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은 송철헌 선생님은 19238월 하순에 진주형씨 계해보의 서문을 지었다. 서문은 진주형씨가 금옥(金玉)처럼 소중한 근거, 진주형씨의 유래 및 분파와 주요 인물, 진주형씨가 청족인 근거, 자신이 서문을 짓게 된 배경, 그리고 장래 진주형씨에 대한 기대 등으로 이뤄졌다.

송철헌(1870????)은 진사(進士)이고 호는 지재(止霽)이다. 1912년에 간행된 경상남도 함양 출신 유학자 서상두(徐相斗; 18541907)의 문집 <심정유고>(心亭遺稿)의 서문을 지었다. <지재집(止齋集)>1960년에 간행됐다.

 

                                 문충사(文忠祠).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 대전광역시 동구 동부로73번길 44(용운동). 유학자 송병선(宋秉璿, 1836∼1905)·송병순(宋秉珣, 1839∼1912) 형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사우이다.두 형제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후손으로 형 송병선은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의 처단과 국권회복을 바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동생 송병순도 나라가 망하자 형의 뒤를 따랐다.출처: www.donggu.go.kr
                                 문충사(文忠祠).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    대전광역시 동구 동부로73번길 44(용운동). 
유학자 송병선(宋秉璿, 1836∼1905)·송병순(宋秉珣, 1839∼1912) 형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사우.
두 형제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후손으로 형 송병선은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의 처단과 국권회복을 바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동생 송병순도 나라가 망하자 형의 뒤를 따랐다.
출처: www.donggu.go.kr

그의 생부(生父)는 한말의 학자 겸 지사로 대의를 지켜 순국하기로 하고 유서를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자결한 심석 송병순(心石 宋秉珣; 18391912) 선생이다. 또한 그의 부()인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18361905) 선생은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의 처단과 국권 회복을 바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분은 민족혼을 일깨운 선각자이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큰 스승인 운인 송홍(雲人 宋鴻; 18721949)의 스승이다.

진주형씨 문중은 일제 강점기인 1923년 계해년에 족보를 만들었다. 이른바 계해보이다. 1808년 무진보, 1853년 계축보에 이어 세 번째 대동보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3년이 떠나간 엄혹하고 암울한 시점이다. 그런데도 19193·1독립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따라 서로 격려하며 독립 희망을 현실화하려고 피땀을 흘린 지 4년이 흘렀다. 진주형씨 계해보는 당시 장차 독립에 대비한 문중 차원의 노력이 맺은 열매라고 평가하고 싶다.

               雲人 宋鴻 先生 像(운인 송홍 선생 상)                                                      그날의 분노와 그날의 함성 / 꽃같이 쓰러진 / 그날의 더운 피와 눈물로 / 아아 타오르는 그날의 불꽃으로 / 이제야 여기 / 엄한 당신의 이름을 씁니다.          건립: 1967.11.02.                                                                                                         위치: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앞(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                              출처: 광주제일고등학교
               雲人 宋鴻 先生 像(운인 송홍 선생 상)                                                      그날의 분노와 그날의 함성 / 꽃같이 쓰러진 / 그날의 더운 피와 눈물로 / 아아 타오르는 그날의 불꽃으로 / 이제야 여기 / 엄한 당신의 이름을 씁니다.          건립: 1967.11.02.                                                                                                         위치: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앞(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                              출처: 광주제일고등학교

계해보 서문의 필자는 3명이다. 송철헌(宋哲憲), 판서공파 형기창(邢基昌), 병사공파 형광열(邢光烈)이다. 이번에는 송철헌 선생이 지은 서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서문의 원문과 음,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번역문>

대개 천하의 사물이란 희소하면 귀하고, 귀하면 진귀(珍貴)하여 보기 좋은 물건(物件)인지라 보배로 잘 간직된다. ()과 옥()은 사람에게는 딱히 쓸 곳이 없더라도 희소하여 얻기 어려운 까닭에 사람마다 귀한 보배로 여긴다. 금과 옥이 모래나 자갈처럼 많다면 모든 사람은 천하게 여긴다.

어찌 진주형씨가 금옥(金玉)처럼 소중하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형씨가 중국에 있을 때에는 정말 존귀한 성()이었고 역대의 명인들이 사기(史記)에 끊임없이 기록되었다.

