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사겸은 누구인가?

그럼 허사겸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허조(許祚)의 자는 사겸(士謙)이니 헌종8년(1842. 8. 24) 궁벽(窮僻)한 완도군 군외면 당인리의 빈한(貧寒)한 농가에서 출생하였으나 젊어서 씨름도 잘하고 활도 잘 쏘며 배질도 잘하며, 깽맥이(꽹과리)도 잘 치기로 유명하였다. 문자는 성명을 쓸 정도였으나 말이 유창하여 시비(是非)를 잘 판단하여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 출ㅊ: : 한겨레, 현재의 완도군 군외면 당인리 모습

고종 20년 허사겸의 나이 42세로 당인리 존위(尊位)-里長)가 되어서 마을 일을 잘 처리하였다고 한다. 허사겸의 출생에 대해 소남 김영현은 궁벽(窮僻)한 당인리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 마을은 마을 전체가 어렵게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빈한(貧寒)한 농가에서 출생하였다고 했으니 그 중에서도 더욱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인리는 실제로 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완도의 1급 빈촌이었다. 그러다가 김의 수출이 이루어지면서 그 가난을 벋어나기 시작하여 지금은 부촌이 되었다. 이렇게 살기가 힘든 사람이 그렇게 큰 거사를 어떻게 하게 되었을까. 정의감에 불타는 한 젊은이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선대로부터 배워온 불의와 타협을 못하는 장보고의 정신과 항일운동을 했던 선대의 정신을 이어받았음으로 생각된다.

청해비사(淸海秘史)를 쓴 소남 김영현(金榮炫)은 완도의 설군에 큰 공을 세운 김광선(金光善)의 자이다. 김영현(金榮炫)이 허사겸(許士謙) 민란에 관계되었던 분들과 아버지 김광선(金光善)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단기4288(1955)년에 청해비사(淸海秘史)란 책을 출간했으니, 민요사건(民橈事件)이 일어 난지 불과 70여년 후의 기록으로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가리포 민란은 1884년에 발생되었던 사건으로 김영현의 부 김광선(金光善)은 그때 나이 26세로 고금도에서 유학 중이었다. 민란에 대한 모든 사항을 체집하여 감옥에 있는 허사겸을 위로하기 위해 강진현으로 찾아가서, 그 실상을 낱낱이 알고 있던 차남 영현에게 가리포 민란을 자세히 전했다고 한다.

▲ 출처 : 한겨레, 완도군 군외면 당인리 위치

그래서 영현은 기리포 민란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을 수소문한 끝에 조자근(趙子根)을 찾았고, 그에게 당시의 사항을 정확하게 알려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는 정식 역사서라기보다는 민란의 실상을 그대로 기록한 현장스케치라 볼 수 있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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