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있었던 일

1989년 5월 27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을 하루 앞둔 전야제에 참석하기 위해 한양대학교로 향했다. 한양대는 이미 하루 전날부터 경찰에 의해 원천 봉쇄되고 지하철은 한양대역을 정차하지 않고 통과됐다. 대학 주변에는 30개 중대 4천5백여 명의 경찰을 투입, 불심 검문을 실시했다. 우리는 반가운 동지들을 만나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앞만 보고 걸었다. 가다가 낌새가 이상하면 되돌아서서 배회했다. 일부는 운 좋게 학생들이 가르쳐 준 개구멍으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결국 진입한 뒤에 모두 연행됐다. 마구잡이로 실려 갔다.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던 기동대원이 닭장차 안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나처럼 비쩍 마른 체형의 대학생 몇 명은 된통 얻어터진 듯 잔뜩 겁먹은 얼굴로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앉아 있던 이들 모두 숨죽인 채, 소 닭 쳐다보듯 차창 밖을 응시한다. 나도 금세 동화됐다. 그날의 용렬한 짓거리가 내 몸의 안위를 지켜주었지만 31년이 지난 입때까지도 그 장면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들은 필시 우리의 행사를 위해 방패막이로 나선 사범대생이었을 테고, 지금쯤 어느 학교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겠지….

그렇게 나는 동부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교사는 모두 35명이다. 저들의 표현을 빌면 우리는 ‘공범’이다. 원칙대로 하면 공범은 따로 떼어 놓고 진술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35명을 1실에 가두었다. 진술을 받고 말고가 필요 없는 잡범으로 여겼으리라. 나중에 성동서에 유치된 교사 15명을 동부서로 이감함으로써 50명의 교사가 동부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나게 된다.

당시 유치장 벽에 적혀 있던 ‘알림’이다. 내가 왜 그런 것을 메모해 두었는지 모르겠다. 오늘 전화로 확인해 보니, 지금은 기상 시간 정도만 안내할 뿐 반성의 시간도 없고 애국가 제창은 물론 점호도 사라지고 자유롭게 엎드려 책도 읽는다고 한다. 인권을 중시하는 시대로 인권위원회 진정 안내문이나 수사 민원 서비스 헌장까지 게시돼 있음을 애써 강조한다. 아무튼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

                              ⌜알 림⌟

여기에 들어온 사람은 아래와 같이 절차를 밟게 됩니다.
1. 05시에 기상하여 국기배례 및 과장님 말씀을 들으시고 자신에 대한 옳고 그름을 생각해 봅시다.
2. 05시 30분에 아침 식사(간식·사식)를 하게 됩니다. 간식은 353원으로 정부에서 지급합니다.
3. 06시에 책임 간부(보안과장)의 심사로 잘못을 가리게 됩니다.
4. 07시 20분에 (성수동 소재) 서울형사지법 직결과(즉결 재판)에 회부되어 구류·벌금·과료 판결을 받게 됩니다.
5. 벌금, 과료를 받은 분은 현지에서 소정의 금액을 납부하시면 귀가하게 됩니다. (단, 벌과금을 납부하시지 못하면 환형 유치하게 됩니다.)
☛ ‘환형 유치(換刑留置)’란 법률, 벌금 또는 과태료를 납입하지 않는 피고인을 일정한 기간 노역장에 유치하는 일을 말한다. (필자 주)
6. 구류 판결을 받은 분은 경찰서 유치장에서 소정 기간 구류를 받아야 합니다.
7. 즉결 심판에 회부되어 판결(구류·벌금·과료)에 이의가 있는 분은 7일 이내에 경찰서 (민원 창구)에 정식 재판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 동부경찰서장 -

▲ 전교조 결성식에 참여하기 위해 결성 대회 장소를 찾았다가 경찰에 연행된 교사들은 유치장에서 각각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전교조 결성식을 진행했다. 사진은 당시 동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치러진 결성식. © 전교조 자료 사진(노동과 세계, 2019.05.29.)

 

우리는 철야 농성을 하면서 음식물을 거부했다. 조사에 응하지 않았고 일체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이튿날 13시 정각에 우리들끼리 결성 대회를 하기로 하고 각자 할 일을 배정했다. 그리하여 유치장에서 제2의 전교조 결성 대회를 치르게 된다. 공식적인 대회 과정과 내용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게재한다. 다만 몇 가지는 순전히 내 기억에 의존한 것도 있다. 누가 쓴 문건인지도 모른다. 누런 갱지, 찢어진 수첩과 공책에 깨알처럼 쓴 글씨, 그리고 8절지 크기의 종이에 붉은 색연필로 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대회’ 팻말은 아직도 도렷하다. 31년 전 비좁은 유치장 안에서 쓴 그날의 대회사나 성명서는 단순히 빛바랜 휴지가 될 수 없다!

