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년의 추억, 폐교된 능월국민학교
근, 현대사를 관통한 세대인 나는 여덟 살 때 해방을 맞고 아홉 살에 능월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아이울음소리 들어본 지가 가물가물한 시대를 만나 유년시절의 추억이 깃든 능월초등학교도 폐교가 되는 아쉬움을 안게 되었다. 능월국민학교가 신기리에 있을 때 학교에 다녔고 다시 근방으로 이전했다가 내내 자리를 지켰는데 폐교가 되어 오래전 학교 부지는 도로공사로 넘어갔다.
우리 동네는 90년도까지만 해도 주민이 100여명 넘었는데 그 이후는 젊은이들이 사라지면서 지금은 70세가 동네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다. 말로만 듣던 초고령사회에 나도 살고 있다. 지금은 주민등록을 심은 가구 수는 36호 정도 그 중 거주자는 20호 정도 된다. 우리가 이 동네서 일곱이 나서 같이 자랐는데 동네 친구들도 먼저 상여 타고 먼 길 떠났고 살아있는 친구가 나를 포함 네 사람이다. 고립무원처럼 되어가는 고향마을이다.
선조께서 마을에 들어온 지 300년, 내가 14대 손인데 동네에는 내가 제일 연장자이니 우리 혈통을 얼마나 이어나갈지 애석할 뿐이다. 7남매로 태어났는데 다 죽고 끝에 남동생 하나만 생존해있다.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긴 나와 고향마을의 안타까운 현주소다.
■ 호기 어렸던 약관을 넘긴 나이
군대는 결혼하고 그 이듬해 1962년도에 경기도 연천으로 다녀왔다. 군대시절은 사격 실력이 특출 나서 큰 고생 없이 마칠 수 있었다. 1963년 한미 사격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최초로 한국에 금메달을 안겼다. 상패는 군단이나 사단으로 오게 돼 있어서 포천서 카퍼레이드도 받고 특식에 포상휴가까지... 젊은 날의 유쾌한 추억이다.
아내 박매월 여사와는 내 나이 23살, 아내 나이 20살에 동네분의 중신으로 만났다. 결혼하고 열흘 후에 처갓집 갈 때 안남 사진관에서 부부가 찍은 63년 전 사진이 안방 입구에서 늘 우리 부부를 바라본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는지 손으로 더듬어 볼 수도 없는 지난날들이다.
결혼하고 그 이듬해 군대를 가는 바람에 아내가 새댁 때 혼자서 시부모님 모시고 살림하느라 마음고생도 많았고 몸도 편할 날이 없었다. 어머님이 91세까지 장수하셔서 집안의 기쁨이기는 했지만 아내가 어머니 보살피느라 마음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나는 63년 째 해로하는 행운의 부부다.
내 나이에 아내와 같이 거동하면서 사는 이들이 거의 없는 것 보면 우리 부부가 특별한 축복을 받은 것은 틀림없다. 다 아내 덕분이다.
■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15년간 타관 생활로 살림을 불리다
군 제대 후에 집에서 농사를 짓다가 타관 생활을 15년 정도 하게 되었다. 농사만 짓는 것으로 여유롭게 살기는 부족한 것이 많아서 돈 좀 벌어보겠다는 생각으로 객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조선팔도 안 가본 곳이 없이 일하는 현장에서 젊음을 불살랐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가 산업화의 물결을 타면서 건설현장에서 일할 기회도 많았다. 기술 있고 몸만 부지런하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던 시절이다. 나는 발파기술을 갖고 있어서 경부고속도로 위에서, 석광산에서 땀 흘린 대가로 돈도 만져보던 시절이다. 돈은 아버님께 갖다드리고 땅도 조금씩 사면서 살림을 불려나갔다. 발파작업은 때론 목숨을 담보로 할 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젊은 날 두려울 것이 없고 도전하고 성취하는 기쁨에 무게중심을 더 두었던 때라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다.
