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에 스며든 가야금 명인 고재록

황민호 옥천신문기자l승인2019.09.10l수정2019.09.1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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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난계국악단원 19년차, 군북면 증약리 귀촌 8년차
옥천읍내에서 한국음악학원 열고 3년 째 가야금 가르치는 중
영동의 국악 자원, 옥천에서도 같이 나누고파 강습소 열어

 

공주 시골 변두리마을서 가야금의 꿈을 꾸다

공주시 반포면 면 소재지도 아니고 한창 변두리 마을이었다. 걸어서 등교할라면 족히 한시간이 훌쩍 넘었다. 첩첩산중 산골이었다. 부모님은 농사를 졌고 공부반, 농사일 반, 유초년시절은 일하고 걷고 공부하고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반포초와 반포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주여고에 입학했다. 공주여고 특기적성반 중에 운명인지 숙명인지 모를 가야금이 눈에 확 뜨였다. 없는 살림에 가야금이라니, 앞으로 돈 들어갈 생각하고, 취업 못 할 것 감안하여 눈에 불을 켜고 반대했다. 사실 그것은 시대적 편견이기도 했거니와 실상이 또 그랬다. ‘예술’하면 어디서 밥 굶어죽기 딱 알맞다는 말은 인식이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 지점이다. 예술인들을 대접하는 사회분위기는 나아졌을 지 이전보다 나아졌을 지 몰라도 생계를 건사하는 부분은 구조적으로 취약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암튼 꽃혔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긋지긋한 시골 생활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인식했는지도 모른다. 어째튼 매달렸다. 부모님이 반대하면 쉬이 포기도 할 수 있었건만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활용해 관철시켰다. 부모님한테는 한달에 2만원만 내어달라 했고, 그나마 우호적인 5살 위 언니를 공략해 무려 10장이 넘는 편지로 ‘악기만 사주면 내가 이 은혜는 평생 갚겠다’라는 장문의 편지글을 써서 30만원의 악기를 얻어냈다. ‘의지'와 ‘열정'이 화수분처럼 샘솟던 시절이었다.

가야금을 했으니 가야금으로 대학을 진학하고 싶었다. 취미로 하다가 말겠거니 하는 부모님의 바람은 보기좋게 비껴 나갔다. 오죽하면 부모님이 대학 진학을 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을까.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주대 국악과에 진학

청주대 한국음악과, 본인도 떨어질 줄 알았던 대학에 떡 하니 붙었다. 따로 별도 개인교습을 받을 형편도 안 되어서 어렵겠거니 한 대학이었다. 하지만, 붙고 나서가 끝이 아니었다. 나름 낙방을 기대했던 부모님들에게 등록금 투쟁을 해야 했다. 이번에는 이불 시위를 했다.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열흘동안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첫 학기만 내어달라고 설득해서 간신히 입학했고 이제 본격적인 가야금의 길로 들어선 찰나였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가야금을 차에 싣고 갔지만, 어머니와 나는 가야금을 등에 둘러메고 버스를 타고 갔다.

막상 학교에 가니 국악 용어도 생소하고 내 갈길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버쩍 들었다. 부모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한 학기 등록금은 확보했으니 놀면서 다니자 하고 한 학기를 다녔는데 40명 중에 수석의 성적을 받았다. 이게 내 천직이구나 하는 생각이 그 때부터 들었다고. 그 이후 딴 맘을 먹지 않았다. 오로지 가야금만 팠다. 무대에 서기 위해 가야금이 아닌 아쟁을 배웠다. 가야금 연주자는 많았지만, 아쟁 연주자는 드물었기 때문에 무대에 오를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무대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는 가야금 뿐만 아니라 틈나는 대로 다른 국악기도 섭렵했다. 서로 영감을 주고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형제들의 도움으로 덜컥 졸업 전 학원을 열다

취업 시즌이 다가오자. 덜컥 겁이 났다. 해놓은 말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밥벌이를 해야 했다.

