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심사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공정하게 진행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해 업적을 남기고 공훈을 쌓았다면 그분을 기리고 그 희생에 보답해야 한다. 그것이 ‘보훈’(報勳)의 기초이자 원리이다. 공훈을 남겼는데도 보답이 없다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가 나서서 희생하려 하겠는가?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이 보답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국가공동체라면 공동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들에 대해 위로와 보답은 당연하다. 공동체의 지속성과 국가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그런 까닭에 여느 국가든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억하고 그 후손들을 보살피는 일은 인간사회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보훈’(報勳)정책은 ‘배려와 돌봄’에 기초해 있어야 하며 공훈 심사는 객관적 사실에 기초해 ‘공정’해야 한다.

 필자는 최근에 접한 두 가지 공훈 심사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모두 보훈처 심사과정에 문제가 있기에 몇몇 학자나 관련 인사들이 언론을 통해 몇 차례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 글은 보훈처 심사위원회의 개혁을 촉구하는 성격을 담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는 제2차 동학농민혁명을 항일구국투쟁으로 기술하고 있다(출처 : 하성환)
한국사 교과서에는 제2차 동학농민혁명을 항일구국투쟁으로 기술하고 있다(출처 : 하성환)

먼저 지난 날 잘못된 서훈 기준이나 낡은 기준을 정비해야 한다. 대표적인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현행 한국사 교과서엔 제2차 동학농민혁명을 ‘항일구국투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본군이 조선의 정궁, 경복궁을 난입해 점령한 탓이다. 이 사태를 지켜본 동학농민군은 다시 논산에 집결해 서울로 진격해 들어가서 일본군을 쫓아내려 했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신식무기로 중무장한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수만 동학농민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듬해 다시 일제가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흩어진 동학농민군은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그들 중 다시 살아남은 자들이 을사늑약 당시 을사의병에 참여하였고 1909년 일제의 남한 대토벌작전으로 의병들은 국경을 넘어 동북만주와 러시아령으로 이동해 항일구국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인물들 가운데 9명이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에 포함돼 있다. 동학교도, 즉 천도교인들 15명 가운데 9명이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이다.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제1인자였고 3‧1 만세운동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손병희 선생 역시 제2차 동학농민혁명에 우금치 전투에 스승 최시형 선생, 전봉준 장군과 함께 참여하였다.

<동학네트워크 정읍문화제>에서 박용규 박사가 <항일투쟁의 총사령관 전봉준 장군 - 독립유공자 서훈해야>라는 주제로 전봉준 장군 고택에서 강연하고 있는 모습(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동학네트워크 정읍문화제>에서 박용규 박사가 <항일투쟁의 총사령관 전봉준 장군 - 독립유공자 서훈해야>라는 주제로 전봉준 장군 고택에서 강연하고 있는 모습(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그런 측면에서 3‧1만세운동은 동학농민혁명의 정신, 바로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항일독립운동이었다. 문제는 아직도 전봉준과 최시형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을미의병에 나선 의병들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면서 제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해선 어느 한 사람도 서훈을 받질 못했다. 보훈처 심사위원들이 깊이 성찰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연변박물관에 전시된 최운산 장군 초상화 (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연변박물관에 전시된 최운산 장군 초상화 (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다음으로 봉오동 전투의 주역 최운산 장군에 대한 이중 서훈 문제이다. 2008년 보훈처는 최문무(최운산의 다른 이름)를 독립유공자로 뒤늦게 서훈하였다. 그런데 최문무는 본명이 최명길이고 최운산, 최고려, 최만익, 최풍, 최복, 최빈은 최문무 장군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최문무(최운산) 장군은 1920년대 군자금 모금과 1937년 보천보 전투의 배후로 모두 6차례 투옥된 항일독립지사이다. 뒤늦게 1977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보훈처의 심사 역량에 심각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보훈처는 최운산 장군 후손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연구나 재심사를 심도 있게 진행하지 않은 채 동일인물에 대해 이중 서훈 문제를 여전히 방치하고 있다.

피 묻은 태극기( 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사진자료)봉오동 전투(1920. 6. 7.) 의 주역인 최진동 장군, 최운산 장군이 지휘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이 <봉오동 전투> 당시에 썼던 태극기
피 묻은 태극기( 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사진자료)봉오동 전투(1920. 6. 7.) 의 주역인 최진동 장군, 최운산 장군이 지휘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이 <봉오동 전투> 당시에 썼던 태극기

 마지막으로 올해는 봉오동 전투 100주년 되는 기념해이다.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은 최진동 장군이다. 결코 영화 <봉오동 전투> 장면처럼 홍범도가 아니다. 일개 연대장에 지나지 않은 홍범도를 봉오동 전투의 영웅으로 추어올리는 데엔 역사학계의 학문적 게으름이 짙게 깔려 있다. 오죽했으면 최운산 장군 후손들이 직접 봉오동 격전지를 방문해 봉오동 전투 현장을 재설정하였겠는가? 봉오동 전투 현장이 기존 역사학계에 알려진 곳에서 10km 거슬러 올라간 봉오동 상촌임을 규명하였다.

문제는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영웅인 최진동 사령관을 보훈처가 친일파로 규정해 서훈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데 있다. 아직 국무회의를 통과하진 않았지만 그 와중에 최진동 장군 후손들에게 소명 기회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내린 취소결정이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보훈처가 주장하는 최진동 장군의 친일 혐의는 1910년대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의 중국 군대 복무 경험과 중국 국적 취득 사실, 그리고 1920년 6월 봉오동전투를 예견하며 정예독립군, 군무도독부 670명을 1912년부터 훈련시켜 온 역사적 사실을 간과한 데 있다. 나아가 최진동 장군의 100원 국방헌금 납부와 귀순 선무 활동 역시 최진동 장군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항이다.

 고문후유증으로 생사를 오가는 와병 중에 발생한 일로서 이미 몇 차례 학술대회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보훈처 심사가 좀 더 공정한 역사적 사실과 독립운동사 연구에 기초해 서훈 취소 결정을 재고해 주길 기대한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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