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통신원] 최홍욱 주주통신원

[편집자주]이 땅에 민주화를 열망하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인류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해냈습니다.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라 폄하하거나 특수한 상황이 빗어낸 우발적인 일이라 치부할 수 없었습니다. 26년이 지난 지금, 하나하나 모여 6만7,000명의 소망을 담은 ‘한겨레’가 살아 있습니다. 처음 대중을 위해 신문을 만들던 많은 언론사들이 일제치하에서 또는 기득권 세력, 독재의 힘에 굴복했던 것과 달리 ‘한겨레’는 26년이 지난 지금도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처음 ‘한겨레’에게 숨을 불어 넣은 ‘우리’는 ‘한겨레’에게 아낌없는 지지와 애정 어린 비판을 계속 보내고 있습니다. 2014년 9월 19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 본사 청암홀에서 나왔던 목소리는 ‘한겨레’에 대한 기대와 애정, 지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습니다.

----------------------------------------------------------------------------------------------------

지난 9월 19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 청암홀에서 열린 ‘한겨레 주주통신원 출범식’ 행사 1부의 마지막 순서가 진행됐습니다.

한겨레 정영무 대표이사의 환영사, 한겨레 주주통신원 준비위 허창무 위원장의 인사말, 그리고 한겨레사우회 성한표 회장과 성유보 초대 편집국장의 축사, 한겨레 임원진 소개, 한겨레 주주통신원 정석구 편집위원의 편집방향 설명이 끝나고 주주통신원 위촉장 전달이 시작됐습니다.

이 자리에서 주주통신원들은 포부와 함께 한겨레와의 인연도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기대했던 한겨레에 대한 서운한 점과 부족한 점에 대한 성토도 이어졌습니다.

위촉식은 호명된 5명의 통신원들이 무대로 나가 정영무 대표이사에게 위촉장을 받는 형식으로 진행됐습니다.

경기의 구정희(62년생) 통신원을 시작으로 위촉장 전달과 주주통신원들의 소감과 의견이 이어졌습니다.

이날 참석한 주주통신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권지애(여·80년생) 통신원은 “어머니가 주주여서 신청했다”며 “열심히 활동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소감을 밝힌 경기 이호균(48년생) 통신원은 “요즘 신문을 보면 불안한 세상이다”며 “이를 빨리 청산하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경남의 최영록(58년생) 통신원은 한겨레신문의 변함없는 정론직필을 부탁했습니다. 최 통신원은 “해방 이후 우리 역사는 거짓과 날조, 배신이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며 “애국보다 진실이 더 중요하다. 지금 이시대에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이어 “헌법에 보장된 3권 독립과 제 4부라 불리는 언론이 있다”며 “한겨레신문이 정론직필 할 수 있도록 힘 될 때까지 보태고자 한다”고 한겨레신문을 응원했습니다.

무대에 오른 경남의 정대화(39년생) 통신원은 한겨레신문의 소통부재를 지적한 뒤 초심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했습니다. 정 통신원은 “여러 동지들 반갑습니다”며 인사를 건넨 뒤 “신문 구독을 끊고 한겨레를 떠났었다. 한겨레와 소통을 하고 싶어 수차례 연락했지만 직원 응대가 불친절 하는 등 제대로 되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세계적인 신문인 한겨레지만 소통과 우리 요구를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해 ‘한걸레’라며 조롱하고 있는 세력도 있다”며 “이 자리에 오는 것을 망설이다 왔다. 병이 들었으면 진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심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마무리했습니다.

부인도 모르게 한겨레 주주로 참여했던 광주의 김성대(53년생) 통신원은 한겨레신문과 주주들이 모두 함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김 통신원은 “창간할 당시 36살, 광주 민주화바람이 불 때 직장에 다니면서 젊은 혈기로 주주로 참여했다”며 “집사람도 모르게 내 이름으로 100주, 집사람 이름으로 20주, 아이 둘에게 각각 10주씩 모두 140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피눈물 나는 노력과 열정으로 우리나라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자부하며 살았다”며 “혹시 안기부에 끌려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며 밤을 지새웠던 시기도 있었지만 무사히 정년퇴직하고 광주에서 문인 활동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김 통신원은 “주주 여러분의 한마음 한 뜻으로 한겨레와 같이 끝까지 민주화의 꽃이 필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해군을 나왔다는 광주의 최동연(45년생) 통신원은 “연평해전 때 무용담 등으로 매스컴에 소개된 적이 있고 1967년 오륙함 침몰현장에 있었다”며 “천안함에 대한 진실을 한겨레신문에서 밝혔으면 한다”고 밝혔습니다.

같은 광주의 천준길(45년생) 통신원은 멋진 한시로 소감을 대신했습니다. 천 통신원은 “작게나마 한겨레 발전을 위해 주주로 참여한지 20여년이 지나서야 처음 본사에 왔다”며 “처음 기대에 어느 정도 맘에 드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주주들도 뵙고 싶었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이어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이라며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제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남긴 내 발자취는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라고 마무리 했습니다.

