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진주형씨는 중국 주나라와 어떤 인연을 맺었을까? 그 단서는 형시백 선생이 지은 족보의 서문에서 보인다.

형시백(1901.12.14.-1990 06.05. 향년 90) 선생은 병사공의 17대손이다. 195757세 때 <진주형씨파보(병사공파)>의 간행사업에 참여하였다. 2대 진주형씨대종회장(1981-1982)을 역임했다.

그분은 한약에 조예가 깊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1970년대 중반 고등학교 시절에 잔병치레가 유난했다. 선친께서는 집안의 형뻘인 형시백 선생과 함께 한약방에 직접 가서 약을 지으셨다. 그때 처방은 그분의 몫이었다. 선친께서는 그분을 정중히 대하셨다. 그분은 선친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셨다. 젊은 나이에 족보 간행 작업 때 많은 공력이 들어가는 정서(正書)를 하느라 수고한 선친을 그분은 오랫동안 고마워하고, 격려했다. 두 분은 족보 간행의 뜻인 효제지심(孝弟之 心)을 실천한 본보기이다.

형시백 선생이 지은 서문의 원문과 음,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자료: 진주형씨파보(병사공파), 1957.01.
자료: 진주형씨파보(병사공파), 1957.01.

 

<번역문>

생각건대, 우리 대동보 출간은 1923년 계해년에 이미 한 번 이뤄졌으니 이제 족보를 다듬기에 늦지는 않았는가? 문중에서 족보를 만들어 두고자 함은 돌아가신 분의 순서, 벼슬살이, 덕행, 공과 업적, 문장 등을 잘 정리하여 비록 백 세대만큼이나 시간이 멀리 떠나가더라도 반드시 중국 고대의 기()나라와 송()나라의 이력을 증거가 없어서 고증하지 못한다는 탄식을 없이하고자 함이다.

예전의 족보를 보면, 예판공 형찬(邢贊)은 남원 주포(전북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에서 비로소 거주하고 아들 넷을 두었다. 셋째 아들은 전서공 형군소(邢君紹)이다. 넷째 아들인 병사공 형군철(邢君哲)은 우리의 병사공이고, 남원 주포로부터 이사하여 남평 남쪽 화두촌(현 전남 나주시 남평읍 우산리 차산)에서 비로소 거주하였다. 도곡공 형세영(邢世英)에 이르러 능성(綾城) 서도장동(현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으로 이사하여 터전을 잡고 거주하였다.

대체로 형나라는 본래 노나라 초대 군주 백금(周公의 첫째 아들)의 동생에게 봉한 땅이다. 형씨는 그 유래가 뚜렷하기에 학사공 형옹(邢顒)을 시발점으로 삼는다. 우리 형씨 본관은 중국 제음(濟陰; 산둥성 허쩌시 딩타오구(山东省 菏泽市 定陶区)의 일원)이었다. 학사공에서 시작하여 그 후손이 이어졌다. 고려 시대에 형공미(邢公美)는 진양군으로 봉해졌다. 이에 근거하여 자손들은 진양(晉陽; 현 경남 진주시 일원)을 성의 본관으로 삼았다.

당나라 태종 정관 시기에 고구려 영류왕이 문교의 뜻을 선포하고 훌륭한 학자를 초청하자, 8학사가 동쪽, 즉 우리나라로 왔다. 형옹 역시 함께 왔다. 이때부터 대대로 이름난 관리가 연달아 나왔고 장원급제가 끊이지 않았고 지체가 상당한 문중이었다. 세상 사람은 현족(顯族)이라 불렀다. 근대에 이르러 한미하고 쇠해졌다. 오직 조상의 숨은 은덕이 회복되기를 바랄 뿐이다. 오직 여러 종친은 가까이 살거나 멀리 살거나 친하거나 덜 친하거나를 가리지 않으면서 서로 두터운 정을 펼치고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을 서로 권한다면, 우리 문중은 부흥하여 억으로도 숫자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창대하지 않을지를 어찌 알겠는가?

