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차 아시아 미래포럼 참관기 (5)

국가가 가진 모든 자산은 근본적으로 국민의 것이다.

정의로운 국가와 기본소득제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한국어 사전에서 ‘정의’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라고 표현되어 있다. 마이클 샌델은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동체의 정의란 확고한 개념이 아니라 구성원에게 좋은 어떤 것을 찾기 위한 노력 그 자체”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했을 뿐 ‘이것이 정의이다’라고 한마디로 요약하지 못했다. 즉 '이것이 올바르고 좋은 것이다'라고 결정된 것이 아니라 그 좋음을 찾아가는 과정이 ‘정의’ 라는 뜻이다. 기본소득제는 정의롭지 못하다 고 주장하고 있는 양재진 교수의 정의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양교수의 발제문을 쉽게 풀이해보면 “어떤 이는 일해서 돈 버는데 또 다른 누군가가 놀면서 국가로부터 돈을 받으면 정의롭지 못하다”라는 것이다. 그것을 “여가까지 기본권에 넣을 수는 없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이 여가를 누릴 가치가 있다고 보고 나무 그늘에 앉아 기타를 두들기는 베짱이는 남의 덕에 놀고먹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혹시 평등권의 개념을 정의라는 개념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가가 부유해졌다면 국민들도 부유해져야 한다. 국가가 먹고 살만해 졌으면 국민들도 또한 그래야 한다. 그것이 정의로운 국가이다. 국가는 부유하고 풍요로운데 국민들은 거리에서 노숙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국가가 아니다. 노숙하는 책임을 온전히 그 당사자에게만 지우는 것 역시 정의로운 국가가 아니다. 한 때 세계 경제를 호령했으나 이제는 아시아의 골목대장쯤으로 전락한 일본이 앞으로도 정의로운 국가가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한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는 국가는 부자인데 국민은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국민들을 무마시키고 있는 힘은 고령화 시대에서 노인복지에 힘을 쓰기 때문이다. 그 복종심 강한 신민들이 아직은 일본 사회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명동의 땅값이 천문학적인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올리는데 온 생애를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6,70년대 가발공장의 여공들과 명동의 땅값이 필연적인 상관관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정의로운 국가로 일어서는 길이다. 삼성의 가치는 이씨 일문이 일구어낸 가치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같이 일으켜 세우려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이다. 삼성이 그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 서울 명동의 밤거리 - 한국관광공사 제공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옛날 세운상가의 한 귀퉁이에서, 세련되고 기능이 더 좋을 뿐 아니라 가격까지 싼 일제 소니 디지털 카메라와 디자인이 조악하고 비싸기까지 한 삼성 디지털 카메라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쓴 맛을 다시며 결국 삼성 제품을 들고 나왔을까 ….. 잘 좀 만들어라 쫌!!!….. 삼성의 성공은 그런 국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렇게 만들어 준 국민들에게 돌려줄 차례가 아닌가. 정부와 손을 잡고 국민들에게 돌려줄 소득에 대해 고민해야 할 그들이 오히려 부패한 세력과 야합하여 국민들을 속이고 탄압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삼성이 아니라, 이씨 일가들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 가발 수출업체였던 YH무역에서 작업중인 노동자-인터넷 블로그

기본소득제는 정의롭다.

다시 양재진 교수에게로 가보자. 그가 말하는 정의는 다분히 계산기에만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 ㄱ과ㄴ 두 사람이 있는데 ㄱ이 일해서 얻은 소득을 일하지 않은 ㄴ과 나눈다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것이다. 단순 논리는 맞아 보인다. 그러나 만약 ㄴ이 원해서가 아니라 일할 수 있는 여건과 능력이 안돼서 그런 것이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장애인이라든가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했다든가 혹은 그동안 사느라고 힘들어서 아무 이유 없이 몇 년 놀고 싶다면 ? 더 나아가 ㄱ이 “나는 내 노동력의 대가를 ㄴ과 나누고 싶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또한 그러한 사회적합의의 분위기가 대세를 이룬다면 어떨까? 그때에도 양교수의 정의론이 유효할까?

ㄱ군과 ㄴ군이 서로 다수를 이루고 사회의 다양성만큼이나 수많은 인문학적 이유들이 공동체내에 존재하기 때문에 양교수의 단순 논리는 위험하다. 베짱이들은 국가로부터 자산을 분배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일까? 혹은 양교수의 말대로 강화된 복지혜택을 통해서 도움을 받으면 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복지혜택 개념과 기본소득제의 엄청난 차이점을 간과하면 안된다.

기본소득 국제네트워크 공동대표인 가이 스탠딩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지대 자본주의는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로 전환되는 국면에서 번성하고 있다. 자유주의 시장의 장려를 명목으로 정부와 국제기구는 재화와 용역의 생산보다, 소득 중 임대료 지출 비중을 점점 늘리고, 부동산과 같은 자산 보유의 희소성을 인위적으로 높인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결과 초래된 불평등은 승자의 재능이나 능력의 향상이 아닌, 규칙 변경으로 인한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모두 타당하지 못하다.(정의롭지 않다)”

또한 그는 세계 경제 정의 실천의 심각한 위기로 다음 세가지를 들고 있다.

 

1.세계 지적 재산권 체제의 구축-이웃나라 거지 만들기

2.외국자본 유치를 위한 역진적 보조금 제공

3.전 세계적으로 노동에 대한 소득 분배의 감소

 

▲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WIPO (세계지적재산권 본부)-WIPO Home page

 

    한 마디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정당한 몫을 찾아가지 못하고 공동체가 같이 일군 결실을 지대 자본주의자(부동산 소유자)들이 독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체제가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고, 컬럼비아대 장하진 교수의 주장처럼, 먼저 부유한 곳에 올라가서 다른 사람들이 따라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제는 그런 경제불평등에 대한 최소한의 구성원으로서의 분배 권리일 뿐, 그 자체 역시 완벽한 경제 정의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본소득제에 대한 것 마저 양재진 교수는 정의롭지 못하다고 했으니 그의 정의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궁금하다. 더군다나 그가 진보 진영의 학자로 거명되고 있다 하니….(계속)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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