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영유권과 간도협약간의 연계성에 대해

안재영 주주통신원l승인2019.10.15l수정2019.10.16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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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지배로 인해 남북이 분단되어 살게 된 지도 어언 74년, 하지만 남과 북의 거주민들은 그에 비교 할 수 없이 길고 긴 수 천년의 세월을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화로 살아오고 있다.

70여년의 분단된 세월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상처를 많았더라도, 한반도는 이제 평화와 통일의 길로 가야만 한다. 평화로 하나 된 코리아가 되는 것 -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이요, 사명이라 생각된다.

▲ 출처 : 한겨레, 백두산과 천지

하나의 코리아로 되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이야 말로 무엇보다 우선되는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에 대한 한 예로 백두산을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한국전쟁 참가에 대한 보답으로 중국에 넘겨주었다는 풍문을 진실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근거로 북한을 상존 못할 이상한 집단으로 몰아가는 세력들이 있으며 남북의 이질감을 침소봉대하는 것은 반(反)통일세력의 음모라 생각된다. 이를 반증할 수 있는 “북한-중국 국경 역사와 현장(이종석/2016)”을 요약하여 올리니 참고하기 바란다.

제2장 : 북-중 국경을 둘러싼 갈등과 담판의 역사

  • 1. 조선-청 간 경계를 둘러싼 시비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장악한 자들이 합의하여 최초로 국경을 나눈 시기는 18세기 초이다.

1) 백두산정계비 : 1712년 조선 숙종시기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을 확정하면서, 그 기점으로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 세움.

백두산정계비의 내용 : 두 나라의 경계는,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이다-(西爲鴨綠, 東爲土門)

❯토문강이 구체적으로 어느 강을 지칭하는지가 쟁점이 되었으나, 적어도 1712년 당시에는 조선과 청 모두 ’토문강은 두만강‘이라는 인식이 있었다(강석화 논문 68쪽)

❯봉금정책 : 17세기 후반 ~ 1881년까지 청나라는, 만주족인 자신들의 태생 본거지인 만주지역을 한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200년 동안, 동북 3성 지역을 봉금(封禁)지대로 설정하였고, 이 지역에서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였음.

2) 조선-청 간 국경분쟁(간도문제) 발생과 경과

배경: 19세기 후반 이후 조선에서 전국적으로 환곡의 폐해가 심해지면서 주민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함경도와 평안도 거주 농민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스레 만주지역에 대한 이주가 늘어나게 됨, 하지만 이 19세기 후반시기에는 청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져서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매우 미약하였다.

19세기 전반부터는 청나라도 만주인들에 대한 만주개발을 적극 독려하면서, 이 지역에 거주중인 조선인들에 대해서 청나라로의 귀화할 것을 종용하다가, 급기야 1882년에는 이 지역에 거주중인 조선인 전체를 청나라 국적으로 편입하겠다는 고시함.

이 때 일부 조선인들이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을 확인한 후, 두만강과 토문강은 별개의 것이고, 정계비의 문구대로 보면 조선과 청의 경계는 토문강이므로, 두만강 일대에 주로 거주중인 조선인들이 두만강 이북지역에 대한 청의 행정권 행사를 막아달라고 조선 조정에 청원함.

3) 일본의 조선 강점과 간도협약

조선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두만강 이북 지역인 간도가 조선영토라는 주장이 국제적 쟁점이 된 것은 러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조선을 강제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간도가 청의 땅이라는 것을 조약으로 인정한 것도 일본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강화하고자 조선지배와 만주침략, 러시아 견제전략의 관점에서 간도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간도를 군사적 요충지로 확보하고자 간도의 조선 영토주장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이는 독‧미‧청 3국 동맹을 피하려는 계략이었다. 즉 일본은 간도 문제를 제기하여 이를 발판으로 만주침략의 명분을 만들려 하였으나 자신의 행동에 대항한 독‧미‧청 3국 동맹이라는 역풍을 맞게 되자 간도를 청의 영토를 인정하고 간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일본은 1909년 9월 북경에서 청과 ⟪도문강중한계무조약圖們江中韓界務條約⟫을 맺었다. 간도협약이라 불리는 이 조약은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동쪽 국경은 두만강을 경계로 하며 백두산에서의 경계는 정계비-석을수石乙水-두만강으로 한다는 내용을 제1조로 담고 있다.

여기서, 백두산 천지 남단에 위치한 정계비에서 조선 영토 안으로 흐르는 석을수를 경계로 함으로서 백두산 천지와 백두산 16개 봉우리가 모두 청에 속하게 되었다.

이처럼 일본은 3국 동맹의 간섭을 피하면서 청의 간도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남만주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는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간도협약은 국권상실 시대에 대한제국이 배제된 상태에서 맺어진 조약으로 법리적으로 무효이다. 하지만, 이 협약이 무효라는 것이 간도에 대한 영유권이 한국에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2. 북한-중국 간 국경협상의 전말

1) 북-중 국경협상 개시의 배경

일제 패망 후 한반도 북부와 중국에는 각각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과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북-중 관계가 시작되었다.