부산의 신인식(51년생) 통신원은 보수와 진보가 함께 할 수 있는 한겨레신문을 제안했습니다. 신 통신원은 “한겨레신문 본사 청암홀 벽 입구 인물을 현실(고생하신 분들)에 맞게 변경해 주길 바란다”며 “(한겨레신문 주주로 참여하면서) 보안법 처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습니다. 이어 “최고의 신문이 되려면 좌우가 함께 나갈 수 있어야 하고 현실에서 가장 앞차고 나가야 한다”며 “신문 지면에서 보수와 진보가 균형에 맞게 배치돼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습니다.

서울의 김선태(44년생) 통신원은 한겨레를 응원했습니다. 김 통신원은 “소액주주로 참여해 한겨레에서 두 번째 위촉장을 받는 것이어서 감회가 새롭다”며 “지난 1999년 하니리포터로 활동하면서 7년간 연재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기다리고 응원 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창간 당시 대학생이었던 서울의 김일래(70년생) 통신원은 기준이 되는 한겨레신문을 위해 함께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김 통신원은 “한겨레신문이 대학에 입학할 때쯤 창간을 해 창간부터 계속 구독하고 있다”며 “제호에 있던 백두산 그림을 보면 무언가 찡한 느낌을 받았다”고 창간당시 한겨레신문을 본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어 “어느 신문보다 진실을 말하는 신문, 무언가 모를 때 기준이 되는 신문,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신문이 되길 바란다”며 “주주로서 그 몫을 해나가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서울의 이광찬(40년생) 통신원은 첫 한겨레신문이 언급됐던 현장에 함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이 통신원은 “동아일보 사건이후 송건호 선생님을 위로한다고 모인 자리에 참석하게 됐다”며 “이 자리에서 송 선생님은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국민주를 통해 신문을 세상에 내놓겠다는 포부를 밝혔지만 다들 가능하겠냐는 반응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이어 “사회보장심의원회와 유엔 사회연구회 등 사회복지 관련 위원 활동을 했었다”며 “우리나라는 우리 실정에 맞는 복지제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지도부의 이익을 위한 제도를 만들었다”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이상직(55년생) 통신원은 “26년간 주주라는 것을 잊고 살았다”며 “오늘, 거듭나 열심히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지난 2001년부터 2006년까지 한겨레신문에 만평을 기고했던 서울의 정신(62년생, 정화영 만평) 통신원은 힘닿는데 까지 노력하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정 통신원은 “21세기에도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이렇게 말살돼도 되는지”라며 물은 뒤 “시사만평을 못하고 있는데 앞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오늘 이 시간을 통해 한겨레 주주통신원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가겠다”며 “발전을 위해 마련된 자리인 만큼 힘닿는데 까지 노력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서울의 지정부(36년생) 통신원은 주주통신원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언급했습니다. 지 통신원은 “주주통신원 광고를 보고 언론 통폐합 등 통제가 심했던 시기가 생각났다. 그때 한겨레가 태동했다. 그래서 결심하고 참여했다”며 주주통신원 참여 계기를 밝혔습니다. 이어 “전국 각지 6만7천 주주 가운데 주주통신원에 참여한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여기서 맺어진 인연을 계기로 한겨레신문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늙은 나이에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위촉장을 받아 흐믓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인천의 이상준(36년생) 통신원은 “우리 모두가 한길로 가고 있다”며 “한겨레신문이 중앙신문 말고 다른 신문 사설도 비교했으면 한다”고 소감을 말했습니다.

전남 완도의 마광남(43년생) 통신원은 “바다가 그리울 땐 연락주세요. 안주는 충분합니다”라며 주주통신원들을 만난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딸 아이 돌 반지를 팔아 주주로 참여했던 이선혜(59년생) 통신원은 한겨레신문이 자녀들의 지표가 되길 희망했습니다. 이 통신원은 “지방대를 나와 취직을 못하고 시조부님을 모시고 살 때 유일한 위로가 한겨레신문이었다”며 “당시 참여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어 여식 돌 반지를 팔아 한겨레신문 주식 100주를 샀다”고 주주참여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이어 “그때 딸아이들이 이제 29살과 32살인데 이들의 지표가 될 수 있는 한겨레신문이 되길 기원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최고 연장자인 전주의 이용산(24년생) 통신원은 한겨레신문을 더 많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주의 임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통신원은 “나는 젊은이들한테 배우고 젊은이들은 역사를 통해 배워라”며 “역사적인 기록물, 역사서 같은 한겨레를 더 많이 볼 수 있도록 협조하는 것이 우리(주주)의 임무다”고 밝혔습니다. 또 “이 자리에 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주주통신원에 위촉된 소감을 덧붙였습니다.

전북 고창의 송광섭(60년생) 통신원은 독자배가 운동과 서민을 위한 한겨레신문이 되길 부탁했습니다. 송 통신원은 “사장님 이하 직원들이 다시 창간운동을 이끌고 다 함께 독자 배가 운동을 열심히 하길 바란다”며 “한겨레신문이 조금 더 약자와 서민을 위한 시각에 맞춰졌으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날 한겨레 주주통신원 출범식 행사 1부는 참석한 주주통신원 60여명에게 위촉장 전달을 끝으로 마무리 됐습니다.

 

최홍욱  ico@chonbuk.ac.kr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