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분당 메모리얼파크(납곱당)에 다녀왔습니다. 덩그러니 있는 아버지 사진 옆에 두 분이 활짝 웃는 사진을 하나 더 붙였습니다. 쌓인 눈을 치우고 조촐하게 제사상을 차려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한 열흘 많이 추웠습니다. 그럴 때마다 두 분이 얼마나 추울까? 걱정됐지만 그래도 함께 계시니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자식 넷을 두었는데 어느 자식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둘은 부모님과 소원하게 지냈고, 하나는 아예 부모형제를 등진 채 살아왔지요. '쟤는 도대체 왜 우는 걸까?'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우는 녀석이 의아스러웠습니다. 생전에는 매일같이 부모님을 힘들게 하고, 외면하더니 돌아가신 다음에 우는 게 아주 낯설었습니다.

 

11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똑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쟤는 왜 우는 걸까?' 12년 전 제주공항에 내린 아버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비쩍 마르고 몸마저 작아져서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의지해서 나왔으니까요. 그때 차 안에서 아버지의 끌탕하던 일이 생생합니다.

 

"너랑 막내가 주는 돈으로 둘이 먹고는 사는데 OO이가 두세 번 보내고 그만이라 많이 힘들어. 여기저기 경조사비도 내야하고, 병원비도 나가는데 턱없이 부족해."

 

중학생 때부터 공부를 놔버린 녀석은 안양에서 진학할 고등학교가 없어서 수원의 외진 곳에 있는 고등학교로 통학을 했습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때부터 술담배를 가까이 하고, 당구장이나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렇게 빌빌 거리는 녀석을 아버지가 이발소에 데려다 놓고,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군대 가면 고생할 테니 이발기술이라도 배워서 가라고. 덕분에 녀석은 최전방부대로 자대배치를 받고도 장교들 머리를 잘라주면서 편하게 지냈습니다.

 

제대해서도 아버지랑 같이 일을 했는데 아침 일찍 아버지가 문 여는 걸 알면서도 늘 늦게 나왔습니다, 아침 10시가 넘어도 출근하지 않아서 전화를 하면 툴툴대면서 나오고, 이발소에서 나온 수건을 어머니가 다 빨아서 개켜나가도 고마운 줄을 몰랐습니다. 10시나 11시에 나오면 아버지는 그제야 아침식사를 했지요.

 

이른 시간에 이발소의 셔터를 올리다가 아버지가 며칠씩 담으로 고생을 해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서도 그런 습관을 바꾸지 않아서 부모님과 형제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나랑 막내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습니다. 이발소가 사양길이고, 아버지 연세도 있으니 삼형제가 매달 부모님께 50만 원씩 드려서 편히 사시게 하자고. '얘가 웬 일이지?'하면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녀석이 이발소의 보증금을 빼가지고, 사라졌습니다. 아버지는 평생을 일한 일터를 빼앗기고 망연자실했습니다. 아버지를 제주로 모신 이후에 보증금을 자신이 보태서 가져간 것뿐이라고 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말하지 않았을 아버지가 아니니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그 녀석이 물었습니다. 앞으로 제사는 어떻게 할 거냐고. 당연히 내가 모신다고 했더니 제주항공권이 비싸고 명절 때는 구하기도 힘드니까 아버지 기일은 제주에서 모시고, 설과 추석에는 자신과 막내 집에서 모시자고 했지요.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서는 제 처를 앞세워서 제사는 옮기면서 모시는 게 아니다. 제주에서 제사를 다 모시고,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는 황당한 주장을 했지요.

 

제주에서 육지로 돌아왔습니다. 그 녀석은 두어 번 제사에 참석한 다음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니?",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알 것 아니냐?"고 해도, 제 아들이 입대하기 전에도 "큰아버지로서 밥을 한 끼 사겠다."고 연락해도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이렇듯 파렴치한으로 지내면서 울기는 왜 우는 걸까요

 

편집 : 오성근 객원편집위원

오성근 객원편집위원  babsangman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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