북-중 관계는 초기부터 국경을 둘러싼 갈등을 안고 출발하였다. 북한은 간도협약으로 천지가 몽땅 중국으로 귀속된 상황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백두산 영유권에 대해서도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백두산이 우리민족의 성산일 뿐 아니라, 김일성과 북한 지도부 인사 상당수가 백두산 일대에서 항일 빨치산 투쟁을 전개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 북한 지도부에게 백두산 천지는 양보할 수 없는 영토라는 인식이 강했다. 중국은 현재 15개 국가와 2만 2천km 가 넘는 국경을 맞대고 있다. 북한과의 국경선 길이만도 1,334km 에 달한다.

먼저 중국정부의 국경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방향은 아래와 같다.

①국경문제 해결의 목적은 주변을 안정시키고 국제정세를 완화시켜 국가건설에 이롭게 하려 하는 것이며, 주변국가와 긴장 관계를 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②국경문제 해결원칙은 평화협상을 통해 우호적으로 해결하며 제반 무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평등, 상호이익, 우호의 기초위에서 문제를 해결한다.

③역사와 현실을 결합한 해결책을 모색한다. 즉, 기존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는 한편 이미 형성되어 온 현실정황도 고려한다. 일찍이 중국을 향해 공물을 바친 지방을 모두 중국 판도에 넣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으며, 또한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주장하지 않는다. 국경문제 해결시 전체 역사 모두를 근거로 삼지 않는다. 일반 사료는 오직 참고용이며, 마지막 시기의 사료만이 법리적 근거를 갖는다.

④최종 해결 이전에는 현 상태를 유지하며 무력으로 현상변경을 시도하지 않는다.

2) 북-중 국경협상의 경위와 협정체결

북한과 중국 간 국경문제는 크게

첫째, 백두산지역,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두 강에 존재하고 있거나 새로 생겨나는 섬들로 구분해 볼 수가 있다. 그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지역이 백두산이었다. 백두산지역은 산 중턱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水源이 시작되지만 천지 부근의 산기슭에는 물이 흐리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북한과 중국이 본격적으로 국경협상에 돌입한 것은 1962년초 북한이 먼저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중-소 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북한이 중국 편에 섬으로써 소련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북-중 동맹관계는 강화되던 때였다.

셋째, 북한은 소련이 중국-인도 전쟁 과정에서 사실상 인도편을 들고 사회주의 진영에서 ’현대수정주의‘의 상징으로 낙인찍힌 유고슬라비아와 협력을 추구하자 소련의 평화공존노선에 의구심을 표하며 자신과 같은 입장을 취하던 중국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였다. 실제로 1962 가을부터 1964년 10월까지 북한과 소련의 관계는 양국 간에 단 한차례의 정부대표단 방문이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북한으로서는 중-소 분쟁으로 인하여 자신의 전략적 가치가 고평가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경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국경조약 체결을 위한 최종조율을 마친 북한과 중국은 1962년 10월 12일 비공개로, 역사적 미해결 영역으로 남겨졌던 백두산 지역을 포함해 압록강, 두만강의 모든 국경을 확정하는 국경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대해 양국은 비준서까지 교환하였다.

본 조약에 대해, 중국내 북한전문가 선쯔화‧퉁지에는 ’중국은 국제법의 일반 원칙에 의거하지 않았으며 1909년 체결된 간도협약에 기초해서 국경문제 담판을 진행하기는 했으나, 두만강 발원지의 드넓은 영토를 포기하고 북한의 요구대로 양국의 국경선을 획정하였다‘도 평가하였다.

1964년 320일 북경에서 류사오치劉少奇 중국 국가주석, 저우언라이 중국 국무원 총리, 박성철 북한 외무상이 참석한 가운데 -중 국경에 관한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 출처 : 한겨레,남북정상 천지 앞에서 손을 잡다.

제3장 북한-중국 간 국경회정 내용

백두산 천지 부근의 국경획정

1) 국경획정 개요

’국경에 관한 의정서‘ 제1조에서는 가장 첨예한 쟁점지역인 백두산 천지와 천지로부터 각각 압록강과 두만강이 시작되는 지점까지(즉, 물이 흐르지 않는 지역)의 경계를 획정하였다.

천지는 화산활동에 의해 백두산 화구가 함몰되어 생겼으며, 수면 높이 해발 약 2,190m, 면적 9.165km², 둘레 14.4km, 평균수심 213.3m, 최대수심 384m, 저수량 약 20억m³의 산상 호수이다.

북한과 중국은 국경조약을 체결하면서 합의문에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천지를 반분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양국은 국경선을 서남단2,520고지(제운봉)과 2,664고지(청석봉)사이의 안부鞍部의 대체적인 중심부에서 시작하여 동북쪽을 향해 직선으로 천지를 가로질러 맞은 편 산등성이의 2,628고지(쌍무지개봉)과 2,680고지(천문봉) 사이 안부의 대체적인 중심점까지 5,305.6m 뻗어 있으며, 그 서북 부분은 중국에 속하고 동남 부분은 북한에 속하도록 하였다.

