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형씨 계해보(1923) 서문을 지은 형기창 선생(18531941)은 진주형씨 판서공 형군소(邢君紹)16대손이다. 그 분이 사신 시대를 보니, 1876년 조선과 일본의 병자수호조약, 1884년 갑신정변 혹은 갑신개혁, 1894년 동학혁명 혹은 갑오농민전쟁, 1895년 을미참변,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점,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등이 벌어졌다. 그분은 계속 소용돌이치는 시대를 사셨다. 그런 속에서도 1923년 우리 나이로 71세에 족보 만들기를 주도하였다.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 조상과 문중에 대한 존중의식이 없다면 앞장서기 힘든 일이다. 후손으로서 형기창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이 지극해짐을 억누르지 못하겠다.

진주형씨세보(晉州邢氏世譜),  1923년 계해보.
                                                           진주형씨세보(晉州邢氏世譜), 1923년 계해보.

어느 선배의 딸은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즐겁게 배웠다. 스스로 연습했다. 바이올린 전공으로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도중에 그만뒀다. 전혀 다른 분야로 대학에 진학했다. 왜 그랬을까?   넉넉지 않은 살림이 컸다. 바이올린 켜기에 대한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점점 더 좋은 바이올린을 가져야 했다. 그 선배는 그렇게 할 만한 살림살이는 아니었다. 요컨대, 타고난 재주를 잘 다듬어진 기량으로 드러내려면 적합한 도구와 연장이 관건이다.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연주자인 파가니니(Paganini; 1782~1840)에게 바이올린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떠할까? 가문에 족보는 필수이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서문의 첫머리에서 말몰이 명인과 궁술의 명인이 자기의 가치를 드러낼 조건이 보인다. 말몰이꾼에게는 수레가, 궁술의 명인에게는 활과 화살이 갖춰져야 한다. 항공기가 없으면 유명한 조종사의 조종술을 누가 어떻게 시험하고 인정하겠는가?  올림픽에서 사격으로 금메달을 딴 선수도 총과 총알이 없으면 그 가치는 나타나지 않는다.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값진 전통과 문화, 가르침 등이 족보가 없어서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면,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바이올린 연주자, 말몰이 명인, 궁술의 명인에게는 각각 바이올린, 수레, 활과 화살 등이 숙련된 기량을 드러내는 도구이듯이, 족보는 집안이나 가문의 내력, 인물, 가르침 등을 드러내는 방편이다. 아무쪼록 반드시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 제아무리 좋은 번득이는 생각도 기록하지 않으면 번개처럼 사라진다. 나는 생각의 휘발성과 번개성을 수시로 경험한다

서문은 안목이 좋은 자의 꾸짖음을 면하지 못할까 두렵다.”  로 끝난다. 연세가 아주 많으신 데도 겸손하고, 동시에 젊은 후손을 두려워하는 후생가외의 말씀이다. 서문의 원문과 음,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번역문>

() 씨가 말하길, 수레가 없으면 중국 주나라 제5대 왕 목왕(穆王)때의 말몰이 명인 조보(造父)라도 말을 잘 부릴 수 없고, 활이 없으면 궁술의 명인인 후예(后羿; 후는 하나라 시대 임금의 존호)도 활을 잘 쏠 수 없다.. 노나라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 없었다면, 공자님이 무슨 근거로 춘추를 지었겠는가?  이로써 가문이 족보를 갖추는 일은 나라가 역사 기록을 갖추는 일과 같다.

정자(程子)가 말씀하길,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후하게 하여 사람들이 근본을 잊지 않게 하여야 한다. 그러려면 모름지기 족보의 계통을 명확히 해야 한다.” 족보의 계통이 명확한 후에야 종족이 확정되고, 종족이 확정된 다음에야 풍속이 후하게 된다. 백 세대 아래의 종친이 백 세대 위 조상을 알아보는 데에는 족보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한집안에 살면서도 여러 집안의 사람들을 거두는 일은 족보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흩어진 종친과 더불어 인륜을 두터이 하고 친하게 지내는 정의(情誼)는 족보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족보의 계통이 종친에게 어찌 중차대하지 않겠는가.

우리 형씨가 족보를 만든 전후로 몇 번 책 한 권의 파보(派譜) 수준을 면하지 못하였다. 아직껏 (각파가 참여한) 대동합보를 갖추지 않았다. 우리 씨족의 정의(情誼)가 아직 두텁지 못하여서 그런가. 몇 사람이 도모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해서 그런가. 마음속으로는 개탄스럽고 섭섭하여진 지 오래됐다. 이에 마침 종친들의 의견이 한가지로 모였다. 한편으로는 문서를 발송하여 통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무실을 설치하고 원근 친척이 호응하여 초안을 바로잡았다. 각파의 후손이 비로소 구름처럼 모여 곧바로 대동보를 만들게 되었다. 세상 사람의 다사로운 마음이 기뻐할 때를 하늘이 기다렸다고 미뤄 상상할  만하다.

