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의 전설(1) 최진동 장군이 친일파?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독립투사 최진동 하성환 객원편집위원l승인2019.09.10l수정2019.09.12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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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월간지 『말』 2003년 10월호에 연변 작가 류연산은 "항일에서 친일로 변절한 인물 : 봉오동 전투의 최진동은 독립투사가 아닌 친일파"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리고 1년 뒤 작가 류연산(2004년 당시 연변 조선족 자치주 대표회의 상무위원)은 일제시대 반민족 행위에 앞장선 친일 인사들을 소개한 책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2004)를 펴냈다. 그 책엔 박정희, 백선엽, 정일권, 최남선 따위 친일인물과 함께 최진동을 친일파로 소개하고 있다. 책에 실린 내용은 월간 『말』에 소개한 내용을 그대로 전재한 것으로 특별히 다른 점은 없다.

필자는 본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로 북만주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를 소개하고자 자료를 찾던 중이었다. 우리역사에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귀감이 될 인물로 자라나는 후손들을 위해 기록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는 봉오동 전투의 전설적 인물임에도 한국사 교과서는커녕 일반 시중 근현대사 서적에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보통 30대 이하 젊은 세대들은 학교교육을 통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우당 이회영을 기억한다. 그러나 40대 이후 세대는 학교교육을 통해서 배운 우당 이회영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더구나 봉오동 전투(1920) 당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최씨 3형제를 모르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 우당기념관(서울시 종로구 신교동 소재)

나라가 망하자 6형제 집단 망명을 주도하고 600억 전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통해 3500명 독립군을 길러낸 아나키스트 항일혁명가 이회영! 우당 선생의 치열한 삶을 기리기 위해 1990년 동숭동에 우당기념관을 건립하였고 2001년 서울농학교 앞 현재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출처 : 하성환)

필자는 '최진동이 독립투사가 아니라 친일파'라는 연변 작가 류연산의 글이 정말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먼저 2009년에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최진동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수많은 역사사료와 자료를 검토하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각고의 노고 끝에 펴낸 역작에 최진동에 대한 친일의 기록은 단 한 줄도 없었다.

류연산이 문제제기한 2003년과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된 2009년은 시차가 작지 않다. 그럼에도 전문연구자들은 최진동을 친일인물로 분류하지 않았다. 오늘날 조중동 신문 사주들 원조인 방응모(조선일보), 김성수(동아일보), 홍진기(중앙일보)가 하나같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친일파로 분류돼 있는 것과 사뭇 다르다.

연변 작가 류연산은 최진동이 "만주사변(1931) 이후 일제에 투항했을 뿐 아니라 비행기 한 대 살 엄청난 돈을 일제에 기부하여...(중략)...절개를 버리고 친일파로 전락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1938년 일본군 토벌대의 선두가 되어 항일무장세력 진압에 앞장선" 인물이자 일제가 내세운 꼭두각시 국가"만주국의 건국이념을 받들고 독립운동을 했던 과거사를 용서받기 위해 일제에 충성의 선물로 비행기를 헌납했던" 친일파로 규정한다.

그러면서 최진동이 "1941년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며 "시간으로 계산하면 겨우 3년을 더 살려고 일제한테 무릎을 꿇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일제는 최진동의 "친일 공적을 높이 기리어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주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검토해 본 결과 최진동은 항일무장투쟁 전선에서 이탈한 후 뚜렷하게 친일한 행적이 없다. 따라서 연변 작가 류연산의 주장에 대해 다음 세 가지를 반박하고자 한다. 그리고 봉오동 전투(1920)에서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야말로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자취를 남긴 인물임을 제대로 평가해 주고 싶다. 나아가 한국사 교과서에 최씨 3형제가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삶이 서술되길 소망한다.

첫째로 연변 작가 류연산이 주장한 '일본 제국주의에 비행기를 헌납했다'는 비판이다. 류연산이 비판한 비행기 헌납 건은 구체적인 증거나 사료가 없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제헌국회에서 반민법이 통과되고 반민족행위자(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특위가 1948년 10월에 결성된다. 반민특위 활동은 1949년 1월 초에 본격적으로 가동된다.

