굴렀다. 부부는 홀거가 이미 중이염과 기관지염을 앓아 코로 숨쉬기가 곤란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홀거의 작은 몸은 굳어갔고, 꺼진 생명을 되돌리려는 어른들의 안간힘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시가 탄생했다.

- 홀거를 기억하며 -

커서 어른이 되면 아름다운 세상을 보러 다닐 거예요.

쇠로 만든 새 등에 올라 저 멀리 우주를 가로질러 다닐래요.

강과 바다, 대양의 물위를 날아다닐래요.

구름이 누나가 되고 바람이 형이 되겠죠.

 

이시스 여신의 오랜 땅에서

스핑크스도 보고 피라미드도 보겠죠.

웅장한 나이아가라 폭포 너머로 날아갈 거예요.

사하라의 태양 아래서 목욕을 하고

구름 속에 숨은 티베트의 산들을 가로질러

라마교 마법사의 기막힌 비밀을 내려 보고는

찌는 더위를 뒤로 하고 북구의 빙하로 향할 거예요.

 

캥거루가 사는 섬들도 지나고 폼페이 유적을 지나

구약 성경에 나오는 성스러운 땅, 유명한 호머의 나라를 지나면

이 세상의 아름다움에 또바기 홀리겠죠.

구름이 누나가 되고 바람이 형이 되겠죠.

 

이런 사연과 시를 알려드렸더니 대뜸 자신이 비슷한 상황을 상상하여 썼다는 시를 알려주셨다. 물론 이와 같은 상황은 상상이 아닌 우리 분단 현실에서 어디선가는 일어났을 법한 비극일 것이다.

 

미늘

-서춘성-
 

평생 벗어날 수 없었던 미늘을 벗어놓고

그녀는 돌아갔다.

 

그날 악몽의 순간

비바람 속에 천둥처럼 들이닥친 진압군을 피해

헛간 바닥을 파고 만든 땅굴 속에 숨어있을 때

겁에 질린 어린 딸의 울음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은

절박한 순간이 지나고

공포의 정적 속에 요동치던 그녀의 심장은 멈춰 버렸다.

 

진눈개비가 퍼붓는 날 오후

집 뒤 야산에서 딸의 시신을 묻으며

입을 틀어막았던 통한의 손을 돌로 내리쳤던 일들을,

끊어 낼 수 없었던 기억과 저주스러운 손에

평생 하얀 천을 감고 살아왔던 일들을,

질긴 목숨 때문에 그 손으로 밥을 먹고 살아왔던

증오의 세월을,

하늘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던 어둠의 날들을,

 

73년이 지난 오늘까지 따라와 울고 있는

딸의 울음을 마주하고 헛간 땅굴에 틈을 누인 그녀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 아픈 세월을 떠올리고 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

저주스러운 손에 감긴 미늘을 풀어놓고

오래된 참회의 마지막 울음을 울면서

딸의 울음을 따라 깊은 어둠 속에 잠기고 있다.

 

이런 역사의식을 갖춘 분은 자주 뵙고 싶다. 지난 22일에는 개봉하는 첫 프로를 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어서 같이 영화를 보기도 했다. ‘서울의 봄!’ 서로 다른 상황에서 그 시대를 겪었겠지만 참담한 심정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멋진 시인 한분을 가까이 모시고, 가끔 만나 뵙고 술 한 잔 기울이는 것도 인생삼락 중에 하나가 아닐런지요.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경호 객원편집위원  jkh353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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