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통신원] 오성근 주주통신원

나는 살림하는 남자(主夫)입니다. 사회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어쩌다 살림을 하게 됐어?”하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먼저 한 소년의 이야길 해볼까 합니다.

부부가 걸어갑니다. 극장에 가는 길입니다. 아버지는 저만치 앞서가고, 엄마는 뒤에서 쫓아갑니다. 여동생은 포대기로 업은 채 소년의 손을 잡아끕니다. 소년의 눈에는 그 모습이 이상했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소년은 아내의 손을 잡고 다닙니다. 아이가 생기고는 셋이서 손을 잡고 다닙니다.

“숙아. 오빠, 라면 좀 끓여줘라.” 중학교에 다녀온 소년이 배고프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여동생한테 시킵니다. 동생이 끓여준 라면을 먹으면서 이상했습니다. ‘쟤도 새벽에 일어나 학교에 다녀와서 똑같이 힘들고, 배고플 텐데 왜 내게 라면을 끓여줘야 하지?’ 그 생각을 한 뒤로 소년은 동생의 라면을 받아먹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시장엘 갑니다. 십리 쯤 걸어가는데 올 때는 빈 몸이 아닙니다. 머리에 배추를 이고, 양손에도 짐을 들고 옵니다. 소년이 안쓰러워서 말합니다. “올 때만이라도 버스를 타고 오세요.” 어머니가 웃으면서 짐이 많으면 버스기사가 태워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년은 그 말이 곧이곧대로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짐을 나눠들기 위해서 시장엘 다녔습니다.

조금 불편해져도 옳지 않다고 여기는 건 스스로 고치고, 또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소년이 누구인지 눈치 채셨지요? 살림을 도맡은 직접적인 계기는 아내의 부탁이었지만 이미 그런 싹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부부는 결혼 전에 부부와 부모 됨에 대한 공부를 1년 가까이 했습니다. 그때 많은 것을 배웠고, 그만큼의 약속을 했지요. 부부는 동격(同格)이니까 존대를 합니다. 크고 작은 일을 떠나서 서로의 의견을 조율합니다. 수면습관상 아침밥은 내가 할 테니 저녁밥은 당신이 하세요. 육아는 부모의 몫이고, 당신(아내)이 여의치 않다면 내가 그 일을 담당하겠습니다. 시가와 처가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등등.

오랫동안 돌봄 노동에 종사한 사람의 얘기라고는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가올 세상에 대한 전망이 밝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동의한 줄 알았던 아내가 결혼생활 3년을 넘기면서 ‘여자의 몸으로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다’는 데야 반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술과 담배를 끊고, 최상의 몸을 만들기 위해서 틈나는 대로 관악산을 오르내리고, 서울대공원을 산책했습니다.

결혼생활 6년 만에 아이를 얻었습니다. 그때 만삭이었던 아내가 출산 뒤에도 회사에 다니고 싶다 했지요. 나더러 회사를 그만 두라고? 내가 아이를 잘 돌볼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지만 아내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일하는 사람을 주저앉히는 건 옳지 않았고, 잘 보필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아내의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입니다.

밥 짓고, 빨래하며 청소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늘 하던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온종일 먹고 자고 싸는 젖먹이랑 집 안에서만 지내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기저귀를 삶으면서 혼자 운적도 여러 번입니다. 소중한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바깥으로 싸돌아다니는 수컷의 생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가에서는 당신 딸 데려다가 놀고먹는 파렴치한 취급을 하고, 부모님은 당신의 맏아들이 집에서 애나 본다면서 상심하시고. ‘아이가 나로부터 분리될 때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에서 자유롭지 못했지요.

또 다향(茶香)이를 다른 아이들과 놀게 하고 싶지만 이웃아주머니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팍팍한 그즈음에 ‘쓰레기 반으로 줄이기’ 수기공모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몇몇 아주머니들로부터 육아모임을 제안 받았습니다. 처음으로 응원세력이 생긴 것입니다.

잠만 자던 아이가 눈을 맞추고, 웃어주고, 몸을 뒤집고, 배밀이를 하고, 기어 다니고, 손으로 벽을 짚고 일어섰다가 넘어져서 자지러지게 울고, 또 빙긋이 웃어주고, 목욕을 시킬 때면 물장구를 쳐서 물바다로 만들고. 이런 것 하나하나가 얼마나 예쁘고, 소중한 추억인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다향이가 처음으로 “아빠”하고 불러주었을 때입니다. 그때의 가슴 설렘은 영원히 잊지 못하겠지만 아내에게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아빠’하는 걸 보고 퇴근할 때마다 “내가 엄마야, 엄마 해봐.”하고 가르쳤지만 엄마란 말은 맘마, 어부바 다음에 네 번째로 나왔거든요.

“육아의 원칙이 있나요?” 물론 있습니다. 아이가 실컷 자고, 놀며 먹도록 배려하는 게 바로 그것이지요. 아이가 열일곱 살이 되도록 깨워본 적이 없습니다. 아기 때 잠이 들면 아예 전화기코드를 뽑아놔서 욕을 먹은 적도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현관문을 가리킬 때 거절한 적도 없습니다. 비바람이 불거나 추울 때는 집 안에서 놀자고 얘기하지만 도리질 치면 잠깐이라도 콧구멍에 바람을 쐬어줬습니다.

