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 골방’(약 1.5평의 독거 감방)에서 온 편지(한겨레 8월 29일치 르포2)를 읽었습니다. 며칠을 망설이다 회신하자 맘먹었습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이어지는 여행”을 권하시는 목소리를 떨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투쟁하다 어이없이 잡혀간 사람의 글이 어찌 그리 정감한지요.

▲ 한겨레 자료사진: 박래군 ‘4월16일의 약속 국민연대’ 상임운영위원이 지난 7월 22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서울중앙지검으로 송치되기 위해 호송버스에 오르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저는 ‘머리에서 가슴으로’나 여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에 공감하면서도, 제 동선은 익숙한 일상 언저리를 거의 벗어나지 않습니다. 평택 대추리, 서귀포 강정 마을, 용산참사, 세월호참사 등을 먼발치로 지켜보며 발을 구를 뿐, 그 장소에 발바닥을 대지는 않습니다. 발바닥은 감촉이 정확한 부위여서 자칫하다 저를 길 위로 내몰 좌파 성향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지난 4월 세월호광장에 처음 갔습니다. 광장으로 향하는 지하도 입구에서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습니다. 그 무엇인가를 마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뼛거리며 세월호 정부시행령 폐기를 내건 농성장 주변을 맴돌다 재야인사 유성효 씨와 유민 아빠 김영오 씨 옆에 앉았습니다. 농성장 집기가 날아가는 먼지바람을 맞으며 빨갱이라 삿대질하는 악다구니를 보았습니다. 휠체어를 탄 여성이 적극적으로 비호할 뿐, 농성장은 무방비했습니다.

그 ×같은 정경 앞에서 어떤 언행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온실 속 환경에서나 활개치는 조건부 역량임을 그 짧은 순간 알아챘습니다. 그 다음날 호되게 앓은 후에 한 번 더 세월호광장을 찾았지만, 지금까지 ‘4·16연대’, 세월호광장 분향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단원고 명예 3학년 교실, 팽목항 등에 일체 걸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발로 하는 여행’을 가슴에 빚으로 얹은 채 지내고 있습니다.

방금 ‘4·16연대’ 누리집을 방문했습니다. <500일, 기억과 기다림의 날> 영상과 해외에서 보내온 메시지들을 보았습니다. 연대의 필요성을 깨달은 이들의 자발적 동참을 보며 ‘다행이다’ 자위하는 저는 분명 늦깎이입니다. 그래도 제 몫이 있을 거라 여깁니다.

박래군 선생님!                                                           경희대 후마니스타칼리지에서 인권수업을 들은 인연으로 면회하는 학생들만 선생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디뎌야 할 연대의 길을 먼저 닦으시니, 나이는 서넛 위인 저도 그 길의 제자입니다. 모쪼록 안팎으로 두루 건재하시기를, 귀뚜라미나 거미의 방문보다 제 두드림이 더 반갑기를 기원합니다.

                                2015년 9월 4일 길 위에서 제자 김유경 올림

김유경 편집위원  newcritic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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