4학년 1학기 떄 덜컥 학원을 대전에 냈다. 졸업을 앞두고 뭐라고 해야 했다. 부모님 잔소리를 피해갈 안전장치와 사회에 나가면 뭐라도 명함을 내밀어야 하는 강박감에 저지른 일이었다. 돈이 바닥인 상황에서 막내인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위로 다섯형제 자매들에게 눈물의 호소를 했다. 그래서 얻은 게 보증금 1천만원. 도마동 삼육초 인근에 월세 싼 사무실을 얻었고 거기서 가야금 강습을 시작했다. 복장과 리플릿 등 돈이 많이 들었던 졸업연주도 형제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젠 오롯이 홀로 서야 했다. 계속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 닥치는 대로 가르쳤고 학교 방과후 강습도 뚫었다.

논산시 연산면 백석초등학교 강사는 잊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거기까지 악기를 들고서 버스를 세번 갈아타고 매번 3시간 걸려서 다녔다. ‘현타(현실타격)’가 왔고 어떻게든 차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돈을 빌리고 빌려 350만원을 마련해 중고차를 장만했다. 가야금이 아니라 단소반이었다. 가야금 뿐만 아니라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는 뭐든 해야 했다. 정말 열심히 했는데 기적은 일어났다. 그렇게 나간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 초중고 전부 아울러 우승을 했다.

에피소드가 있다. 발표를 하기 전 심사위원들이 백석초 강사가 누구냐고 자꾸 묻고 다니길래 덜컥 겁이 나서 아닌 척하고 물었더니 ‘너무 잘 해서 깜짝 놀라서 찾는다’는 말에 나름 환호를 질렀다. 전국대회 대상을 수상하며 백석초는 교육청 지원 상금으로 1천만원을 받기도 했다. 백석초 선생님의 소개로 대전시내 학교에도 본격적으로 출강을 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 무려 9개 수업을 진행했다. 정신없이 바빴지만, 행복했다.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 나를 필요로 하고, 나의 재능을 떨칠 기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논산 백석초 강사로 전국대회 대상 받아

강사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유명해지니 찾는 사람이 많았다.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사람들하고도 친해질 계기가 있었다. 같이 동아리 형태로 어울려 연주도 하고, 음악적 교류도 가졌다. 가르치는 것에 재미를 붙이다가도 연주하는 맛을 보기 시작하니 연주자의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연정국악원에 들어가는 것도 고민 안 한것은 아니었지만, 아는 지인이 영동 난계국악단을 소개시켜줘서 30대 초반 2001년 난계국악단에 응모해 들어갔다. 당시 학교의 교장선생님과도 이런 저런 트러블이 있었고 가르치는 것에 약간의 염증이 생길 무렵, 연주자의 제안은 적절하게 찾아왔다. 강사일 때보다 수입은 줄었지만, 연주자의 삶은 가야금에 온 집중을 할 수 있어서 괜찮았다.

돈을 버는 족족 악기를 샀다. 국악단원을 하면서도 가르치는 재미를 포기할 수 없어 일과시간 이후에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악기 살 돈이 없어 망설여졌던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배움에 대한 열정과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제자로 받고 싶었다. 악기 살 돈이 없어도 가야금을 배울 수 있도록 그는 그렇게 학습자재를 구비했다. 늘 그랬지만, 연주의 완성은 없다. 배움의 끝은 없다. 그래서 가르치는 만큼 그도 서울로 지역으로 찾아다니며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배우고 또 배웠다.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의 예능보유자인 신명숙 명인에게 찾아가서 배워 제자로 인정받았다.

영동난계국악단 단원으로 벌써 19년차

감히 우뚝 서 있다 생각하지 않고 산을 끊임없이 오르는 중이라 여겼다. 계속 배워야 또 가르칠 수 있었고 배움에 대한 갈증은 늘 충만했다.