초하루가 다섯 번 지나자마자 족보의 완성을 고했다. 이처럼 일이 신들리듯이 빠르게 나아감은 사무를 맡아보던 모든 유사(有司)가 부지런히 일한 덕택이다.

마침내 (6권으로 된) 족보 한 질이 완성되어 한 권 한 권 펴서 자세히 살펴본즉슨 백 대의 조상과 종친은 뚜렷하게 윗대에  자리를 잡았고, 여러 파의 썩 먼 대의 자손들이 숲처럼 무성히 아래에 나열되었다. 이로써 갱장지모(羹墻之慕), 즉 조상을 지극히 추모하는 마음에 머무르고, 이로써 종친 간의 정의(情誼)를 가질 수 있으니, “우리의 족보를 보는 사람들은 효도하고 우애하려는 마음이 구름이 피어나듯 생겨나리라.”라는 소순(蘇洵)의 말씀은 과연 오늘을 위하여 준비한 말이로다. 어찌 기쁘지 않고 감복하지 않겠는가.

오호라! 이전 족보의 서문은 모두 당시의 유명한 선비가 참여하여 서술하였다. 앞선 조상의 공훈, 도덕, 문장, 효열 등이 남김없이 모조리 환히 실렸다. (족보를) 반드시 서가에 쌓아두지 말라. 단지 오늘날의 사항만 들어 족보 간행 사업의 시작과 마침을 서술한다. 그간에 수고한 차이와 부지런하고 덜 부지런한 조그만 차이를 어떻게 낱낱이 기재할 수 있겠는가. 위와 같이 대강을 약술했다. 안목이 좋은 자의 꾸짖음을 면하지 못할까 두렵다.

계해년 19238월 하순

후손 형기창(邢基昌)은 삼가 서문을 쓰다

: <진주형씨대동보>, 권지수(卷之首), 2003, 171-173쪽에 기록된 번역을 다듬고 편집함

원문 2열의 造父조보로 읽는다. 여기서 는 아버지를 뜻하지 않는다. 남자에 대한 경칭으로서 이다(<네이버 한자사전>). 예컨대,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주나라의 시조이다. 단보는 이름이고, 고공은 벼슬 이름이다. 주나라가 세워진 이후 태왕(太王)으로 추증되었다.

원문 2열에 나오는 여씨는 누구이고 그 말의 출처는 어디인가? 찾아보니, 중국 송나라 여조겸(呂祖謙; 11371181)이다. 주희(朱熹; 1130~1200)의 동료이다. 그는 <동래박의>(東萊博義; 25168)를 썼다. ‘동래는 그의 호이고, ‘박의여러 사항을 두루 논의하다는 뜻이다. 이 책은 춘추좌씨전에 기록된 사건에서 문제 삼을 만한 기사를 뽑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풀이한 책이다. 그가 말한 내용은 제8<8-2-6> 조귀간관사(曹劌諫觀社; 조귀(曹劌)가 사제(社祭)를 구경하는 것에 대하여 간언하다.)에 나온다. 그 글의 끝머리에서 사관(史官)의 공이 위대하다고 강조하였다. 그가 강조하는 바는 기록의 중요성이다.

말몰이 명인 조보와 궁술의 명인 후예가 각자의 기량을 잘 발휘할 조건은 어떠하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순자, 의병>(荀子, 議兵)에 나온다. “릇 군사를 사용하여 공격하고 싸우는 근본은 백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이다. 활과 화살이 고르지 못하면, 후예라고 해도 매우 작은 것은 맞히지 못한다. 임금의 수레를 끄는 여섯 마리의 말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조보라고 해도 먼 곳까지 그 수레는 이르지 못한다. 지식인과 인민이 서로 친하게 연대하지 않으면 중국 고대의 은나라 탕 임금과 주나라 무왕이라 해도 반드시 훌륭한 임금이 되지는 못한다.

원문 14열 상단의 갱장지모(寓羹墻之慕)는 무슨 뜻인가? 갱장은 국과 담장이다. 그런데 뜻은 지극히 추모하는 마음이다. 이는 중국 고대의 요()임금이 돌아가신 뒤에 순()임금이 3년 동안 앙모(仰慕)하여 앉았을 때는 담장에서, 밥 먹을 때는 국그릇에서 요임금을 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갱장은 전왕(前王)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나아가 앙모하는 마음이 지극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제대로 기억하는 자가 이긴다. 중국 CCTV의 프로그램 <국가기억>(國家記憶)을 본다. 대체로 개개인이나 집단은 능동적으로 기억을 조작한다. 자기 방식으로 걸러낸다. 우리나라 영토인 독도에 대한 일본의 주장이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기려면,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 서문 번역문 첫 문단의 말씀은 소중하다. “노나라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 없었다면, 공자님이 무슨 근거로 춘추를 지었겠는가?  이로써 가문이 족보를 갖추는 일은 나라가 역사 기록을 갖추는 일과 같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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