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강으로 오니 자연 안강제일교회로 가게 됐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바로 그 마을 호명에 가서 또 내가 처음 예수를 믿은 호명교회로 갈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중간에 강이 가로놓여 있어 가기가 수월하지를 않았다. 게다가 안강제일교회의 부목사인 안백수 목사가 권하고 또 강도룡이란 훌륭한 목사님이 계시기에 온 가족이 안강제일교회 교인으로 등록했다. 교회에서는 아주 크게 환영했다.

그해 연말 교회에서 서리집사 투표가 있었는데 내가 상당히 많은 표로 당선됐다. 3년 뒤 교회 창립 80주년을 맞는 해에는 장로가 됐다. 연세 많으신 장로님께서 장로는 평생직이라 한 번 뽑히면 평생 그 교회에 충성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실행하고자 대구로 이사한 뒤에도, 그리고 직장이 안동으로 옮겨진 뒤에도 거의 주일은 거르지 않고 본 교회에서 섬기며 장로로서의 직분을 감당했다. 나중에 신학교로 가서야 사직했다. 19년간 장로로서 딴에는 열심히 섬기는 척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의 장로로서의 생활은 평균점 이하였다. 무엇보다 헌금을 많이 못했다. 늘 빚에 허덕이다 보니 10의 1조를 온전히 제대로 바치지 못했다. 자꾸 조금씩 에누리를 했다. 그게 그만 체질화가 됐는지 장로가 돼서도 제대로 못했다. 지금도 참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결과는 그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돈을 남에게 떼인 것이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제대로 10의 1조를 바치지 못했다. 바치려면 자꾸 손이 오그라들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신앙생활이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내 어찌 물질의 축복을 바라랴? 그러고도 장로직을 사직하지도 않았으니 참 뻔뻔스럽다 할 것이다.

또 내 기도는 약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평생 새벽 기도에 잘 참여하지 못했다. 잠이 너무 많아서다. 요즘도 꼭 8시간은 자야 한다. 특히 새벽잠이 많다. 안강에서는 바로 교회당 옆에 붙어살면서도 새벽 기도회에는 못 나갔다. 장로로서는 불합격이다. 그래도 우리 교인들이 이를 크게 문제 삼지를 않았으니 참 착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장로로서 내 아버님 내 어머님을 구원하지 못한 점이다. 이 죄는 앞의 죄보다 몇 배나 더 큰 엄청난 죄다. 난 하늘나라에 가서도 이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너무 죄스럽다. 또 너무 그립다. 그래서 이렇게 사모곡을 부른다.

사모곡

"엄마, 배고파."
"엄마, 머리 아파."
한없이 칭얼대고 싶다.
그 말라빠진 젖가슴
움켜쥐고 자꾸만 조르고 싶다.
엄마는 예수를 몰랐다.
하여 지옥으로 갔다.
나도 지옥으로 갈 것이다.
엄마 계신 그곳이 나의 천국
사무친 그리움에
뼈저린 회한에

이 밤엔 기어이 울 것 같다.

정말 어머님 계신 곳까지 따라가 뵈옵고 사죄를 해야 하겠다. 하느님에게도 어머님 모시고 살 수 있도록 자비를 구해야 하겠다.

안병렬 주주통신원  anbyung123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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