공간을 마련해 공유했다. 대전 오정동에도 만들었다. 3년 전에는 메가커피 맞은 편에 ‘한국음악학원’이란 간판을 걸고 옥천에도 연습실을 만들었다.

2011년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 싶었고 출퇴근하는 영동 난계국악단과 좀 더 가까이 있고 싶어 군북면 증약리로 과감이 이사를 왔다. 자연스레 옥천에도 연습실을 만들게 됐다. 옥천에서 가야금을 배우고 싶은 친구들도, 영동에서 가야금을 배우고 싶은 친구들도 다 옥천에 모여들었다.

거의 매일 연습실을 개방하며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연습하도록 했다. 제자들과 함께 '깃털처럼 우아하고 자애로운 가야금’이라는 뜻으로 ‘우자금'이라는 가야금 팀을 만들어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토요일 오후 4시30분에는 일반 주민들을 대상으로 강습을 하기 시작했다. 가야금 동아리를 만들고 싶었다. 천지음이라는 가야금 동아리를 만들었다. 천지음은 하늘과 땅의 소리를 가야금에 담아낸다는 뜻이었다. 영동 양산면장으로 퇴직한 분도, 영동군 보건소에 계신 분도, 가정 주부도 시간을 내어 옥천 연습실로 찾아들었다. 옥천여중을 졸업하고 대전예고에 입학한 지현아 학생도, 고재록씨의 사촌동생 딸인 조혜림 학생도 끊임없이 옥천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있었다. 조혜림 학생은 옥천여중과 충북산과고를 나와 고재록씨에게 배워 원광대 음악학과에 입학했다.

▲ 왼쪽부터 조혜림, 지현아, 고재록, 도연, 정희경

영동 국악 자원, 옥천도 같이 나눴으면 좋겠다

난계국악단이 영동의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옥천, 보은 등 남부3군에 공유되어야 할 공공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동 난계국악단의 국악적 재능이 옥천 주민들에게도 연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한껏 가지고 있다.

“영동과 옥천이 바로 붙어 있잖아요. 영동은 초중고등학교에 국악관현악단이 만들어질 정도로 활황을 맞이 하고 있고 각 읍면 주민자치위원회에서도 국악프로그램이 상설적으로 운영될 만큼 붐이 일고 있어요. 옥천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전파되고 나눴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행정구역의 경계에 갇혀 있지말고 친한 이웃이니까 서로 자원을 공유한다면 주민들에게도 많은 혜택이 있지 않을까요? 난계국악단윈들이 34명이나 되어요. 각 악기별 전문가들이니까 국악에 관심있는 학생이나 주민들에게는 꿈의 징검다리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지역사회 요양원 연주 봉사도 이미 하고 있다. 국악협회도 가입했다. 옥천에 살면서 옥천에 뿌리내리기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하고 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가야금의 매력에 대해 물었다.

"인간의 복잡다단한 모든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많은 악기에요. 슬픔과 아픔, 힘듬, 기쁨, 즐거움, 재미, 무기력함, 지루함까지 악기로 다 표현할 수 있죠. 미술로 치면 모든 것을 다 그려낼 수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남녀노소 쉽게 배울 수 있고 또 깊이있게 배울 수 있는 대표적인 우리 국악악기죠” 가야금을 켠다. 김계옥이 작곡한 25현 가야금 곡 중 '궁타령의 멋’이 흘러나온다. 그의 제아인 조혜림과 지현아, 딸인 도연, 퓨전국악 창작그룹인 에이도스의 정희경씨가 함께 연주를 한다. 부드러운 음율이 귓속으로 파고들고 악기를 다루는 우아한 몸짓이 눈에 각인된다.

옥천 시내 한 가운데 훌륭한 연주자의 가야금 연습실이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행복’일 수 있겠다. 배우고 싶은 사람 한번 가보자. 

* 황민호씨는 현재 옥천신문 제작실장을 맡고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황민호 옥천신문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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