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모든 꿈을 접고 오로지 직장인으로서만 살아야 하니 속물이 돼갔다. 속물이 무엇인가? 그저 되는 대로 살면서 좀 더 잘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게 아닌가? 좀 더 잘 살려면 돈을 모아야 하고 계급이 높아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 모두는 그리 쉬운 건 아니었다. 돈도 모으기가 쉽지를 않지만 교사로서 계급이 높아진다는 것은 교감을 거쳐 교장이 되는 것인데 요즘도 그렇지만 그때도 아주 어려웠다. 더구나 정규 사범대학을 나오지 않고는 더 어려웠다. 또 된다고 하더라도 50대 후반 혹은 60세나 돼야 가능했다.

그래서 우선 돈을 모으는 데 힘을 쏟았다. 허리끈을 졸라매고 모았다. 2년 뒤에는 교회 바로 옆 비교적 중심가에 위치한 조그마한 집을 살 수 있었다. 마당도 제법 넓었다. 은행에 잡힌 집이라 그 빚을 갚느라 또 시일이 걸렸다. 이렇게 집 사느라 날뛰다 보니 아버님 어머님께 쇠고기 한 근 제대로 사다 드리질 못했다. 당시 형님은 아버님 어머님 모시고 허덕이시던 때라 무척 어려웠다. 그 사정을 알면서도 내 코가 석 자라 그만 외면했다. 돌아가신 뒤에 가슴에 사무치게 후회가 된다. 이 불효를 어이해야 할까?

그렇게 불효를 저지르면서 산 그 집이 살다 보니 문제가 많았다. 바로 앞집이 도정공장이라 먼지가 온 집을 덮었다. 우리 집이 가장 심했고 옆집, 그리고 뒷집까지도 먼지로 인해 피해를 봤다. 그래도 모두 착하기도 하고 공장 주인이 이곳의 유지라 두렵기도 해서 그냥 참고 지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분명 공해인데 이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웃집을 선동해 관청에 진정서를 올렸다. 덕분에 뒤로 나온 창문을 닫는 장치를 설치할 수 있었다. 그러자 먼지가 공장 안에 쌓여 그곳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배기지 못하게 됐다. 그러자 또 뒤쪽 창문을 열어 먼지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다시 진정서를 올리고자 하니 어떻게 된 셈인지 이웃들이 이번엔 응하지 않았다. 아마 공장 측에서 손을 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곧 내게 집을 팔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시세보다 더 준다는 제안이었다. 부득이 팔았다. 처음엔 이웃집에 좀 미안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옆집에도 같은 제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집을 사려는데 마땅한 집이 없었다. 결국 뒷동네의 어느 집을 샀다. 계약금을 주고 계약을 했다. 그런데 나중 그 아버지 되는 사람이 나타나 못 판다고 했다. 집은 자기 명의로 돼 있다는 얘기였다. 그 아들은 연세 많은 아버님은 잘 모르니 자기하고 계약하면 된다고 해 믿고 계약을 했는데 느닷없이 노인이 나타나 못 판다고 하니 방법이 없었다. 그럼 계약금은 물론 계약대로 변상까지 하라 하니 돈 준 사람한테 받으란다. 그러나 돈 준 그 아들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완전히 배짱이요, 생떼였다. 어쩌면 부자가 짜고 하는 사기극 같기도 했다. 고소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근처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그 아들을 만났다. 나는 그를 경찰서로 끌고 갔다. 가서 순경에게 이렇게 됐다 하고 이 사람을 좀 잡아 가둬달라고 하였다. 내 얘기를 들은 순경은 그럼 이 사람에게 사실 여부를 알아본다고 하면서 그를 거기 있게 했다. 나는 나와서 친구들이 있는 집으로 가서 어울려 놀고 있는데 그의 부인이라는 여자가 찾아와서 꼭 돈을 갚을 테니 남편을 집에 오게 해 달라고 애걸을 했다. 나는 여러 친구들도 있고 해서 그럼 알았다고 하고는 경찰서로 갔다. 그런데 웬걸 벌써 그 아들은 가고 없었다. 왜 보냈느냐 하니 주임이 보내라 해서 보냈다고 했다. 주임을 찾으니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식 고소도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구류시킬 권한이 없다고 하더라. 멋쩍게 돌아왔다. 그 뒤 한 달이나 지나서 찔끔 찔끔 원금만이나마 겨우 받았다.

이 소문은 곧 좁은 바닥에 다 났는지 복덕방은 물론이고 여기저기서 집 사라는 제보가 들어왔다. 그러나 중심가를 벗어나고 싶지 않으니 썩 내키는 집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종이모부가 찾아오셨다. 당신 집을 사라는 것이다. 그 집은 비록 고가이기는 하나 당시 그 읍내에서는 제일 큰 집이요, 좋은 집이라 산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했는데 그걸 사라니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저씨는 끈질기셨다. 집이 은행에 잡혀 있으므로 그 빚을 떠안고 집 판 돈을 조금만 보태면 된다는 얘기였다. 부족한 돈은 천천히 받겠다고도 했다. 그래도 망설이는데 또 그 딸이 “오빠, 다른 사람 주기 싫어서 그래요, 그래도 오빠가 사면 정든 집에 올 수가 있잖아요. 사기만 하면 돈 벌어요” 하며 권했다. 아침저녁 집요하게 권하니 그만 솔깃했다. 도시 계획에 걸려 있다고는 하나 언제 시행될지는 모르고 또 시행되면 오히려 보상을 받아 더 나을 것도 같아 그만 그 집을 샀다.

우리 가족이 살기엔 큰 집이었다. 대지가 200평이나 되는 데다 사랑채도 있었다. 거기다 또 욕심을 내어 사랑채 하나를 더 지었다. 당시 안강에는 풍산금속이라는 공장이 들어서서 주택난이 심각하므로 방은 무조건 세가 나갔다. 그 돈으로 집을 지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몇 년 가지 않아 아파트가 생긴 것이다. 이제 고가는 인기가 없었다. 그래도 그냥저냥 괜찮게 지나는데 그만 안강을 떠나게 됐다. 아이들을 공부시킨다며 대구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 집은 골칫덩어리로 변했다. 몇 년 사이에 시행되리라던 도시 계획은 감감무소식이었고 팔려니 너무 헐값이라 팔지도 못했다. 그대로 도시 계획이 시행되는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종제가 안강으로 가게 돼서 그에게 집을 맡겼다. 그는 손수 수리해 가며 20년이 넘게 그 집을 잘 지켜줬다. 몇 년 전 도시 계획이 시행돼 집이 뜯겼다. 30년이 넘은 뒤에 이뤄진 거였다. 그래도 아직 70여 평의 땅이 남아 옛 추억을 살리고 있다.

안병렬 주주통신원  anbyung123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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