당나라 정관 태종(太宗) 시기에 형옹(邢顒)이라는 분이 8학사 중 네 번째로 바다를 건너 동국(東國), 즉 우리나라로 오셨으니, 우리나라에서 형씨의 존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남양(南陽)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시중공(侍中公) 형공미(邢公美)가 진양(晉陽)에 봉해진 인연으로 자손은 형씨의 적()을 남양에서 진양으로 옮기게 되었다. 문학(文學; 형군소; 邢君紹)과 병사(兵使; 형군철; 邢君哲) 두 분의 후손이 갈라져 두 파를 이뤘다. 영호남에 흩어져 살아왔다. 높은 관직인 판서(判書; 형찬(邢贊), 형규(邢珪) ), 좌찬성, 대사간, 참판, 군수 등으로 여러분이 공훈과 업적을 쌓아 조정에서 그 이름이 잘 드러났다.

지지당(형사보; 邢士保), 도곡(형세영; 邢世英), 경암(형부; 邢溥) 세 분은 학행(學行)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제안재(형련; 邢璉), 우락당(형협; 邢浹) 두 분은 임금을 호위한 공로가 커서 벼슬을 받고 사당을 세워 분향하게 되었다. 송촌(형률; 邢溧), 백촌(형결; 邢潔), 효은(형세적; 邢世績), 영모당(형국윤; 邢國胤)과 같은 여러분은 효행이 탁월하여 함께 모범이 될 은전을 받았다. 이는 형씨 역대 행적의 대강이로다. 이상에서 보건대, 형씨의 근원은 깊고 흐름은 길다. 어찌 금옥처럼 귀한 청족(淸族), 즉 여러 대에 걸쳐 절의(節義)를 숭상(崇尙)해 온 집안이 아니리오.

형기창(邢基昌)과 형용권(邢龍權)이 나에게 족보 서문을 물어왔다. 내가 말하길, 밝고 아름다운 형씨가 금옥과 같은 청족임을 세상이 다 아니 모름지기 족보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족보 책을 정성 들여 만들었으니, 어찌 또 잘된 족보에 서투른 서문을 쓰겠는가. 그렇다지만 지금 인륜이 무너져 아들이 제 아비를 무시하는 자가 많으니 하물며 먼 조상을 알겠는가. 형씨만이 흐름을 거슬러 근원을 찾고 위로 조상을 잊지 않고 아래로 무궁한 자손에게 끼치니 정말 지금 천하의 금옥처럼 귀한 청족이로다. 세세 자손이 이 규칙을 지켜서 천만년의 오랜 세월에도 누를 끼치지 않는다면, 형씨가 금옥과 같은 청족으로써 어찌 동방에만 한정되겠는가.

때는 계해 (1923) 8월 하순

덕은(德殷) 송철헌(宋哲憲)이 서문을 쓰다

11열에 나오는 작설지전(綽楔之典)은 충신(忠臣)ㆍ열녀(烈女)ㆍ효자(孝子)들을 표창(表彰)하기 위()하여, 당사자의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던 붉은 문, 즉 정문(旌門)을 세워 주던 나라의 특전(特典)이다. 원문에는 작설(綽楔)이 도설(棹楔)로 나온다. 이는 오식(誤植)으로 보인다. 

13열에 나타난 청족은 여러 대로 절의(節義)를 숭상(崇尙)해 온 집안을 말한다. 송철헌 선생은 학행, 임금에 대한 충성, 효행 등을 실천한 구체적인 여러 인물을 들어 진주형씨가 청족이라는 근거를 제시했다.

14-15열에 나오는 불두포분(佛頭舖糞)은 불두착분(佛頭着糞, 佛頭著糞)으로 보인다. 불두착분은 부처의 얼굴에 똥을 묻힌다는 뜻으로, 훌륭한 저서(著書)에 서투른 서문(序文)을 쓴다는 말이다.

19열에 보이는 소양(昭陽)은 천간(天干) ()의 고갑자(古甲子) 이름이다. 대연헌(大淵獻)은 고갑자(古甲子)  십이지(十二支)의 해()와 같다. 따라서 소양대연헌(昭陽大淵獻)은 계해(癸亥)이다.   그리고 관()은 주역 64괘 중 제20번 풍지관(風地觀)괘이다. 주역 괘를 이용하여 열두 달을 표시할 때 관괘는 8월에 해당한다.

형씨가 금옥과 같은 청족으로써 동방에만 한정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근원을 찾아서 위로는 조상을 잊지 않아야 하고, 세세 자손이 천만년의 오랜 세월에도 누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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