 

 

Ⅰ부 결성 대회

1. 개회선언 ------------------------------------------------------------- 박춘근(서울신북국)
2. 민중 의례 : 묵념,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구호
3. 대회사 -------------------------------------------------------------- 조웅래(경남 법수중)

오늘, 이 역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싸안으며 우리는 이 척박한 교육 현장에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의 터전을 굳건히 세우려 합니다.

                              ⌜대 회 사⌟

이 땅의 교육 민주화와 참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건설을 위해 가열찬 투쟁으로 여기 동부경찰서 보호실에 모이신 50명의 교육 동지 여러분!
비록 몸은 경찰의 강제 연행으로 동부경찰서 보호실에 있지만, 마음만은 우리 뜨거운 40만 교직원과 나아가 한양대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있는 교육 동지들과 꼭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교육 민주화와 참교육 실현을 위한 교직원노조 건설에 뜨거운 동지애로 모든 민주 세력과 연대하여 끝까지 투쟁합시다.

4. 경과보고 --------------------------------------------------------------- 김육훈(명일여중)
5. 교원 노조 사업 계획 ---------------------------------------------- 한민호(서울공릉국)

-교직원 권익 신장 : 교원의 신분 보장, 교권 침해에 대한 투쟁, 교육권의 확보
-교직원 복지 향상 : 임금 인상, 각종 수당의 본봉화, 초중등 대학 간 차별 철폐, 각종 복지 시설 확보
-교육 환경 개선 : 과밀학급 및 과대학교 해소, 교육 재정 확보, 학교 시설의 보수 및 개선
-학부모 연대 : 육성회 민주화, 민주 학부모회 결성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의 내용 연구 및 제도화 : 입시 위주의 경쟁 교육 지양, -교육과정 연구, 대체 교육과정 개발, 국정 교과서 제도 철폐 및 교과서 자유 발행제 관철
-건전한 학생 문화 육성 : 민주 학생회 건설 지원, 각종 학생 문화 행사 개최, 학생 징계 자구권 제도화
-교육 악법 철폐 및 민주적 교육 행정 확립

6. 교원노조가 --------------------------------------------------------------- 정인화(동성고)
7. 결의문 채택 ----------------------------------------------------------- 김수환(영등포고)

                            ⌜결 의 문⌟

우리는 오늘 우리의 척박한 교육 현실에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이 뿌리내렸음을 선언한다.

오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쟁취를 뜨겁게 맞이하며 30만 교사의 굳센 단결, 흔들림 없는 투쟁으로 교육 현장의 민주화 교육 여건의 개선을 이루어 낼 것이다. 또한 민주 세력의 총연대로 사회의 민주화, 조국 통일을 앞당기는 통일 교육의 선봉에 설 것을 다짐하며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위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끝까지 사수한다.
- 우리는 지도부를 중심으로 굳게 단결한다.
- 어떠한 부당 징계와 탄압에도 의연하게 맞서 끝까지 투쟁한다.

8. 폐회

 

Ⅱ부 규탄 대회

1. 소감 발표
2. 불법 연행 항의 방법 모색 및 오늘의 일정
3. 규탄 성명 발표 -------------------------------------------------- 이정헌(서울영등포고)

                              ⌜성 명 서⌟

열악한 교육 환경을 개선하고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려는 교직원노조는 30만 교사의 염원이며 시대적 요청이다. 그런데 경찰과 문교 당국은 개정된 집시법에 따라 평화적인 집회로 신고된 교직원노조 결성 대회를 경찰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집회 장소를 원천적으로 봉쇄했을 뿐만 아니라, 이 시대 교육자로서의 온당한 양심과 참교육에 대한 의지로 이 대회 및 전야제에 참여하려는 교사들을 무차별 강제 연행하고 장시간 불법 구금을 자행하였다. 또한 연행 과정에서 함께 연행된 사범대생에 대한 성동서 의경의 야만적 폭행과 교사들에 대한 폭언, 3평 남짓한 보호실에 35명의 교사를 몰아넣고 인격적 모독을 가한 행위는 정부 당국의 교원을 우대하겠다는 주장의 실상이 어떤가를 명백하게 보여 주었다.