당시 반민특위 조사관에게 신문을 받던 이기권에 대한 「의견서」나 「피의자 신문조서」에는 최진동에 대한 이야기가 기술돼 나온다. 이기권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밀정으로 의심을 받던 인물이다. 그리고 관동군 촉탁으로 활동했다는 혐의 때문에 반민특위에서 조사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기권에 대한 「3차 피의자 신문조서」(1949. 8. 16)에는 최진동이 일본군으로부터 독립군 선무공작을 강요받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최진동이 1926년 12월 비록 일제에 형식적으로 귀순하였지만 그들의 요구대로 순순히 선무공작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본 헌병대장이 만들어준 귀순 권유문을 살포하기보다 포장 대용 용지로 썼다는 진술이 나온다.

최진동은 귀순 후 도문에서 살고 있었는데 연길현 대흥구에 있는 자신 소유 3만 정보에 달하는 임지에 대한 벌목허가를 일제로부터 받고자 하였다. 그 이유는 이를 기반으로 혹시 있을지 모를 귀순 독립군들의 생활안정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물론 최진동은 한인독립군에 대해 귀순 공작을 실행하지 않았다.

「증인신문조서」(1949. 8. 18)에서 아나키스트 이정규 역시 이기권과 비슷한 취지로 진술한다. 이정규는 이회영 선생과 함께 북경 등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열혈독립투사이다. 이정규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8년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후 출옥한다. 이정규는 출옥 후 일제의 요시찰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이기권이 운영하던 만주로 가게 된다.

거기서 이정규는 최진동 자택 사무실에 '관동군 위촉 선무공작부'라는 간판이 내걸린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최진동은 일본 헌병이나 관헌을 접대하던 공간으로 썼을 뿐이라고 진술한다. 겉으로 선무공작을 하고 있다는 표시로 간판을 내걸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실제로 단 한 명도 최진동은 선무공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무공작을 미끼로 일제를 역이용해 임지 벌목허가를 받고자 했을 뿐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기권에 대한 「4차 피의자 신문조서」(1949. 8. 19)에도 최진동이 일제의 강권으로 부득이 선무공작을 표면적으로 표방하였다는 진술이 나온다. 그러면서 최진동은 이를 역으로 이용해 연길현 대흥구 삼림벌채권을 받아내 귀순 독립군들에게 경제적으로 안정된 직장과 생활환경을 제공해 주고자 하였다는 이기권의 진술이 나온다.

그러나 최진동은 일제로부터 끝내 허가장을 교부받지 못했다. 그리고 1941년 11월 고문후유증으로 별세했다. 최진동의 자택에 있던 선무공작 간판은 1941년 6월부터 1942년 봄까지 7~8개월 정도 내걸렸을 뿐이다. 그 기간 최진동은 위중할 정도로 와병 중이었고 이렇다 할 친일의 행적을 남기지 않았다.

이기권에 대한 「6차 피의자 신문조서」(1949. 8. 28)에 나오듯이 오히려 최진동은 자신의 벌목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표면상 선무반 간판을 내걸고 일제와 교섭했을 뿐이다. 최진동이 비록 와병 중이었지만 1941년 11월 25일 향년 58세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게 된 데엔 일본헌병대의 극악한 고문후유증 때문이었다.

흑룡강 출판사에서 펴낸 『최진동 장군』(2006)에는 연변 작가 류연산의 주장과 달리 최진동은 자신의 항일의지를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최진동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도문 일대 넓은 땅을 일제가 군용비행장 확충용으로 이기권을 앞세워 강탈해 가려 하자 극렬히 저항했다.

그러자 일제는 최진동과 몇 차례 교섭을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돌연 헌병대로 끌고 가 극악한 고문을 가했다. 부득이 최진동의 아내 최순희 여사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판단하여 강제적으로 계약서에 지장을 찍게 했다. 그렇게 최진동의 도문 일대 땅은 일본군 군용비행장으로 강탈당했던 것이다. 결코 최진동이 자진해서 헌납한 것이 아니다.

일본헌병대는 고문의 악형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자 최진동을 집으로 데려가라고 석방했다. 헌병대에서 풀려난 지 최진동은 고문 후유증으로 3~4일 앓다가 숨을 거뒀다. 최진동은 죽기 직전 아내와 둘째 아들 최국량을 불러 놓고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쏘독 전쟁이 이미 폭발했고 일본도 이 전쟁에 말려들 것이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우리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독립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 내가 죽은 후 봉오동 어귀 선산에 묻어, 죽어서라도 부모님과 함께 있게 해다오."참으로 독립투사다운 비장한 유언이 아닐 수 없다.

