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의 농민항쟁 3

마광남 주주통신원l승인2019.03.05l수정2019.03.05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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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民亂)의 동기

이렇게 작은 어촌의 한 마을 이장에 의해,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하여 난을 일으킨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청해비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바다가 잔잔할 때는 배가 바다를 타고 다니지만은 일조(一朝)에 바람이 불어 파도(波濤)가 이러나면 바다가 배를 뒤엎는 것이다,

사겸은 원동을 건너 신학리 박일지(朴一之)를 찾아 소상히 말하니 일지씨는 손을 흔들면서 “뒷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찬동(贊同)할 수 없네”라고 하였다.

사겸은 초연(梢然)하다가 가로되 살기를 위한 사람은 그 말씀이 당연(當然)하오나 국민(國民)을 위하여 죽기를 원(願)한사람은 뒷일을 돌아볼 필요(必要)가 없습니다, 라고 하고 너와 내가 두읍리(斗邑里, 삼두리) 박의중(朴義仲)을 찾고, 의중(義仲)이 찬동(贊同)하고 신정리(新亭里, 대신리) 최도일(崔道日)을 찾으니, 최도일(崔道日) 또한 찬동(贊同)하였다.

최여집(崔汝集)은 이 말을 듣고 주먹을 불끈 쥐고 이제 원수를 갚을 기회가 왔다 하고 이를 갈았다.

앞장에서 누누이 설명한대로 첨사 이상돈(李相惇)의 폭정에 못 이겨 순수한 농어민들이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래서 완도의 농민항쟁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거사가 있기까지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고 찬동하는 사람도 있어 모두를 규합하는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지 상상이 간다.

1883년 당시 강진현에 속해있던 가리포진의 섬사람들이 첨사 이상돈(李相惇)과 하리(下吏)들의 탐학에 분노하여 일으킨 봉기다.

이상돈(李相惇)은 부임하자마자 간악한 관속들과 야합하여 전함(戰艦) 건조를 빙자하여 날마다 주민들을 동원하여 소나무를 베다가 상선(商船)을 만들어 팔아서 사욕을 취했다.

또한 비자나무 등, 완도 특산물을 징발하고, 매일 주지육림에 빠져 사슴, 노루 등을 사냥하면서 많은 민폐를 끼쳤고 자기 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곤장으로 다스려 백성들의 원망이 이루 형언 할 수 없었다.

이러한 탐학에 맞서 화흥리 출신의 최도일(崔道日), 당인리 출신의 허사겸(許士謙), 그리고 문사순(文士順), 채운집(蔡云集) 등은 첨사와 하리들에 대한 응징을 결의하고, 거사계획을 세워 11월 18일 사시(巳時)에 나팔소리를 신호로 군중들이 모이도록 하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관청에 몰려가 옥문을 파괴하고 억울하게 갇혀게 한 후, 죄수들을 풀어주었고 첨사를 포박하여 객사등 아래에 무릎 꿇게 하였다.

폭정과 착취가 에 견디다 못해 분연히 일어선 것이 민란을 일으키게 된 동기다.

편집: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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