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강윤 주주통신원

그저께, 택시를 세워놓고 이 스마트폰으로 글을 썼다. 등록을 하려는 순간 배터리가 나가면서 글이 몽땅 지워졌다. 몇 시간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었다. 정말 머리가 멍했다. 이거, 해 말어! 다시 쓸 생각을 하니까 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한겨레'가 글쓰기 소질이 없는 나를 주주 통신원으로 선발해준 것에 대한 성의를 보여야한다는 책임감, 또 열심히 글 쓰시는 통신원들께 죄송한 마음에, 강일동 아파트 신축공사장 앞 차안에서 점심을 전병으로 때우며 이 글을 씁니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채…

오늘 근무 실적은 영 불성실한 날입니다.^^

지난 일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김포 공항에 있는 한 영화관을 찾았다. 주제곡 렛 잇 고(let it go)로 더 유명해진 <겨울 왕국>을 목동에서 본지 1년만이다. 요즘 흥행하는 <국제시장>과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놓고 고민하다 <님아, ...>로 정한 터였다. 밤이 늦은 시간이라 극장 안은 한산했다.

99세 조병만 할아버지와 90세 강계열 할머니 노부부의 삶과 사랑을 그린, 설정과는 거리가 먼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다. 천애 고아인 조병만 할아버지는 강계열 할머니가 14살 되던 해 할머니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6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해주고 할머니와 결혼을 하게 되셨단다. 겉보리 서 말이면 처가살이 안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자녀를 모두 열두 명을 낳았는데 여섯 명을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늘 가슴 아파하셨다.

결혼한 지 76년, 너무 가난해서 옷을 제대로 못해 입은 것이 한이 되어 명절 때 자녀들한테 한복을 색깔별로 선물 받아 부부가 항상 똑같이 입고 다니신다.

서로 존댓말을 쓰고 횡성 5일장이나 노인복지대학에 노래 배우러 다닐 때도 언제나 다정하게 할머니 손을 꼬옥 잡고 다니실 정도로 금슬이 좋으시다. 못 배우고 가진 것이 없어도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노부부의 정감이 잔잔한 감동으로 밀려온다. 이것을 눈여겨본 사람에 의해 TV 5부작 <인간극장>에 출연하게 되면서 영화까지 제작되었다고 한다.

꽃피는 봄이 오면 할머니랑 뒷동산에 올라 참꽃(진달래)도 땄다. 장난기가 많은 할아버지는 물장난도 치고 한겨울 눈이 내리면 동심으로 돌아가 눈싸움도 했다. 못생긴 눈사람도 신랑, 색시 둘씩이나 만들었다. 눈사람이 녹는 속도만큼 이별이 다가오는 것을 할아버지는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정겨운 산골마을 풍경은 버들피리 꺾어 불고 동무들과 멱 감던 내 어릴 적 고향산천과 겹친다. 할아버지 생신 날 자녀들과 손주들이 축하케이크를 사들고 찾아와 한상 푸짐하게 차려드렸다.

식사가 끝나고 큰 딸이 부모님 부양문제로 오빠와 싸움이 났다. 핵가족화 시대에 어느 집이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두 어르신이 눈물을 훔치신다. 관객들은 사실적이어서 흥미를 느낄지 모르지만 자녀들 관계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이 분들이 사는 곳이 한우와 더덕으로 유명한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고시리 청뚜루 마을, 아버지의 고향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영화를 보고 난 후였다. 어쩐지 영서지방 특유의 사투리가 어디서 많이 듣던 것 같았다.

횡성댐 상류이자 태기산(해발 1,261m) 자락 배산임수, 그야말로 물 맑고 인심 좋은 고장이다. 고향친구의 아내가 몇 년 전부터 횡성 노인복지대학에서 이 어르신들께 노래를 가르쳐 드렸다고 하니 이 영화와 나는 운명적 만남이 아닌가 싶다.ㅋㅋ

2013년 12월,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이승에서 이별했다. "곧 따라 갈 테니 꼭 마중나와 달라"며 눈밭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우시는 대목에서 가슴이 먹먹해 진다. 할아버지가 떠나가시던 날 때마침 흰 눈이 하늘에서 펑펑 내렸다. 할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온 세상을 하얀 눈으로 포근하게 덮어 주었다.

어찌 가공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에 비교될까 보냐.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 까지 백년해로 맹세해 놓고 이런저런 이유로 헤어지는 세태에 큰 울림을 주는 것 같다.

영화개봉 이후 청일면 고시리 청뚜루 마을에 남녀노소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지금 할머니는 집을 떠나 피신해 계신단다. 조병만 강계열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나도 나이 들어 가면서 지고지순한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은 희망을 던져본다.

그나저나 그곳에 자꾸들 찾아가면 할머니가 돌아오지 못하실 수도 있겠다. 나도 한번 찾아가 볼까요 말까요. ^^

"행복이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완성 되어가는 과정" 이라고 함.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ogers)

 

이강윤  mindl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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