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 동네의 총각들

지금으로부터 52년 전의 일이다.

1968년 8월에 약혼을 하고 그해 가을 김(해태)발을 막을 시기가 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장인께서는 6.25 때 전사를 하셨기에 누구 하나 김발 일을 도와 줄 사람이 없었다. 그 일을 도와주려고 처가엘 갔는데, 동네 총각들이 술 한 잔 얻어 먹으러 온다는 통지가 왔다.

말이 얻어 먹는다고 했지 사실은 빼앗아 먹으러 오는 것이었다. 당시 시골에는 자기 마을 처녀를 데려 가는 값을 받아야 한다 하여, 마을 청년들이 소위 약혼 턱으로 좋고 비싼 술과 안주를 시켜 먹음으로써, 신랑 될 사람의 혼을 거의 빠지게 하면서 놀았던 풍습이 있었다.

동네 총각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선수를 쳐야 좀 편하게 술을 대접?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름의 꾀를 내어 요령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장모님께 돼지 다리 하나를 그대로 삶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장모님은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다.

돼지가 다 삶아지고 술이 준비가 되고 난 후, 동네 청년들에게 오라는 연락을 했다. 동네 청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8명씩?이나 몰려 와서는 서로서로 수인사를 하고 빈상 앞에 빙 둘러 앉았다. 청년들은 빈상의 뜻을 알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었으니,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면서 침묵이 잠시 흘렀다.

그때 장모님께 '준비 된 안주와 술을 주십시오' 라는 말을 했더니 그와 동시에 통째로 삶은 돼지고기 한 다리를 들고 오셨다. 그것을 본 총각들은 서로 얼굴만 번갈아 쳐다보며 아무 말을 못하였다. 이어서 큰 술독을 그대로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입을 쩍 벌리면서 '이제 그만 가져 오세요'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졌습니다' 라고 말한 후 모두가 한바탕 크게 웃고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 술독을 다 비운 다음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돌아갔는데, 그 후로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는 말이 '이 사람 참 무서운 사람이데...'라면서 서로 마주 보고 웃었고, 아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옛날 농촌에서는 농사철이 되면 농주라고 하여 막걸리를 집에서 직접 담가 먹을 때였다. 장모님의 술 담그는 솜씨는 그 마을에서 으뜸으로 쳐주었다. 모내기 하는 날이면 동네 어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장모님께서 빚는 술 한 잔 먹으려고 모여 들었다. 술맛은 이웃 마을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솜씨가 좋았던 것이다.

그 솜씨를 배우라고 각시에게 수차례 이야기를 했는데도 끝내 배우지 못하였다. 이제 와서 나이가 들고나니 '그 때 당신 말을 들을 걸 그랬어요' 한다. 하지만 장모님께서는 이미 하늘 나라에 계시니 어찌할 것인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그 때를 생각하며 지금도 빙그레 웃곤 한다. 그런데 처 할아버지께서는 여수에서 단신으로 이주를 해오셨다고 했다. 그 분께서는 '밥을 먹고 생활하려면 남보다 덜 자고 더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부지런히 사셨다고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자식들은 결혼할 나이로 자랐지만 가진 것은 없었다고 그때를 회상하면서 숙연해지셨다.

그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담배 한 개비도 두 토막을 내어 두 번으로 나누어 피셨고, 낮에는 담배피우는 시간이 아까워 밤에만 피우셨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튼튼한 일가를 이루게 되었고, 마을에서 부농으로 칭송받을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그렇게 평생을 일을 하셨으나, 안타깝게도 둘째 아들이 6,25 때 전사를 해서 항상 가슴에 한을 품고 사셨다고 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너희들도 알뜰하게 살라'는 말씀을 본인의 삶에 빗대어 하시지 않았나 생각한다.

편집 : 김태평 편집위원

마광남 주주통신원  wd3415@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