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이 시작된 어느 날, 놈은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정체는 가늠하기 어려웠으며 정체불명의 UFO처럼 예상치 않은 곳에서 나타나 식구들을 괴롭히곤 하였다. 어느 날은 밤새 괴롭힘을 당하느라 선 잠을 잔 적도 있었다. 놈은 나의 아내도 유린하였으며 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놈에게 속죄할 것을 요구했지만 놈은 씽긋도 하지 않았다. 하여 놈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하였지만 그게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다. 놈은 신출귀몰하여 어떤 처방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손으로는 물론이고 신문지로도 잡을 수 없었고 뿌리는 약으로도 통하지 않았다. 그만큼 빨아먹었으면 멈출 때도 되었건만 놈은 만족이란 게 없는 듯하였다.

속죄하는 모습이라도 보였으면 좋으련만 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덕분에 피를 순환시켜 새로운 피가 생성되지 않았느냐며 자기를 고맙게 여기라는 태도였다. 가히 철면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방문을 열어놓고 대대적으로 바깥 공기를 유입시켰다. 그러나 놈에게는 그것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놈은 움직이는 골대였다. 이곳을 공략하자고 하면 저곳에 숨어있고, 저 곳을 공략하자면 또 다른 곳으로 피해 있었다. 놈과의 공방이 있을 즈음 놈이 적반하장격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놈은 아내와 딸을 유린하였으면서도 그것으로 인해 밤잠을 설치게 하여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며 자기에게 감사하라고 외려 큰 소리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놈의 파렴치함에 혀를 내두르며 놈에게 사죄를 기대한다던가 복수를 한다던가 하는 생각을 포기할 즈음, 기회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왔다. 화장실에서 반쯤 문을 열어놓고 일을 보던중에 갑자기 놈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피를 흡입했는지 몸집이 제법 있어보였으며 놈은 보란듯이 내가 앉아 있는 변기 옆 화장지로 살포시 날아 앉았다. 마치 그동안 자기로 인해 당했을 괴로움은 커녕 쾌락과 즐거움을 준 듯한 시혜자의 자세로 말이다. 그 자세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괴롭히면서 느꼈을 쾌락을 피해자도 같이 느꼈을 것이라는 식의 뻔뻔스러움이었다.

놈의 자세라든지 태도야 어찌되었든간에 나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앞에 있는 수건을 반으로 접어 놈을 향해 힘껏 후려쳤다. 그런데 놈은 이번에도 달아나는데 성공한 듯 보였다. 놈의 죽은 잔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살펴보니 놈은 맞은 편 화장실 문가에 비실비실 앉아 있었는데 나의 일격에 피해를 입은 게 확실해 보였다. 나는 수건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손바닥으로 놈을 덮쳤다. 아주 세게. 그러나 정확히 표적을 향하여.

아 ~~ 내려친 손을 거두니 문가에는 피로 얼룩져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놈이 그동안 피를 빨아먹었는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얼른 화장지로 피를 닦아내고 놈의 시신을 변기 속으로 쳐넣었다. 놈을 변기속으로 넣고  하수  처리할 때의 그 후련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놈은 갔다. 드디어 사라졌다. 결국 이렇게 끝날 것을. 속죄도 안하고 미안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고 큰소리 치던 파렴치한 곤충은 그렇게 처참하게 운명을 마쳤다. 한 여름 밤의 피의 복수는 이렇게  허무하게 막이 내렸다.

심창식 주주통신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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