막노동 하는 사람들 노임이 하루 290원 하던 시절에 우리 같은 발파기술자는 하루 2천300원~2천500원 사이를 벌었다. 일은 고단했지만 며칠만 수고하면 남들 한 달 일하는 수입을 벌 수 있어서 힘든 줄 모르고 땀 흘리던 시절이다. 지령, 가래골에 석광산이 있어서 돌 깨는 일, 비석 만드는 일등 가리지 않았다.
기술자라 하루 일하면 쌀 두서너 말 씩 나오는 건 예사였다. 농촌일 하면 닷새 일해야 쌀 한말 파는 정도의 품삯인데 우리는 하루만 벌어도 며칠 일한 몫을 버는 재미에 사방 다니면서 겁 없이 일을 했다. 옥천 사람이 강화도까지 가서 일을 했으니 조선팔도를 누비며 손품 발품을 아끼지 않았다.
■ 연대를 이루는 마을금고
마을금고도 운영했는데 기금을 마련해서 서로 어려울 때 돕고 돈 있는 자들은 돈도 불려나갔다. 없는 사람들은 남한테 손 벌려 돈 한 푼 빌리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라 마을금고가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당시만 해도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마을 어귀에서 눈물 찔찔 짜면서 학교에 가곤 했는데 육성회비 못 가져가는 아이들이었다. 어린마음에 애 타는 게 어떤 마음인지 진즉 알아버려 웃자란 아이들을 낳곤 했다. 그 부모들에게 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서러움을 서로 나누고 힘을 보태기도 했다.
기금은 통장을 만들어서 관리하고 정부에서 시행하던 사업이라 전국적으로 확산 되었는데 우리 마을이 운영을 잘해서 부자마을로 소문이 나기도 했다.
■ 잊혀져가는 소리들, 요령잡이
50대 돼서 요령잡이를 시작했다. 계원들이 돌아가면서 상여를 메고 요령도 나눠가면서 잡았다. ‘회심곡’의 구절을 상여 나갈 때 선창을 한다. ‘회심곡’은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가락인데 상여 나갈 때 선창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랏차 어호우북망산천 가는 길에 미련일랑 다 놓고 가소, 어허야 데헤야”내가 선창하고 상여꾼들이 후창을 했다. 가사는 꼭 정해진 것이 아니라서 망자에 따라 즉흥으로 지어 부르기도 했다.
상여는 어릴 때부터 많이 보아왔고 요령소리도 익숙해서 50이 넘어 요령을 잡을 때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먼 길 떠나보내는 그 자리에 앞장서서 산비탈을 오를 때 망자에 대한 애석한 마음, 아는 이와 이별하는 마음들이 중첩 되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긴 했다. 초상집에서 발인하는 날 아침부터 발원제를 올리고 산비탈을 상여 메고 20리길 올라가야 한다. 앞에는 국사봉, 뒤에는 절골로 오른다.
요령잡이도 관을 매장할 때 땅도 같이 파고 계원들이라 요령도 돌아가면서 잡았다.
내가 처음 요령을 잡아 길을 안내한 망자는 친구의 부친이었다. 혼자 계시다 돌아가신 분이라 염까지 직접 해드리고 먼 길을 배웅 했다. 아버님을 보내는 마음으로 동몽선습 계몽편에서 염하는 법을 배워서 직접 친구의 부친께 해드렸다.
청성면은 비탈길이 험해서 상여지고 올라가는 이들도, 망자를 따르는 가족들 그리고 요령 잡은 나도 떠나보내는 발걸음이 더 무겁고 더뎠다.
1년이면 네 분에서 다섯 분정도 이승을 떠나는 길에 동행이 되어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요령 잡아 보내드렸으니 내가 저승 가는 길을 안내한 분들만도 100여분이 훨씬 넘는다.
