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손도손 사랑방] 김선태 주주통신원

베이비부머 세대란 1955년~1963년에 태어난 세대이다. 1964년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아서 담임을 하였던 2학년 아이들. 그러니까 이들은 1956년생 이어서 전형적인 베이비부머 세대인 셈이다. 이 제자들을 맡아서 담임을 하던 시절의 나는 아직 햇병아리 교사이어서 여러 가지로 모자람이 많았었다.

그날의 이야기를 써둔 것을 잠시 보자. 얼마나 고달픈 세월이었던가 생각해 보기 위해서.

-------------------------------------------------------------------------------------------------------교실이 부족하여 1,2,3학년은 2부제 수업을 해야 했었지 않니. 오전 11시쯤이나 되어서 오전반이 끝나는 시간이 거의 되면 학교를 향하여 출발을 하여야 하는데 이게 문제였지. 바쁜 농사철이 되면 부모님은 새벽같이 논밭으로 일하러 나가시고 너희들만 남아있는데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거든. 어떤 때는 친구들과 놀다가 그만 시간이 늦어져 버리기도 하고,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시간을 짐작 할 수가 없어서 준비를 하고 학교에 가보면 아직 두 시간도 끝나지 않아서 갈 곳이 없어서 좁은 복도에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었지.

그래서 내가 맡은 2학년 1반은 오후반이 되면 아예 아침부터 학교에 나오게 했었지. 날씨만 좋으면 학교 옆에 아직 팔목만큼 밖에 안 되지만 느티나무가 심어진 작은 정자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서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시간을 보냈단다.

논둑에 흩어져 있는 풀들을 모아서 이름을 맞춰 보기도 하고 풀꽃을 모아서 예쁜 꽃다발을 만드는 놀이도 재미있었지. 담임인 나는 그렇게 해서 너희들이 학교에 늦지 않고, 공부에 재미를 붙이며 별로 할 일이 없는 오전 시간을 즐거운 시간으로 보낼 수 있게 만들어 주려고 했었지. 너희들은 날마다 매미소리를 들으면서 정자나무 그늘에서 노래를 불렀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면서 직접 관찰하고, 만지면서 공부하는 것이 한없이 즐겁고 신나는 것 같았단다.

그러나 오전부터 학교에 와서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수업이 끝나는 너희들이 배가 고파서 견디기가 어려워하더구나. 더구나 이 무렵에는 너무 가난해서 끼니에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만큼 많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니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 너희들을 오후 4, 5시까지 붙들고 있다는 것이 너무 힘들어 보이더구나.

나는 너희들에게 점심을 싸 가지고 학교에 오도록 했었지. 어떻게든 배고파하는 너희들에게 밥을 먹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지. 그 때 만약 요즘처럼 학교에서 급식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니. 적어도 점심을 굶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튿날 너희들은 정말 난생 처음으로 학교에 도시락을 싸들고 나온 것이지. 처음 싸 가지고 온 도시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어서 점심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너희들이었단다. 도시락이 준비되었으니, 오늘은 안심을 하고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었지. 교촌 마을 앞에 있는 저수지 둑을 지나 무넘이 턱에서 작은 칠판을 기대놓고 산수공부를 하였지. 공부 하다가 작은 도마뱀이 나와서 여자아이들은 소리를 지르고 달아나고, 남자아이 중에 누군가가 잡아 가지고 흔들어 대고 한바탕 소란이 일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너희들은 열심히 공부를 해주었지.

해가 점점 높아지면서 땡볕이 쬐어서 다시 자리를 옮겨 산으로 갔었지. 마을 뒷산이라지만 같은 반의 여자 친구의 집 뒤란이나 다름없는 가까운 곳이었지만, 산으로 간 너희들은 나무그늘에서 노래도 하고 가져간 조그만 소칠판을 앞에 두고 재미나게 공부를 했었단다.

개미들이 다리를 타고 올라오기도 하고, 나뭇가지에서 매미들이 노래를 해서 잽싼 아이가 나무로 올라가 매미를 잡겠다고 소란이 일기도 하였지만, 너희들은 참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아무리 시골의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선생님과 아이들이 모두 함께 올라간 뒷산은 그것이 그냥 소풍날이었단다.