서울대공원, 놀이공원, 미술관도 제집처럼 드나들어서 직원들이 먼저 알아볼 정도였지요. 다향이가 서너 살 무렵에 큰 식당 안에서 “와! 내가 좋아하는 하얀 밥이다”하고 소리쳐도 민망했던 적이 있습니다. 늘 현미에 혼합잡곡을 반씩 섞어서 지은 밥을 먹다가 이밥을 보니 반가웠던 모양입니다. 그것만이 아니지요. 다향이는 세 돌이 되기 전에는 가공식품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유식과 간식 모두 친환경농수산물로 만들어먹였고, 음료는 철마다 담근 효소로 대신했으니까요. 매일같이 에너지가 차고 넘치는 아이는 그것을 충분히 사용해야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잡니다.

같은 주부라도 남자이기에 이웃과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연히 혹한기나 삼복더위에는 아이랑 지내기에 한계가 있지요. 다향이가 세 번째 맞이하는 겨울에 이웃의 아주머니가 영유아수영반을 소개합니다. 그 말을 듣고 한 달음에 달려갔지요. 그런데 수영반 명칭이 ‘엄마랑 아가랑’반입니다.

어렵게 등록을 하고, 첫 강습 때 다향이랑 수영장엘 들어갔는데 작은 고무재질의 풀에 따뜻한 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수영복차림의 엄마랑 아이들이 앉아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야 할까요? 밖에 서 있어야 할까요? 어차피 눈에 띄는 건 마찬가지인데. 아이를 돌보면서 가장 숨 막히는 순간이었지만 두 눈을 질끈 감고 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다향이는 수영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향이가 일곱 살 때 분당의 율동공원 앞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쾌적한 자연환경이 마음에 들었지만 말로만 듣던 사교육을 보면서 고민이 됐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논의 끝에 제주도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작은 학교에서 다향이는 말처럼 자유롭게 뛰어놀았습니다. 말도 타고, 여름 내내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지냈지요.

그렇게 3학기를 다닌 다향이가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불필요한 제재가 많고, 재미없다는 게 이유였는데 같은 고민을 하던 터라 다향이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홈스쿨링을 시작했습니다. 서로가 하고 싶은 것을 조율해서 13살까지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한 달 일정의 배낭여행도 두 차례나 했습니다.

열세 살이 되는 다향이를 보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아빠가 줄 수 있는 건 바닥이 났고, 제주의 외진 곳에서는 또래집단을 만들어줄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쳤지요. 거의 매일 서너 달 동안의 논의를 통해서 내린 결론이 변산공동체학교에서 한 달만 지내보기였습니다. 겪어본 뒤에 다닐만하면 다니고, 영 아니라고 생각되면 그만두라고 했지요.

그 학교는 우리부부가 신뢰하는 학교였고, 다향이도 어릴 때부터 들락날락한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학식을 마치고 헤어질 때 다향이도 나도 목 놓아 울고 말았습니다. 태어나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지요. 입학식만 그런 게 아니라 매일저녁 집으로 전화를 하는 다향이랑 둘이서 참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과연 우리의 판단이 옳은 것인지?’, ‘혹시 다향이가 이 일로 인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는 건 아닌지?’ 약속한 한 달이 되는 날, 변산공동체학교로 다향이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더 다녀보겠다고 하더군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다향이는 그곳의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지난해에는 변산공동체학생들에게 차와 커피를 가르치면서 지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풍물패에 가입해서 장구도 배웠습니다. 아기자기한 변산이 마음에 들고, 아이들과 오랫동안 지내고 싶었지요.

그런데 계속해서 서울로 돌아가기를 원하던 아내의 서울발령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다향이도 고등과정은 서울에서 공부해보고 싶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 두 사람의 의견을 존중해서 지난 12월에 서울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변산면에서 정든 분들이 많이 섭섭해 합니다. 하지만 “아빠, 나 시골에 너무 오래 사는 것 같지 않아?”, “난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농사짓고 살 마음이 없으니까 고등과정까지 다니는 건 시간낭비인 것 같아. 다른 길을 찾아보고 싶어.”하는 데야 별 도리가 없지요.

이제 기초는 충분히 다졌으니 시야를 확장하고, 문화의 다양성을 깨우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서울 서촌에 집을 얻었습니다. 늘 다향이한테 말합니다. 네가 스무 살 쯤에는 정말 원하는 일을 찾아서 독립하면 좋겠다고. 그때까지가 부모로서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향이의 독립이후, 아내와의 삶에 대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법 괜찮은 아빠, 쓸 만한 남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 또한 저절로 얻어진 건 아닙니다. 비단 결혼 전의 준비만이 아니라 그 후에도 ‘딸 사랑 아버지모임’,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 ‘동화 읽는 어른 모임’등을 통해서 꾸준히 공부하고 노력한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는 더 늦기 전에 나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의 첫 번째가 글쓰기입니다. 두 번째는 차 또는 커피를 내리면서 외롭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그들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졸저 ‘매일 아침 밥상 차리는 남자’, ‘Hello! 아빠육아’

‘평등부부상’(여성신문사)과 ‘성 평등 디딤돌 상’(제주여민회)수상.

제1회 제주커피축제 준비위원장.

 

오성근  babsangm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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