5월 27일 한양대학교 근처에서 강제 연행된 우리 50명의 교사는 성동서 및 동부서의 교권 및 인권 유린의 작태에 분노를 금치 못하며 교사들을 대변해 주고 보호해야 할 문교부가 오히려 교사들의 불법 연행과 교권 유린 행위를 공모, 고무시킨 행위에 대해 30만 교사의 이름으로 규탄하는 바이다.

-불법연행 불법구금 폭력경찰 각성하라
-교권유린 자행하는 폭력경찰 각성하라
-교권유린 부추기는 문교부는 각성하라
-교원노조 탄압하는 문교장관 퇴진하라

 

그날의 아픔이 대물림되지 않기를

 

당시 나는 서울교사신문을 거쳐 전국교사신문에 교원의 열악한 임금 구조의 실상과 근원, 나아가 교원의 학교 급간·공무원 직종 간 임금 차별의 실상에 대하여 연재하고 있던 터라 조금은 알려진 존재였다. 아마 그래서 Ⅰ부 사회를 맡았을 것이다. Ⅱ부는 김영인(서울청량고) 교사의 사회로 경찰서 앞마당에서 실시했다. 이로 인해 몇 명이 다시 잡혀 들어갔지만, 동지들의 거센 항의와 이어지는 농성으로 함께 귀가할 수 있었다.

서울중계국의 신혜경 교사는 교감이 모든 교사를 대상으로 불참 서약서를 강요했다고 했다. 마산 함포여중의 이병규 교사는 장학사·형사·동료 교사 등 12명이 체포조를 조직, 정문 앞에 경찰 봉고차를 대기시켜 놓는 바람에 천릿길을 에둘러 왔다고 해서 우리 모두를 숙연케했다. 성명 미상의 교사 1인은 교감이 술집에서 수면제를 넣은 술을 마시게 했다며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31년이 지났다. 함께 연행된 50명 동지의 면면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처럼 퇴직하거나, 아직 좋은 선생님으로 학교에 남아 있으리라. 다만 함께 잡혀 들어온 이들 가운데 몇 명은 분명히 다른 부류였다. 대개 교감이나 장학사가 많고 더러 부장이 섞여 있었다. 대회장에 가기 위해 갖은 어려움 무릅쓰고 달려왔다가 개처럼 끌려온 이들과, ‘불순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출장 나온 이들의 대면은 가관이었다. 자유롭게 유치장을 빠져나간 이들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짓고, 유치장 안에서 구호를 외치던 이들은 한없는 연민의 눈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그 즈음해서 집회장인 대학교 뒷산으로 도망 다니거나 개구멍으로 드나드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한대, 연대, 경희대, 건대, 서강대 등을 전전했다.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중앙극장에서 미도파백화점으로 이어지는 길과 신촌 네거리가 특히 기억난다. 차림새부터 외계인을 닮은 백골단의 기염을 토하는 함성과 군홧발 소리, 그리고 뿌연 최루탄 가스가 길을 메웠다. 연대에서 도망가다가 주저앉은 곳이 봉원사 앞 화장터였고, 건대 앞에서는 뒷덜미 잡혀 낚아채이다가 동지들의 도움으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탈퇴만 하면 내가 당신의 승진을 보장하겠다’ 던 서부교육청의 원 장학사, ‘나, 어제 박 선생 못 봤다고 보고했는데 어때, 잘했지?’ 하며 씩 웃던 정 교감, 일산으로 이사하자 수색보다는 서오릉 코스가 낫다고 유도하더니 결국 상암초에서 갈현초로 전근하자 만세를 불렀다던 제4지부 교장들, ‘알아보니 월세방에서 살던데 형편도 안 좋은 처지에 그만두는 게 어떠냐’ 던 마포서 정보과 형사, ‘빨갱이질 그만하고 학교를 떠나라’ 고 전화로 호통치던 자칭 요식협회 마포지부장, 심포지움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광탄 보광사 근처 옻닭집으로 납치해서 술을 먹이던 이 교감, ‘당신 이름이 보이던데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귀띔해 준 안기부의 안 사무관….