정유년 정월 하순

후손 형시백(邢時伯) 삼가 쓰다.

 

자료: 형광석 엮음, 진주형씨입향오백년, 2019.04.
자료: 형광석 엮음, 진주형씨입향오백년, 2019.04.

대체로 형나라는 본래 노나라 초대 군주 백금(周公의 첫째 아들)의 동생에게 봉한 땅이다.” 이는 원문의 6열과 번역문의 세 번째 문단에 나온다. 고대 중국 주나라 성왕(成王)은 주공의 넷째 아들 정연(靖淵)을 형후(邢侯)로 봉하여 형나라(邢國)을 세웠다. 자손은 마침내 형나라의 본을 받들어 형씨(邢氏)라고 불렀다. 주공은 형씨 성의 시조이다. 한국의 진주형씨 시조는 형후 35세 형옹(邢顒)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왔다. 요컨대, 형씨는 주공의 후예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원문의 7열과 번역문의 세 번째 문단에서 서문의 필자는 말하길, “우리 형씨 본관은 중국 제음(濟陰)이었다.” 말하자면 형()씨는 제음 형씨이다. 이는 하남 정씨’(河南 程氏)와 비슷한 닮은꼴이다. ‘하남은 중국의 하남이다. 우리나라에서 하남 정씨의 집성촌은 전남 담양군 일대이다. 제음은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산둥성 허쩌시 딩타오구(山东省 菏泽市 定陶区)의 일원이다. 아직 공부가 부족하여 나는 제음이 형씨의 본관이라는 전거를 찾지 못했다.

싱타이시와 허쩌시의 거리 약 230km
싱타이시와 허쩌시의 거리 약 230km

지급시(地級市; 성과 현 사이의 행정 구역)인 허쩌(菏泽: Heze)는 산둥성의 남서부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한편 싱타이(邢台; 형태)는 중국 북부의 오래된 도시이다. 현재 중국 허베이 성(河北省)의 지급시이다. 중국 고대에 형()나라가 이곳에 세워졌다. 이런 까닭에 싱타이(邢台)로 불린다. 그 주변은 서쪽으로는 산시성, 동쪽으로는 산둥성(山东省)이다. 싱타이시와 허쩌시 간의 직선거리는 약 230km(구글 지도에서 거리 측정)이다. 이처럼 두 지역은 가깝다.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제음이 형씨와 맺은 인연이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상상은 무의미하지는 않겠다.

원문 10열에 잠영문벌’(簪纓門閥이 나온다. 이를 번역문 네 번째 문단에서 지체가 상당한 문중으로 옮겼다. ‘잠영은 높은 벼슬아치가 쓰는 쓰개의 꾸밈이라는 뜻으로, 높은 지위(地位)를 이르던 말이다(<네이버 한자사전>). 동곳 잠’, ‘비녀 잠이다. 동곳은 상투를 튼 뒤에 그것이 다시 풀어지지 아니하도록 꽂는 물건이다.  동곳은 여성들의 비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상투를 트는 풍습에서 생겨났다.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거의 보기 어렵지만, 동곳이 남성용이라면, 비녀는 여성용이다. 갓끈 영이다. 잠영은 사극에 등장하는 의관정제(衣冠整齊)한 벼슬아치가 머리에 쓰는 쓰개이다. 따라서 簪纓에서 동곳 잠으로 읽어야 합당하다.

은제동곳(고려 시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은제동곳(고려 시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한국의 진주형씨는 공자가 숭앙했던 주공(周公)의 가문과 인연이 깊다. 공자는 주공의 아들인 백금이 다스리던 제후국 노나라의 출신이다. 형나라는 노나라 백금의 동생이 다스리던 제후국이었다. 형후(邢侯)의 후손이 고구려 영류왕의 초청을 받아 소위 ‘8명의 학사중 한 명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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