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강아지 사줘.” 다향이가 조릅니다.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다향아,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가면 사줄게.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듯이 개는 개답게 (밖에서) 살아야지. 강아지가 집 안에만 갇혀있으면 얼마나 답답하겠어?” 셋이 살기에도 비좁은 집에서 강아지까지 감당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 중요한 건 아내가 개나 고양이처럼 털 달린 동물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이었고요.

“도대체 언제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갈 건데? 아빠는 거짓말쟁이야.”
“……?”
5 ~ 6년이 지나도록 같은 말을 되풀이하다 보니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듣기에 이르렀습니다. 거짓말쟁이? 아이한테 그 말을 듣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예전에는 현금이 참 귀했습니다. 설날에 세배를 해도 세뱃돈 받기가 쉽지 않았지요. 아버지 형제들의 삶이 팍팍했기 때문인지 시골에서 나고 자란 분들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세뱃돈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어쩌다가 그런 게 생기기라도 하면 “엄마한테 맡겨. 네가 필요할 때 줄게” 하고 어머니가 챙겼습니다. 하지만 한번 들어간 돈이 다시 나온 적은 없었지요.

“이번 시험에서 1등을 하면 닭 튀겨줄게”라거나 “1등을 하면 네가 원하는 걸 사줄 테니까 공부 열심히 해”라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지켜진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아픔(?)을 겪으면서 약속을 꼭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것은 아이한테도 그대로 적용됐지요.

다향이랑 함께한 시간 동안 모든 걸 공유해왔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의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른들과는 달리 약속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아내가 “다향아, 엄마한테 돈 좀 빌려줘”라거나 “네가 필요할 때 줄테니까 엄마한테 맡겨” 하면 응하지 않으려 하고, 어쩌다가 응할 때는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지요. 하지만 내 말에는 선뜻 응합니다. 아내와는 달리 다향이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향이한테 거짓말을 한 게 있습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미리 떠보고 선물을 준비할 수 있지만 성장할수록 그게 어려워집니다. 다향이가 열 살 때의 일입니다. “다향아, 올해는 산타할아버지한테 뭘 선물 받고 싶어?” 하니까 “해리포터의 마법 지팡이” 합니다. 그래서 그까짓 막대기 하나쯤이야 생각하는데 마치 속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그냥 모양만 말고, 진짜 마법이 되는 지팡이를 갖고 싶어” 했지요. 아! 진짜 마법이 통하는 지팡이라니……. 도대체 그런 걸 어디서 구한다는 말입니까? 그 말을 듣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편지를 썼습니다.

초대장
 
다향아 안녕! 난 북극에 사는 산타클로스란다.
네 소원은 잘 들었는데 마법 지팡이는 어린이에게 알맞은 선물이 아니란다.
그것을 잘 쓰면 아주 유용하지만 작은 실수만 해도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지.
너는 아직 어리니까 조금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여행도 많이 다니렴.
그래 네 힘으로 내가 살고 있는 산타마을로 찾아오너라.
나는 그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네게 마법 지팡이를 선물하마.
물론 네가 정의를 위해서만 사용할 아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말이야.
 
네 방문을 기다리며 산타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아침에 머리맡에 놓인 편지를 읽은 다향이가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이나 만나는 아이들에게 자랑을 했지요. 산타 할아버지는 없다는 아이들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게 다향이한테 가진 유일한 비밀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쟁이라니요? 무언가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해에도 다향이는 크리스마스선물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소원을 빌었거든요. “아빠. 올 크리스마스에는 소녀시대를 만나고 싶어. 그게 소원이야.” 아, 갈수록 태산입니다. 인기절정의 소녀시대를 어떻게 집으로 데려온다는 말입니까? 마법 지팡이처럼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소용이 없는 일이지요.

“다향아. 크리스마스와 연말에는 소녀시대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 않을까? 텔레비전프로그램만 해도 엄청 많이 나올 텐데.”
“아니야, 괜찮아. 산타할아버지는 모든 소원을 들어주잖아.”
“……?”

