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손도손 사랑방] 김선태 주주통신원

1967년 6학년을 담임하면서 맡았던 아이의 이야기다. 이 아이 역시 대표적인 베이비붐 세대다. 내가 초임지에서 2년간 근무를 하고 이 학교로 전근을 와서 첫 번째 담임을 했을 때 5학년을 맡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6학년 담임을 계속하라고 배정을 받아서 5, 6학년 담임을 연거푸 맡게 됐다.

이때 한 반의 인원이 58명이었으니 요즘 같으면 3개 반이 되는 셈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나서 시험을 치러서 중학교에 입학하던 시절이어서 중학입학시험 준비를 위한 과외가 아주 심했고, 서울에서는 가정교사나 교사들이 집에서 과외지도를 하면 학교에서 받은 봉급은 술값으로 쓰고 과외비로 살림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당시 서울에서 6학년 담임을 하고서 1년에 집 한 채를 못 사면 바보라고 하기도 했단다. 그런 시절에 나는 내 부모가 계시는 고향 학교 아이들을 담임하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없었지만, 시골이라서 돈을 주고받을 줄도 모르고 살았다. 다만 6학년 담임을 했으니,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는 해야 하는데,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산간벽지 마을에서 밤늦게까지 지도한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학교에서 3, 4km 나 되는 집에 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학교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합숙을 하면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나는 아이들과 약속을 했기에 저녁에 교실에서 잘 준비를 해서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꼬박 200일 동안 교실에서 저녁 11시까지 공부를 시키고, 잠시 잠을 재웠다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운동장을 돌고 세수를 하고 와서, 다시 교실에서 한 시간 공부를 한 다음에 집으로 보냈다. 아침을 먹고 점심과 저녁 먹을 도시락 두 개를 싸서 학교에 오는 것이었다. 3주 정도가 지나자 코피가 터지는데 펑펑 쏟아지는 코피가 도저히 멎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한동안 누워서 진정하고 나서야 저녁 수업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가르쳤지만, 지금 이야기하려는 YH란 아이는 중학교에 보낼 형편도 못 되고 공부도 못하니까 저녁 시간에 와서 공부하는 데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하긴 5학년 담임을 해서 첫 시간에 죽 한 번 책을 읽혀 보는데 전혀 글자를 모르는 아이였으니 중학교 공부는 생각지도 못할 처지이긴 했다. 어쨌든 글자를 익히지 못하고 졸업장을 받아든 아이는 집에서 나무나 하러 다니고 멀리 도시로 나갈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동네에서 이것저것 농사일도 돕고 다니면서 품팔이도 하고 지내다가, 친구들과 어울리곤 했다. 그럴 무렵에 이 곳 읍내장터에서 소장수가 소를 팔아서 돈을 가지고 고개를 넘다가 돈을 강탈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런데 어둑해서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있었다는 단서 밖에 없었다. 이에 경찰은 동네에서 스포츠머리를 하고 다니는 젊은이들을 무차별로 붙잡아다가 심문을 했다.

이 때 YH도 끌려가서 심문을 받는데 난생 처음 경찰서로 끌려간 이 아이는 무서워서 경찰이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을 하는 것은 물론, 묻지도 않은 동네 아이들과 닭서리를 하였던 이야기까지 술술 다 털어놓았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닭서리 같은 것은 동네에서 용인하고 도둑으로 몰기는커녕 젊은이들의 장난 정도로 치부해 용서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경찰들은 닭서리를 했다는 죄목으로 며칠간 구류를 살리면서 조사를 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사건을 겪고 난 YH는 동네에서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었다. 하는 일이 없이 어정거리고 사는 것도 부끄러운데, 비록 작은 닭서리였지만, 도둑질을 한 죄인이 됐으니 남 보기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서울로 떠나기로 했다. 마침 동네에서 동창이 중학교 졸업을 하고, 소사<부천시>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형님 댁에서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처음으로 도시로 나가는 YH는 곧바로 이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처음으로 시골을 떠나온 YH는 세탁소를 하는 친구형의 소개로 그 동네에 있는 철물점에 취직을 하였다. 고등학교 다닐 나이이었지만, 일단 그냥 밥이나 얻어먹고 심부름을 하면서 가게 일을 배우기로 한 것이었다. 이때까지도 YH는 글자를 제대로 깨치지 못해서 읽는 게 서툴렀다. 그런 중에 철물이란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고 크기에 따라 취급하는 종목이 어찌나 많은지 보통 머리로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지 않나? 이 친구도 그 가게에서 10년 이상 일을 하다 보니 이제는 귀신이 다 됐다. 다른 점원들이 이 복잡한 가게에서 견디지 못하고 몇 달 만에 떠나곤 했지만, YH는 꼬박 10년을 채우면서 그 가게만을 지켰다. 이 철물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야 대부분이 공사판에서 일하다보니 성질이 급하고 서두르게 마련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손님들이 요구하는 물건을 척척 찾아다 대령하는 YH는 호감을 샀다. 이젠 주인이 없더라도 척척 물건을 찾아다 대령 하는 것은 물론, 깔끔하게 돈 처리도 잘해서 주인은 믿고 가게를 맡길 정도였다.

김선태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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