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생인 나의 아버지는 오래 전 돌아가셨다. 1963년부터 주식회사 '신광토건'을 경영하셨다. 주로 시청과 군청의 토목공사 입찰을 보았다. 세무서원을 비롯해서 당시 공무원들은 부패가 일상적이었다. 결탁과 상납의 고리를 아버지는 못 견뎌하셨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사업을 했다. 그런데도 못내 화가 치밀 때면 우렁우렁 고함을 치며 따졌다. 공무원들 사이에서 아버지의 별명은 '오토바이'였다. 건드리면 고약한 소리를 내는...내가 한겨레주주가 된 저의에도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이상적인 사회의 소망이 자리한 것이다. 인간의 가장 우선적이고 큰 가치는 정의에 있다고 배웠다. 어떤 경우에도 비굴하거나 비겁해서는 안 된다는 큰 틀을 말씀하셨다. 소인배의 그릇은 접시물처럼 빤하게 보이고, 대인배의 그릇은 깊고 넓어서 함부로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소인을 품는 것은 대인의 몫이라고 했다.

다리나 둑 공사를 할 때면 현장에 대량의 시멘트 포대를 부려놓아 책임자들은 텐트에서 잠을 잤다. 한 번은 책임자들끼리 짜고서 자해를 한 뒤, 밤 새 엄청난 양의 시멘트를 잃어버렸다며 팔아먹었다. 경찰에서 조사 받은 책임자들이 탄로 나 유치장에 갇히자 아버지는 손수 사식을 넣어주고, 나중에는 그들을 풀어주었다. 형산강 전투의 치열한 상흔 이후, 전후의 혼란에 외지인들이 경주에 머물렀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얼마간의 노잣돈까지 쥐여주며 고향으로 가던지 대도시로 가서 정직하게 잘 살라는 격려를 했다. "나 하나로 세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이것이 아버지 철학이었다.    

이런 아버지의 내면은 굉장히 감성적인 로맨티스트에 가까웠다. 우리 집에 오는 걸인들은 모두 독상을 받았다. 맨 발이거나 신발이랄 것도 없이 다 헤진 고무신을 끄는 걸인들은 마루에 오르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무척 송구해했다. 그냥 마당의 감나무 아래에서 먹겠다고 사양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손을 잡아 마루에 앉혔다.

밥은 늘 반 그릇만 담아주라고 했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급히 먹다가 급체로 탈이 난다며 천천히 다 먹어가면 다시 반그릇을 담아주도록 했다. 지혜로운 처사였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늘 낮은 곳을 바라보는 인간애에 있었다. 현장을 둘러보고 오시는 해거름에 그 때까지 다 못 팔고 앉은 장사꾼들의 물건을 떨이해주는 것으로 난전 장사의 고충을 덜어드렸다. 우리에게도 점방을 가진 이보다 난전의 형편이 딱하니 반드시 더 가난한 이를 눈여겨 보라고 일렀다.

청소년기의 일이다. 경주는 통금이 없는 도시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무척 잠귀가 밝았다. 하루는 새벽 세시 경 아버지가 방문 밖에서 내 이름을 살짝 불렀다. 아버지의 손길을 따라 식구들 모르게 우리는 밤길을 걸었다. 아버지가 길 건너편을 보라고 했다. 달밤이었고, 사람들이 커다란 트럭 위에 수북이 올라가 거대한 통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땔감이 부족한 이들이 어차피 제재공장에서 벗겨질 껍질을 가져가 쓴다고 했다. 아버지의 공사관계로 나무토막이 넘치던 내가 몰랐던 장면이었다.

"자, 어떠노? 저게 삶이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그따우 시를 쓰지 말고 바로 저런 시를 써라!"

술이 거나한 아버지의 눈에 설핏 눈물이 비쳤는지 기억은 없다. 그러나 목소리는 음울했다. 나의 문학이 서정에서 현실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대표적 친일시인인 노천명을 닮지 말라는 아버지의 충고로 세상의 할 말을 대변할 소설가가 되었다. 나의 글은 아직 미미해서 지방에서나 알아주는 무명이다. 그러나 명성 따위에 흔들리지는 않는다. 힘의 논리에 연연해하지 말고, 낮은 곳을 눈여겨 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잊지 않기에...늘 내 가슴 속에 살아계시는 아버지는 나보다 젊다.

▲ 아버지는 내 정신의 틀. 펜을 꽂은 이가 정의를 외치던 저의 아버지입니다. 72년 된 사진.

 

이미진 주주통신원  lmijin0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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