정말 걱정이 됐습니다. 크리스마스선물을 2년 연속으로 받지 못하면 어린 날의 나처럼 상처를 받지 않을까 염려가 됐거든요. 초등고학년나이로 접어들면서 다향이가 소녀시대를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녀시대에 관련된 기사나 사진을 모으고, 소녀시대가 나오는 음악방송 프로그램을 빼놓지 않고 챙겨봤지요. 화보를 껴서 판매하는 비싼 시디도 사고 말입니다. 그래서 요술방망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크리스마스아침에 눈을 뜬 다향이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합니다.
“아빠, 어떡해? 어젯밤에 소원 비는 걸 깜빡했어.”
“……?”
그래서 산타할아버지가 소녀시대를 데려다주지 않았다면서 끌탕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애매한 상태에 빠졌었지요.

“다향아, 우리 고양이를 키워볼까?”
“고양이? 고양이를 어디서 구해? 누가 준대?”
“아니, 강아지 대신 고양이를 먼저 길러보면 어떨까 해서. 내일 오일장에 가면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빠, 정말 그래도 돼? 엄마가 싫어하잖아.”
“그럼 그만두든지.”
“아냐, 아빠. 오일장에 가. 대신 고양이는 내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를 거야.”

아내가 서울로 출장을 간 사이에 거사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다향이는 흥분이 됐는지 그날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고요. ‘야옹 니야옹…….’ 다향이가 핀두스라는 이름을 붙여준 고양이가 밤새 울었습니다. 엄마와 떨어져서인지, 낯선 환경 때문인지 우유와 사료에는 입도 안 대고 울었지요. 핀두스는 다향이가 재미있게 읽었던 스벤 누르드크비스트의 그림책 핀두스 시리즈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첫날밤을 거실 모퉁이의 에어컨 뒤에 숨어서 가녀린 목소리로 울기만 했던 핀두스. 하지만 다향이의 마음과 정성이 통했는지 잘 어울려 놀기 시작했습니다. 다향이의 무릎위에 올라가 앉고, 그러면 다향이는 핀두스가 불편할까봐 다리가 저려도 쥐가 날 지경까지 꾹 참았지요. 다향이가 피아노를 치면 감상을 하듯이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아서 가르랑거렸고요. 출장을 다녀와서 기겁한 아내도 핀두스를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핀두스가 예쁜 짓을 많이 했거든요. 혼자 놀다가도 누군가 소파나 거실바닥에 앉아있으면 무릎위에 앉거나 제 몸을 비벼대곤 했지요. 빤히 쳐다보다가 쓰다듬어주면 기분이 좋아져서 가르랑거리는 새끼고양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때 새로운 식구가 생겼습니다. 바로 삽살개 나무입니다.

마당이 넓은 집을 구했습니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일이 실현된 것입니다. 먼 바다가 보이는 중산간의 단독가옥입니다. 개가 필요해졌고, 암수 삽살개를 키우는 지인한테 강아지를 부탁해뒀지요. 그 강아지를 입양 받은 것입니다.

나무가 입양되면서 핀두스의 수난이 시작됐습니다. 마당이 너른 집으로 이사를 하기까지 한 달 동안 세 사람이 개, 고양이와 함께 살았습니다. 제일 어린 나무가 핀두스한테 달려갑니다. 같이 놀자고 하는데 다향이가 소리를 지르면서 핀두스를 품에 앉습니다. “야, 나무. 핀두스 괴롭히지 마.”

나무는 놀자고 덤비고, 긴장한 핀두스는 소파나 식탁 위로 도망을 다닙니다. 어쩌다가 핀두스를 무는 것 같으면 놀란 다향이가 나무를 때려줍니다. 아빠인 내가 보기에는 무는 게 아니라 장난을 치는 것인데 다향이는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깨갱 깨갱 깨애갱…….’ 생후 두 달을 갓 남긴 나무가 비명을 지릅니다. ‘아, 공연히 핀두스를 입양했나? 차라리 나무를 받지 말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다향아, 그건 나무가 핀두스를 무는 게 아니라 장난치는 거야.”
“아니야 아빠. 나무가 핀두스머리를 제 입속에 넣었다고.”
“그래, 다향아. 진짜 나무가 핀두스를 무는 거라면 그 상태에서 핀두스가 살아날 수 있을까? 하지만 멀쩡하잖아. 놀라기는 했겠지만.”
“아빠, 아빠는 왜 나무만 좋아하고, 핀두스는 싫어해?”
“……?”

