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이 제주에서 처음으로 정착한 곳은 ‘교래리’라는 산골 마을입니다. 관광지인 ‘산굼부리’와 토종닭으로 유명한 마을이지요. 이주하기 10개월 전쯤에 다향이랑 한 달 동안 제주를 사전답사했습니다. 아이가 학업에 시달리지 않고, 마음껏 뛰어놀만한 학교를 찾으려고 애를 썼지요. 그때 눈에 들어온 학교가 중산간의 납읍초등학교와 교래분교, 갯마을의 강정초등학교, 한림공원 안의 재릉초등학교입니다.

네 마을 모두 살 집을 알아보았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오래된 시골 마을에는 당신들이 살 집 외에 여분의 주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가 집이 나왔다고 해서 가보면 천장이 너무 낮아서 장롱이 들어갈 수도 없었고,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 아내와 아이가 질겁했지요. 그때 교래리에 적절한 집이 나왔기에 그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곳에서 행복했습니다. 며칠씩 비 내리며 짙은 안개가 끼고, 까마귀가 떼 지어 나는 풍경이 참 이국적이었지요. 익숙해지면서부터는 해가 그리워서 우울해지기도 했지만요. 다향이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걸어서 5분 거리의 학교에서 재미있게 잘 놀고 돌아왔습니다. 전교생이 스무 명, 다향이와 동급생인 1학년은 모두 셋뿐이었지요. 교실 세 칸에서 아이들이 합반으로 수업을 했습니다. 그래 봐야 예닐곱이었고요.

아이들의 수가 적으니까 제재도 없었습니다. 쉬는 시간마다 잔디 깔린 작은 운동장을 뛰어다니면서 노는 아이들.

“얘들아, 그만 들어와라. 공부해야지.” 선생님이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소리를 쳐야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왔지요. 선생님들도 심심치 않게 아이들이랑 공을 찼고요. 아이들 소풍에 어른들도 따라가고, 운동회는 마을 잔치가 되는 예전의 정취가 살아있는 마을이었습니다. 이희정과 최세희는 다향이에겐 동급생이자 학교에서 처음으로 사귄 벗들입니다. 방과 후에는 혼자 오는 법이 없이 꼭 아이들 대여섯이 같이 왔고, 나는 아이들의 놀이 동무이자 간식을 책임지는 요리사가 되었습니다.

다향이는 모든 아이와 잘 어울려 지냈지만 희정이와 세희랑은 사이가 아주 각별했습니다. 셋이 몰려다니면서 어린이 드라마 ‘마법전사 미르가온’의 주제가를 부르는가 하면 강아지놀이를 하고, 소꿉놀이도 했지요. 오빠들이 잡은 도롱뇽이 예쁘다면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쓰다듬는가 하면 제 주먹만 한 달팽이를 주워와서 키우기도 했습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적응했지요.

“아빠, ‘주제’가 뭐야?”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온 다향이가 씩씩거리면서 물었습니다. “왜?” 하고 물으니 “세희가 잘못해서 싸웠는데 나더러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라고 했어. 주제가 뭐야?” 그 말을 듣고 껄껄 웃다가 싫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주제가 뭐냐니까 왜 웃어? 아빠도 날 놀리는 거야?” 주제란 말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왜 네가 공부를 못한대?”
“받아쓰기를 30점 받았잖아. 세희는 만날 8-90점 맞는데.”
“다향아, 세희랑 희정이는 입학하기 전부터 한글을 배웠잖아. 너는 입학해서 배우는 중이고. 그러니까 공부 못하는 게 아니야. 단지 늦게 시작했을 뿐이지. 하지만 아빠가 책을 많이 읽어줘서 네가 세희보다 말을 더 조리 있게 잘하잖아?”
“조리는 또 뭐야?”
“논리적으로, 아니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말을 잘 한다고.”
“그런 거 필요 없어. 나 열심히 (받아쓰기) 공부해서 백점 맞을 거야.”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짓말처럼 다향이는 백점을 받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집에 온 다향이가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렸지요.
“다향아, 왜? 무슨 일이야?”
언제나처럼 다향이를 품에 꼭 안고 물었습니다.
“친구들이랑 언니오빠들이 나더러 멧돼지라고 놀려”
“왜? 다향아. 왜 너더러 멧돼지래?”
“뚱뚱하고, 숨 쉴 때 씩씩댄다고 멧돼지래.”
“그건 좋은 별명인데?”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위로를 해 주고 싶었습니다.