또 있다. 한번은 경희대 집회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버스를 갈아타려고 내렸다가 그만 신촌 네거리에서 갇히고 말았다. 문제는 우리 아이들이다. 다섯 살배기 아들과 두 살배기 딸이다. 눈물, 콧물이 앞을 가렸지만 손으로 훔칠 수가 없다. 따갑고 쓰리고 얼굴을 에는 듯한 아픔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딸은 엄마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무기력한 아비는 눈을 뜨지 못하고 울며 보채는 아들을 안았다. 줄 끊어진 기저귀 가방과 딸을 안은 아내 손을 잡고 냅다 뛰었다. 현대백화점 자리였다. 거의 꼭대기 층까지 밀려갔다. 가히 광란의 도주에 가까웠고 아이들은 폐부를 쑤시듯 미치도록 울어댔다. 그때 웬 젊은이가 하도 딱했던지 아들을 안으면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딸을 안고 뛰었다. 밖으로 나온 그는 골목에 세워 둔 봉고차에 우릴 태우고 비호처럼 날았다. 신호고 뭐고 없었다. 요리조리 피하면서 우리 집이 있던 성산동 33번 버스 종점까지 단숨에 달렸다. 어느 길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부리나케 노점을 하던 과일 아주머니한테 가서 되는 대로 한 봉지를 담았다. 건네주려고 다가가니 우린 그런 사람 아니라고 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뺀다. 내가 한 일은 고작 넋 나간 꼴로 손을 흔들어 준 게 전부다. 그 아들딸이 자라 천안과 일산에 자리잡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우릴 집까지 데려다준 분, 기저귀 가방을 들고 함께 뛰던 분, 그리고 치약을 짜 주면서 코 밑에 바르라던 분….

항구적인 교육재정의 빈곤 구조와 함께 직종간·학교급간 교원 임금 체계 개선을 요구하며 부산, 광주, 공주 등지를 순회하던 시절이다. 유치장에 잡혀가서도 즉결 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훈방할 정도로 경미한 ‘잡범’인 내가, 무엇이 그리도 두려웠던지 신문·잡지·연구보고서마다 필명으로 투고했다. 잔망스럽기 그지없는 내 이야기를 장황하게 꺼낸 까닭이 있다. 내가 겪은 일들은 속칭, 술자리의 안줏감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분들이 겪은 고초를 감히 비견할 수 있으랴. 살아 숨쉬는 우리들의 ‘역사’가 그리 쉬이 스러질 리 없겠지만, 그래서 되지도 않는 소린 줄 알면서도 한 소리 덧붙인다. 어쩌면 그날의 아픔이 대물림되고 있지 않은지…. 제발 그러지 않기를 비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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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서울 29명, 경기 10명, 인천•충남•경남에서 각 3명, 전남에서 2명이 잡혀 들어갔다. 동부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50명은 함께 결성 대회를 치렀다. 그들의 이름과 소속은 아래와 같다. 이를 가나다 순으로 열거한다. 아래에서 밑줄 친 15명은 명단이 따로 있는 것으로 보아 성동서에서 이감된 분들로 보인다. 유치장에서 함께 했던 동지들의 안녕을 빈다.

구광조(충남대천여고), 김경애(서울신남성국), 김기열(인천인성여고), 김남국(서울혜화국), 김민섭(서울월계중), 김상도(경기초성국), 김수환(서울영등포고), 김승규(서울청담중), 김영웅(경기구리국), 김영인(서울청량고), 김육훈(서울명일여중), 김주환(서울용곡중), 김홍렬(전남고흥영주고), 김흥영(서울난곡중), 노영순(충남대천여고), 류희태(서울장승중), 박미경(경기의정부호암국), 박성주(서울영등포고), 박수연(서울숭곡국), 박춘근(서울신북국), 백인호(서울정신여고), 송민성(경기연천국), 송영호(서울계성여고), 송은주 외 1(경기양주덕산국), 신선용(경남함안중), 신혜경(서울중계국), 유병학(경기송탄효명중고), 유상준(서울상수국), 윤일완(인천북인천여중), 윤종철(서울서초고), 이강기(경기동두천중), 이병규(마산함포여중), 이상길(서울청룡국), 이세욱(서울신림고), 이영조(서울전농국), 이정헌(서울영등포고), 이 헌(서울장안국), 이홍배(서울공덕국), 임의수(충남온양여중), 장봉원(서울서교국), 정인화(서울동성고), 조웅래(경남법수중), 채종민(전남고흥영주고), 채종현(인천운산기계공고), 최복순(경기의정부호암국), 하헌종(서울수도여고), 한민호(서울공릉국), 한봉순(경기연천백의국), 한인석(서울한양여고). 끝.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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