2) 국경획정의 상세내용

백두산 정상 부근에는 물이 흐리지 않기 때문에 강을 자연적인 경계로 삼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인위적인 경계확정이 불가피하였으며, 이에 양국은 21개소(2009년에는 경계 팻말을 다시 세우면서 21개소에서 38개소로 늘렸다)에 28개의 경계 팻말을 세워 경계를 확정하였다.

북한과 중국이 위은 방식으로 경계를 나누다 보니 원래 천지를 반분하기로 한 합의와 달리 천지면적의 54.5%가 북한 경내에, 45.5%가 중국 경내에 속하게 되었다.

새롭게 확정된 북-중 국경과 간도협약과 비교해 보면, 북한 측이 중국으로부터 상당한 양보를 이끌어 냈음을 알 수 있다.

1909년 간도협약과 1962년의 북-중 국경조약에 따른 백두산 지역의 국경면적을 지도 비례척에 따라 추산하면 중국이 북한에 양보하여 내놓은 영토면적은, 약 1,200km² 였다고, 선쯔화-퉁지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참고로, 서울면적은 605km² 605평방km)

1962년 새로운 북-중 국경조약에 따라 신무성에 주둔하던 중국 변방부대의 주둔군이 상부명령을 받고 즉각 철수했다고 한다.

2. 압록강과 두만강 수역의 경계획정

경계로 삼을 하천이 없는 백두산 일대와 달리 압록강과 두만강의 본류가 시작되는 곳부터는 국경획정이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북한과 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흐르는 곳에서는 통상적인 하천에서의 국경선 획정의 경우가 하천의 중간을 국경선으로 하는 것과 달리 강 자체를 양국 국경으로 삼았다( 따라서 단둥에 압록강 하류 같은 경우 중국의 유람선들이 북한 땅에 거의 근접해 운항할 수가 있다)

북-중 양국이 하천경계를 확정하면서 가장 예민했던 사안은 강에 있는 섬들의 귀속문제였다. 이와 관련한 합의내용이 압록강,두만강 상의 섬島嶼과 사주沙洲, 모래톱의 소유 획정 기준을 명시한 국경조약 제2조다.

국경조약 제21항에 따르면 양국은 이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이미 일방의 공민에 의해 정착 혹은 개간한 섬과 사주는 해당 일방의 영토로 하며 다시 고치지 않기로 하였다. , 유인도나 이미 개간이 이루어진 섬에 대해서는 그곳 주민의 국적을 따져서 섬의 귀속국가를 정하고, 이후에 홍수나 퇴적 등으로 섬의 형태나 위치가 변해도 귀속국가가 달라질 수 없다고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이 조항은, 역사적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인도 대부분을 조선인이 개척했다는 점에서 북한에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당시 강 하구에 유인도 섬이 압록강에 10개, 두만강에 2개가 있었는데, 상기 조항에 따라 중국영토로 귀속된 섬은 펑티엔다오(0.52km²)-봉천도(奉天島)-뿐이였던 반면에, 북한 영토로 귀속된 섬들은 비단섬, 황금평을 비롯한 11개 섬(면적 80.43km²) 였다.

제4장 북-중 국경획정의 특징과 영토정치

1. 북-중 국경획정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

북-중 국경획정은 그 과정이나 결과에서 다른 나라들의 국경회정과 비교해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첫째, 북-중 국경획정은 비교적 단기간에 외교적 방식을 통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국경문제의 해결방식은 크게 평화적 방식과 물리적‧강제적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면 북-중 간 국경획정은 전형적인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국제사법기구에 의존하는 식의 사법적 방식도 동원되지 않았다. 북한이 공식적으로 협상을 제의한 때부터 협정체결까지 소요된 시간이 불과 8개월에 불과할 정도로 협상기간도 짧았다.

이러한 점들은 중국이 국경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소련, 인도, 베트남 등과는 무력충돌을 불사했으며, 미얀마 등과의 협상에도 긴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조적인 것이다. 이는 북-중 국경협상이 상대적으로 우호적이고 순탄하게 진행되었음을 뜻한다.

둘째, 북한과 중국의 국경획정에서는 국제적으로 적용되어 온 보편적 방식(국경선이 하천에 의해 결정될 경우에는 배의 항행이 불가능한 하천은 하천 중앙선을, 항행이 가능한 경우에는 주된 수로의 중앙을 국경선으로 삼는다는 국제법의 일반원칙)과는 다르게 하천 자체를 경계로 획정하였다.

그 이유는, 아마 국경획정 후 추가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국경에서의 분쟁 요소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셋째, 북-중 국경조약은 ’제국주의 시대에 자신에게 강요되었던 불평등 조약도 인정한다‘는 중국의 국경협상원칙이 거꾸로 적용된 예외적 조약이었다.

편집 : 김태평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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