“좋긴 뭐가 좋아? 나도 희정이처럼 햄토리하고 싶어.”
“다향아, 멧돼지는 산중의 왕이잖아” 하니까 “아냐. 산중의 왕은 호랑이야” 합니다.
“그래. 네 말도 맞지만 호랑이는 거의 멸종됐잖아. 우리나라 산에는 더 이상 살지 않아. 그래서 멧돼지가 왕이라고. 그리고 너 아기 멧돼지본적 있어?” 하니까 다향이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아기 멧돼지는 다람쥐처럼 줄무늬가 있어. 줄무늬를 가진 통통한 아기 멧돼지가 뛰어다니는 걸 생각해봐. 얼마나 예쁜지.”
“싫어. 난 그래도 햄토리처럼 귀여운 별명을 갖고 싶어.”
“…….”

다향이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살을 빼야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그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빠를 닮아서 식탐이 있거든요. 

여름방학 기간엔 날마다 함덕해수욕장으로 놀러 다녔습니다. 아이스박스에 음료수와 간식을 챙겨서 둘이, 혹은 학교아이들 서너 명이라 해수욕을 즐기러 다녔지요. 눈이 내린 날에는 체인을 치고, 엉금엉금 기다시피해서 절물자연휴양림으로 갔습니다. 삼나무와 온갖 나무들이 빽빽한 곶자왈 안으로 어지럽게 찍혀있는 노루발자국을 쫓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그해 겨울이 나기 전에 서귀포시의 대포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해발 600미터나 되는 고지대의 교래리에는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아내가 출퇴근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이사를 가자고 해서 서귀포시 대포동으로 이사했지요. 대포동이라고는 하지만 중문관광단지가 있는 중문동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귤밭 가운데 있는 3층짜리 연립주택의 꼭대기 층입니다.

화단에는 키 큰 야자수가 축축 늘어서 있고, 25m나 하는 야외풀장이 있습니다. 32평의 집에는 침대, 소파, 에어컨, 식탁, 세탁기, 냉장고, 진공청소기, 벽난로 등이 갖춰져 있습니다. 너른 집에 거실이 절반이고, 방이 둘입니다. 방은 두 개지만 계단으로 올라가면 10평 넓이의 다락방도 있습니다. 그 다락방을 서재로 꾸며서 다향이랑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여름에는 수영장에서 살다시피 했고, 겨울이면 장작을 주어와 불을 지펴서 밤이나 고구마를 구워먹었지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외국영화를 보면 부자들이 왜 풀장을 갖는지. 풀장의 주변에 야자나무가 둘러서있고, 파라솔 꽂힌 테이블과 의자가 여러 개 있습니다. 간단한 간식과 음료수, 그리고 책을 들고 나갑니다. 땡볕이 이글거리는 날에 물에 첨벙 들어갔다 나오면 아주 시원합니다. 파라솔 아래 앉아서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다가 다시 더워지면 물놀이를 하고 다시 책을 읽지요. 잠깐씩 눈을 붙이기도 하면서.

바닷가처럼 모래가 달라붙지도 않고, 짠물이 아니니 굳이 비누칠을 열심히 할 필요도 없습니다. 배고프면 집에 가서 밥을 먹으면 그만입니다. 혹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 수영을 해보셨는지요? 비 때문에 텅 빈 수영장. 다향이랑 둘이 물놀이를 하다가 물 위에 벌렁 누웠을 때입니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얼굴, 가슴, 배 위에 떨어져서 간질거렸지요. 그때의 기분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습니다. 

주변 환경도 나무랄 데 없이 좋았습니다. 가까이에 도서관과 수영장, 헬스클럽, 마트는 물론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있었지요. 시내외버스와 공항버스정류장도 있고요. 날이 궂거나 추운 날에는 신라호텔이나 롯데호텔로 가서 책을 읽고, 그 앞의 산책로를 거닐었습니다. 물론 중문해수욕장은 다향이랑 나의 주요한 놀이터였습니다. 단 하나 결정적으로 아쉬웠던 게 바로 초등학교였고, 그것이 홈스쿨링을 앞당긴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초등학교를 그만둔 다향이가 수년 동안 교래분교의 친구들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래서 일이 주에 한 차례씩 다향이랑 교래리로 나들이를 갔지요. 희정이 세희랑 실컷 놀라고, 한 시간씩이나 운전을 해서. “아빠, 난 지금도 풍림빌리지가 제일 좋아. 마당 없는 것만 빼고.” 다향이가 가끔 하는 말입니다. 

오성근 주주통신원  babsangm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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