최진동의 일제 비행기 헌납은 연변 작가 류연산의 주장과 달리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최진동의 최후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37살의 나이에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금자탑인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최진동 장군은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열혈 독립투사였다.

두 번째 연변 작가 류연산은 최진동의 죽음 이후 일제가 최진동의"친일 공적을 높이 기리어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주었다"고 했다.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조선족 역사학자들이 쓴 『최진동 장군』(2006)에는 최진동의 죽음 직후 일제는 감시를 강화하여 가까운 친척 외에 부고 사실을 전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실제로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르도록 협박했다. 그리고 선산에 묻지 못하게 방해했다.

결국 일본 헌병대는 최진동 장군의 시신을 봉오동 입구 작은 언덕 밭에 묻도록 명령했다. 기가 막힌 일은 일제는 최진동 장군의 혼백이 다시 살아나올 수 있다며 시신을 넣은 관을 양철로 덮어 씌워버렸다. 그러자 둘째 아들 최국량은 항일투사인 아버지를 차마 그렇게 보낼 수 없다며 격분했다. 그래서 일본 헌병들이 돌아간 뒤 관을 다시 꺼내어 양철을 벗겨내고 관을 땅에 묻었다.

연변 작가 류연산의 주장대로 최진동이 친일파였다면 일제가 헌병을 파견하여 장례 일체를 감시하거나 최진동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관을 양철로 덮어씌울 정도이면 일제가 최진동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사건이다. 실제로 최진동 장군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동포들에겐 언제나 살아 있는 항일독립운동의 화신이었다.

최진동은 첫째 아들 최국신이 자신과 사상적 갈등 끝에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극심한 자책감과 우울증 끝에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은 항일독립투사였지만 코뮤니스트였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 최진동에게 심한 질책을 받고서 몸져눕게 된다. 그리고 시름시름 앓다가 1년 뒤에 큰아들은 안타깝게도 세상을 뜨게 된다.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던 며느리 역시 남편이 운명하던 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사건 이후 최진동은 큰아들 내외의 죽음이 마치 자신의 책임인 양, 내적 고통과 정신적 고립감 속에 심신마저 무너져 내렸다. 매일 큰아들과 며느리 묘소를 보는 것도 고통스러워 자신의 전 재산을 둘째 아들 최국량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홀연히 부인과 남은 자식을 데리고 봉오동을 떠나 두만강변 도문으로 이주했다. 부인 최순희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병은 더욱 깊어만 갔다. 최진동의 병세가 더욱 위독해지자 가족들은 부득불 일본인이 운영하던 병원 진료를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최진동은 집에서 죽을지언정 일본인 의사의 치료를 받지 않겠다며 완강히 진료를 거절했다.

최진동은 와병 중이던 1932년 초 이봉창 투탄사건(1932. 1)이나 윤봉길 홍쿠 공원 거사(1932. 4)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고무되었다. 예전 항일무장투쟁 시절처럼 치열하게 반일의지를 불태우며 무장투쟁은 못하겠지만 독립을 향한 항일의지를 다지고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1932년 늦여름 최진동은 병세에 차도가 조금씩 보이자 바깥출입도 하고 불교신자인 부인이 다니던 월정사 스님들과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병시중을 들던 큰딸마저 월정사에서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고 만다. 그러자 최진동은 또다시 크나큰 충격으로 몸져눕게 된다. 졸지에 큰아들 내외와 큰딸을 가슴에 묻은 최진동은 운신하기 힘들 정도로 심신이 쇠약해져 갔다. 부인 최순희는 둘째 아들 최국량에게 연락해 최진동을 작은 수레에 태워 다시 두만강변 도문 집으로 모시게 했다.

와병 중에도 최진동은 일제가 추진한 30년대 황민화 정책에 강하게 반발하며 항일의식을 잃지 않고 견결하게 지켜나갔다. 자신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부르지 못하게 하였고 일왕에 대한 참배도 거부했다.

▲ 1930년대 후반 서울 용산역 주변에 있던 한 신사에서 심상소학교(옛 보통학교)의 일본 학생들이 동방요배(궁성요배)를 하고 있는 장면.(출처 : 한겨레 신문, 사진사료연구가 정성길 씨 제공)

자녀들이 집에서 일본말을 아예 쓰지 못하게 엄하게 가르쳤다. 아들 4명 이름에 모두 나라 '국(國)'자가 들어가도록 지은 것도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담은 탓이다.