배곯아 죽은 분들, 고생만 하다 간 분들 등 일일이 사연을 알고 나면 망자에 대한 슬픔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냥 보내기 섭섭해서 다리 건널 때, 높은 산 비탈길 오를 때 노잣돈 봉투를 건넨다.
상여는 가다가 서기를 반복한다. 다리를 만나면 또 멈추고, 보내는 사람은 차마 못 보내, 떠나는 망자는 차마 못 떠나, 장지까지 그렇게 가다가 서면서 서로 이별의 시간을 가진다.
예나 지금이나 죽음의 강을 건너는 시각은 애통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김동익 박매월’ 문패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름으로 아름다운 세월의 흔적을 남긴 다정한 두 분. 집 앞 텃밭에서 고랑을 손보던 어머니는 낯선 이를 반기는 미소가 고우셨다. 초승달 같은 눈웃음으로 반겨주시는 어머니는 복사꽃처럼 예쁘셔서 스무 살의 어머니를 바로 그려낼 수 있었다. 동네에서 가장 연장자인 아버님과 어머니는 63년째 해로하고 계셨다. 적막강산 같은 마을에 두 분의 도란도란 말소리가 그나마 큰 위안이 되고 있었다.
■ 무심하지만 근심 없는 날들
나도 그 시간을 피할 수 없겠지만 어느 세월에 이 나이가 되었는지 종잡을 수 없다.
우스갯말로 세월이 70대는 70키로, 80대는 80키로로 간다더니 환갑 넘어서고 나니 여기까지 번개같이 달려왔다. 예전 같으면 제삿밥을 얻어먹어도 여러 번 먹었을 나이에 우리 부부가 거뜬히 거동할 수 있으니 좋은 세상 이라고 위로 해본다.
우리 4남매는 부모 속 안 썩이고 여유 있는 중년을 보내고 있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갈 때 마다 서로 달려와 병원을 데려가주니 병원에서 “올 때마다 자녀분들이 바뀌어요”라며 우리를 부러워한다.
자식 자랑 팔불출이라지만 기특한 자식 자랑하는 게 뭐 흉이 될까. 큰 애가 대우통신 다니며 외국지사 나가있을 때 환갑이었는데 소 한 마리 잡아서 푸짐하게 환갑을 했다. 종말이 학교 동아리 학생들이 풍물놀이도 하면서 한껏 흥을 돋우었다. 손 한 마리 값으로 손님들도 부족하지 않게 대접했다. 말 그대로 잔칫날이었다.
4남매는 공무원인 딸, 대학교수인 아들, 사업하는 아들 등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잘 살고 있는 자녀들이 든든하고 고맙다. 배불리 먹이지는 못했지만 공부 시키는 건 시골 사람으로는 여건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 자식농사도 흡족했다.
65살 늦은 나이에 면허를 따고 운전을 했지만 몇 년 전에 면허를 반납하고 버스를 이용한다. 이발하러 나갈 때 마을회관 앞에서 옥천버스를 타고 나간다. 기동력은 떨어지지만 나도 편하고 자식들도 내가 운전하는 걱정을 안 하니 잘 한 선택이다. 지금 나의 일상이 운전대를 놓고 버스를 기다리는 시골 할아버지처럼 안전하고 근심이 없다.
치열하게 살던 날, 무심한 날, 옳다 그르다 평할 수 없다. 근심 없이 살다가 그리운 이들을 만나는 날이 온다면 웃으면서 먼 여행을 갈 수 있는 마음자리도 만들었다.
푸르른 신록이 지쳐 단풍 드는 길목을 여든 여섯 해 동안 지켰다. 얼마나 더 많은 날들이 나에게 남았는지 알 수 없으나 박매월 여사와 손잡고 가는 길은 그저 근심이 없다.
고마운 사람! 내 인생의 무탈함은 당신 덕분이오! 꽉 채운 지난 날들이 근심 없는 하루를 낳았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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