“다향아, 고양이를 먼저 사러가자고 한 아빠가 왜 핀두스를 미워해? 네가 너무 핀두스만 위하니까 나무도 좀 챙겨주려는 거지. 넌 매일 핀두스만 예쁘다고 안고, 간식도 핀두스 것만 챙기잖아?” 하고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 용돈으로 값비싼 고양이의 간식을 사주면서 핀두스만 예뻐했지요. 첫 정인 핀두스가 다향이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나무는 찬밥신세가 됐습니다.

변산공동체학교의 중학과정에 입학한 다향이의 첫 겨울방학. 다향이가 학교에서 쓴 ‘내가 살아온 이야기’라는 글을 우연히 읽게 됐습니다. A4용지 세장 가까이를 작은 글씨로 빼곡히 채운 글이었는데 ‘그때처럼 아빠가 미운 적이 없었다’고 썼더군요.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중재자 역할을 하려고 했던 게 다향이한테는 상처가 됐고, 그것이 다시 부메랑이 돼서 나의 마음에도 상처를 남겼습니다.

마당이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잔디가 깔린 구백 평의 대지에 한옥이 네 채나 있는 집입니다. 진한 갈색에 가슴에는 열십자문양의 흰털을 가진 나무랑 황금빛바탕에 갈색줄무늬의 핀두스가 파란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나무는 안채의 마루 밑을 제 집으로 삼았고, 핀두스는 사랑채의 마루를 차지했습니다.

그즈음 피부병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피부과에서 주사를 맞고, 약을 복용하며 연고를 발라도 소용이 없었지요. 나중에는 의사가 먼저 물었습니다. 혹시 집 안에서 동물을 키우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고양이를 입양했다고 하니까 고양이 알레르기인 것 같다고 했지요. 그 말을 듣고 핀두스를 밖으로 내놨습니다. 핀두스는 밖에서 문을 긁고, 다향이는 눈물을 글썽이고.

새집에서 두어 달 잘 지내던 핀두스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주는 사료를 잘 먹지 못했습니다. 핀두스가 채 먹지 못한 사료를 나무가 먹다가 다향이한테 야단을 맞았습니다.

“핀두스. 너, 왜 이래? 자 먹어봐.” 다향이가 핀두스를 무릎에 앉히고, 평소에 좋아하던 통조림간식을 줘도 잘 먹지 못했지요. 아무래도 이상해서 핀두스를 데리고 다향이랑 동물병원엘 갔습니다. 장이 꼬인 것 같다고 수술을 해야 한다면서 주사를 놔줍니다. 다향이랑 상의해보기로 하고 핀두스를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주사를 맞고 오면 조금 낫는가싶다가 다시 상태가 나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수술을 결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핀두스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로 45분이 걸리는 서귀포시까지 몇 번을 오가도, 다른 병원을 찾아가서 진찰해 봐도 고만고만한 말들을 했습니다.

그때 한 지인이 믿을만한 동물병원이 있다면서 소개를 해주었습니다. 그곳으로 핀두스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전의 의사들과는 달리 핀두스의 몸을 골고루 만져보더니 독에 중독이 돼서 신장이 많이 부었다고 합니다. 시키는 대로 만져보니 500원 짜리 동전만큼 딱딱한 게 잡혔지요. 그러면서 내일을 넘기기 힘드니까 안락사를 시키라고 합니다.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게 하는 게 좋겠다고.

“다향아, 어떻게 할까?”
“싫어. 그럼 핀두스가 죽는 거잖아.”
“어차피 내일을 넘기지 못한다는데 핀두스가 많이 아파하잖아.”
다향이가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의사가 주사기에 담긴 약을 조금 뿜어내고 핀두스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주사를 놓는데 다향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열꽃이 확 피어올랐습니다. 핀두스는 경련을 일으키면서 숨을 멈췄고, 뾰루지처럼 솟아난 다향이의 열꽃은 일주일이 넘도록 남았습니다. 숨을 거둔 핀두스를 집으로 데려와서 무덤을 만들고, 축원을 해주었습니다. “핀두스야,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지내렴.” 이런 기억들이 아빠를 원망하게 한 것 같습니다.

오성근 주주통신원  babsangm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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