큰아들 국신(國臣)은 국가에 충성하는 신하가 되라는 뜻을 담았고 둘째 아들 국량(國良)은 나라의 선량한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뜻을 담았다. 셋째 아들 국빈(國彬)은 훌륭한 인재가 되라는 소망을 담았고 넷째 아들 인국(仁國)은 인자한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뜻을 담았다. 그만큼 최진동의 항일애국의식은 투철했다.

실제로 둘째 아들 최국량은 일제가 집요하게 추진한 황민화 정책 시절, 일본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모두 아버지 최진동의 항일정신과 민족의식을 이어받은 탓이리라.

세 번째로 연변 작가 류연산은 최진동이 봉오동 전투 이후 북간도, 시베리아 지역에서 수천 명의 독립군을 거느리고 무장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주사변(1931) 이후 일제에 투항했고 1938년부턴 일제 토벌대의 선두에 서서 항일독립군 진압에 앞장섰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자료나 조선족 역사학자들이 쓴 자료에는 봉오동 전투 이후에도 최진동은 연해주, 시베리아 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했다.

독립군 무관을 양성하기 위해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군자금 모집에 열과 성을 다했다. 1921년 9월엔 흑하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최진동 장군은 직접 무장대원을 지휘했다. 무장대를 이끌고 왕청현 라자구 방면으로 진출해 일제 관공서를 공격하기도 했다. 1922년 6월엔 러시아 옴스크 지방에 군관학교를 설립해 생도들에게 독립사상을 전파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일제 밀정이나 친일주구배를 처단하고 백위군을 추격하여 흔춘 방면으로 축출하기도 하였다. 1922년 11월엔 김규면과 함께 부대를 인솔해 조선국경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당시 코민테른조차 연해주 항일지도자로 문창범, 홍범도와 함께 최진동 장군을 꼽을 정도였다. 그만큼 러시아 연해주, 시베리아 지역에서 최진동 장군의 위상은 높았다.

최진동 장군은 1923년 초 직접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다시 동북만주지방으로 돌아온다.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하고자 통합된 독립군단을 편성해 '의병대'라는 항일무장조직을 결성한다. 최진동 장군은 통합군단 군무장으로 임명돼 북만지방은 물론 남만주, 그리고 러시아 방면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려 분투한다.

1924년 1월엔 북만주 청장년들을 모집해 이상촌 건설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의열단 김지섭 투탄의거(1924) 직후엔 자신이 통솔하는 부대 독립군들을 대상으로 결사대를 구성해 상해 의열단과 연락을 취하며 거사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진동 장군은 1924년 9월 돌연 중국경찰에 체포되고 1926년 8월 감옥에서 석방된다.

이후 최진동은 무장투쟁노선에서 온건한 독립운동 노선으로 선회한다. 과거 봉오동 전투의 전설적 인물인 탓에 일제의 집요한 감시와 사찰 대상이었지만 최진동 장군은 일제의 회유와 압력에 굴하지 않았고 민족을 배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최진동은 길림성 왕청현 대표로 활약하며 독립투사 김창환, 이청천, 이장녕, 홍진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인의 생활수준 향상과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분투했으며 '생육사(生育社)', '조선족 원로회'를 조직하는 등 꾸준히 민족운동을 실천해 나갔다.

만주사변(1931) 이후 최진동은 30년대 내내 와병 중이었고 작은 수레에 몸을 실을 정도로 거의 운신하질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 와중에 일제는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최진동 장군이 일제에 협조하도록 집요하게 강요했다. 최진동 장군은 끝내 일제의 회유와 강압을 거부했고 그런 이유로 헌병대에 연행돼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석방된 지 사나흘 만에 순국한 것이다.

비록 20년대 중반 무장투쟁을 멈추었지만 최진동 장군은 죽기 직전까지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실제로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었지만 최진동 장군은 지혜롭게 처신했다. 북만주 일대 조선인 동포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쉼 없이 분투했고 민족지도자로서 번민하며 실천을 멈추질 않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어 항일무장투쟁을 감행했다. 연변 작가 류연산의 주장과 달리 최진동 장군은 생의 마지막까지 꿋꿋이 절개를 지킨 위대한 항일독립투사였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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