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설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복종』(미셸 우엘벡, 문학동네, 2015)은 제목마저 도발적이니 왜 망설이겠는가. 그렇게 마주한 “나”는 “파리-소르본 대학” 정교수다. 특정 작가 연구로 입지를 다진 40대 중반이다. 그의 일상은 바삭한 크래커처럼 건조하며 위태롭다. 학부 여학생들과 “일시적인 성관계”를 맺거나 “포르노 사이트”를 애용하는 평균치 속물이다. 하지만 내심 육체적 노화에 위축되어 있다. 물론 남 보기에는 버젓한 삶이다.

“나”가 훑은 “프랑스 사회 전반에 깔린 정서”는, “일어나게 될 일은 일어날 것이다”로 체념한 “침묵하기”다. 더 이상 “끊임없이 실현되는 암울한 예언들”에 휘둘리지 않는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피로해 하는 듯했고”, 특히 “나”가 “교류하는 세계에서는 이 피로감이 다른 어느 곳보다 두드러졌다.” 급기야 “언론이 완전히 입을 닫”은 “대선”에서 “이슬람박애당”이 승전한다. 프랑스 정수리에 이슬람 깃발이 꽂힌 것이다.

피로감, 침묵하기 등은 대중의 맥 놓음이다. 경위야 어떻든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복종』은 그러한 세태를 씨줄로 하고, 학문과 연애사에서 정점을 지난 “나”의 무기력을 날줄로 하여 목표 잃은 삶의 퍽퍽한 우울을 자아낸다. 그러다 급커브로 이슬람의 일부다처제에 ‘복종’하는 풍경들을 들이댄다. 결국, 미성년자를 아우른 4명의 아내와 함께할 수 있는 이슬람으로 “나”가 개종할 것임을 암시하며 끝난다.

그러니까 『복종』은 이슬람에의 복종이다. “지배적 수컷의 위치”를 지키려는 탐욕을 “인간 행복의 정점은 완전무결한 복종에 있다”로 에두른 삶의 방식이다. 최근 불거진 ‘불륜사이트 <애슐리 매디슨> 해킹’ 사건(지난 8월 24일 한겨레 17면)은, 기득권자 CEO들조차 수컷임을 확인하고픈 열망에 낚였음을 지구적 차원으로 입증한다. 그 행복의 질을 따지기도 전에, 『복종』은 개연성이 있는 세계 현상으로 자리매김된 셈이다.

『복종』이 출간된 날, 프랑스의 비주류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사건이 일어났다. IS로 시끄러운 터에 튀어나온 『복종』에게서 굳이 ‘키산드라’의 역할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게다. 차라리 우리가 사는 ‘지금-여기’에 스민 욕망의 넘사벽이 이슬람일 뿐인가에 대해 돌아보는 게 낫다. 우리 사회는 성추행이 고질병이므로 특히 그렇다. 『복종』을 덮으며 '지금-여기'의 가부장제사회가 선한 욕망의 넘사벽을 몽상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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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넘사벽 :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의 준말. 주로 둘을 비교할 때 더 잘난 쪽의 잘남을 극도로 과장하기 위한 표현이다. 어마어마한 차이를 나타냄.(지식iN 오픈국어)

※ 키산드라 :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 함락을 경고한 여성 예언자. 닥칠 변화를 인식하여 조기 경보를 외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 · 편집 : 김유경 편집위원

 

김유경 편집위원  newcritic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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