점심을 먹는 시간이 되자 너희들은 제각기 도시락을 펼치면서 점심을 먹으려고 준비들을 하는데, 여자아이들은 도시락을 감추기도 하고 짓궂게 남의 도시락을 펼쳐 보려고 덤비는 아이들도 있었지.

“자! 준비되었지요. 점심 맛있게 먹으세요. 급히 먹지 말고.”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너희들은 도시락에 고개를 쳐 박고 정신없이 밥을 퍼 넣기 시작하였단다. 나는 너희들이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한 번 죽 살펴보기로 하였지. 그런데 이게 웬일이니?

너희들의 도시락은 거의 대부분이 까만 밥이더구나. 요즘에 유행하는 까만 쌀밥이었느냐고 하겠지? 천만의 말씀이지. 너무나 가난한 너희들은 도시락을 싸올 형편이 아니었던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지. 그러나 담임선생님이 싸 오라고 한다니 안 싸 줄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집에서 먹는 대로 밥을 싸준 것이었지.

너희 고장은 바다에서 약 4km 떨어져 있는 바닷가의 산골 마을이 아니었니. 한 집의 식구 수는 평균 6명이 넘었지만, 농토는 900평도 채 안되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단다. 그래서 너희들의 집은 봄철만 되면 식량이 떨어져서 밥을 굶기를 먹기보다 더 많이 하였지.

마을 어른들은 굶주리는 너희들을 위해서라도 무엇인가 끼니에 먹을 것을 마련해야 하였지. 그래서 해창만-지금은 간척지가 되었지만-의 바닷가에 나가서 해초를 따다가 말려 놓고, 끼니가 되면 그 해초에 맷돌에 간 보리쌀을 몇 줌 집어넣어서 멀건 죽을 쑤어서 먹는 것이었단다. 이 봄철에 쌀을 몇 톨이라도 먹는 집은 부잣집 몇 집을 빼어 놓고서는 찾아 볼 수가 없었지.

너희 고장에는 해초 중에서 색깔이 까맣고 울퉁불퉁한 망울이 달린 톳이라는 해초가 흔했지. 이 톳에 곡식을 조금 넣어서 끼니를 때우는 형편이었단다. 그런데 도시락을 싸오라고 하니까 그냥 그것을 한 도시락 싸들고 온 아이가 대부분이더구나. 그러니까 한 도시락을 모두 뒤져 보았자 곡식이라고는 보리쌀 몇 톨이 전부이고 모두 까만 톳이 전부이었으니 도시락은 까만색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까만 도시락?”

나는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단다. 날마다 이렇게 산으로 들로 끌고 다니는 것도 이 아이들에게는 힘드는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 끼니도 먹지 못한 너희들을 너무 심하게 끌고 다니지 않았는가 하고 스스로 반성을 해보는 것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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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난하였던 아이들은 대부분이 중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광주로 도시로들 떠났다. 이중에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제자 DR양도 마찬가지였다. 동네에서 살다가 서울로 가서 살고 있는 동네 아저씨가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서울로 데리고 가서 취직을 시켜 주었다.

DR양도 아저씨를 따라 서울의 어느 집에 애보기로 들어갔다. 물론 월급 같은 것은 없고, 밥만 먹여주고 2년 후부터 월급을 조금씩 주기로 약속을 해주셨다. 초등학교를 졸업을 하였지만 못 먹고 자란 아이는 키가 크지 않아서 서울 아이들 같으면 이제 4학년 정도 밖에 안 되는 체구이었지만, 아이를 들쳐 업고 집안일도 거들면서 잘 적응을 하였다.

그럴 밖에 없는 것이 이 서울 바닥에 아는 사람도 없고 혼자서 집엘 가라고 하여도 찾아갈 줄을 모르는 순 촌뜨기인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우선 배가 고프지 않으니 그것만도 감사하고 행복하였던 것이었다.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아버지의 새경으로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삼남매나 되는 식구들이 먹고 살기에 너무 힘이 들어서 굶기를 밥먹듯 해오던 DR양에게는 매끼 밥을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충분히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아니 마냥 행복한 것이었다.

김선태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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